내 안의 그리스도
갈라디아서 2장 16~21절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만 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만 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 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말씀에 대해 묵상하자. 오직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는다는 말은 모든 개신교 신앙의 본질이다. 이것이 신앙의 핵심인데 우리는 잊고 산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신다. 믿음으로 말씀을 붙잡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라는 말이다. 믿음은 그저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요 믿음은 우리의 모든 실제를 모퉁이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두는 것이다. 뒤를 돌아보거나 좌우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요 그저 서서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에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우리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바울의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친숙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 안의 더 이상 나는 없고 그리스도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숭고하며 얼마나 겸손한가! 우리 자신을 제거하는 것이 믿음이라면 믿음은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행하기 가장 어려운 것이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하루 종일 육체의 양식을 찾으며 다른 것을 할 겨를이 없다. 이것은 마치 코비의 안경을 쓰는 것처럼 언제나 눈앞의 이익과 필요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 세계의 고통임을 잘 안다. 경제이론은 경제는 이기주의에 기초한다고 얘기해준다. 모두가 자신의 이익에 따라 살아갈 때 잘 작동한다. 모든 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할 때 모든 이들이 이익을 얻게 된다는 것은 아마 변증법적인 관점에서는 맞는 얘기일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이것이 이론적으로는 맞을지 모르지만 세계경제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다. 우리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했을 때 세계 다른 나라에서는 빈곤이 자리했다. 시대가 달라져서 유럽은 그 힘을 잃었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세계 힘에는 분균형이 존재한다. 이처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삶은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차이를 만든다. 내년에는 우리가 1999년에 열린 WCC 30주년을 축하한다. 그 당시 서울에서 정의, 평화, 창조의 완전성을 위해서 결정적인 발걸음을 했었다. 그 대회에서 공포된 선언 중 1가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실제로는 빈곤은 더 심해졌고 가난한 이들과 부유한 이들의 차이는 더 심해졌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유럽에서 이러한 차이를 더 느낄 수 있었다. 세계에 다른 지역 사람들이 자기 고향을 떠나 피난 왔을 때 우리가 한 행동은 국경을 넘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그렇게 행동한 이후 우리는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위한 세상은 정의와 평화가 없는 세상이며 그리스도 또한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믿음으로 내 안에 사신다. 만일 내 안의 나 자신이 산다면 그리스도는 존재할 자리가 없는 것이다. 중세 신비주의자들은 바울의 서신서를 읽으며 우리 안에 탄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간을 위한 우리 자신의 소멸에 대해 얘기한다. 내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는 없고 이기주의가 있는 곳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없다고 바울이 얘기하였다. 이것이 바울이 가르쳐주는 그리스도와 나의 관계성이다. 이 관계성이 오늘 메시지를 매우 강력하고 근복적으로 만든다. 믿음으로 의로워짐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무언가 해주길 바라고 기대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우리 자신의 모든 소망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 소망은 위대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쉽지 않으며 심지어 불가능하게 보인다. 이는 다음을 전제로 한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했던 것처럼 이런 삶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물론 우리 중 누구도 골고다에 가지도 않았고 경험하지도 않았다. 또 예수와 같이 잔인한 방식으로 죽을 수도 없음이다. 그러나 만일 십자가에서 구원이 이루어졌다면 그 죽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었다면 우리 모두 십자가에 달린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남들 앞에서 되기를 원하는 모습이다. 우리가 자신의 모습을 항상 사회와 뒤섞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이다. 우리가 누구인가에 관한 질문은 거의 언제나 뇌적 자아와 관련되어 답변되지 않는다. 보통 우리의 직업, 수입, 가문과 관련되어 답변된다. 물론 모두 중요한 가치이지만 이것이 진정한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노력과 성공으로 규정된 허상일 뿐이다. 이것은 사람의 관점에서의 성공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성공이 아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기초하고 있다면 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이렇게 바울의 말들을 보면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우리 자신을 잘못되고 이기적으로 가는 방향으로 이끄는 모든 것에 대해 못 박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외적인 상승이라 한다면 우리의 십자가의 못 박힘은 내적인 상승이다. 우리가 겸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높아질 것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는 말씀이 진정 실현된다면 더 위대한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참된 나와 자아는 현재 사회적 위치의 나가 아니라 창조주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자신인 것이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능력이 일어난다. 그 능력은 흔히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을 때 오해하는 것처럼 우리를 세상에서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고 평화가 없고 불의한 이 세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모든 성도들의 정체성이요 모든 인류에게 어떤 것이 정체성이어야 하는지 보여주시는 것이다. 모든 인류가 십자가와 관련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한 역할이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인간의 창조와 연관되어 있다. 이로 인해 비록 그들이 십자가 사건에 대해 믿지 않는다 해도 들은 적이 없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계시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을 들은 사람들,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 예수 그리스를 위해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삶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배운 사람들은 모든 인류 안에서 예수님의 거울을 보게 될 것이다.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살게 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인류의 의미가 실제로 서로서로에게 맞서는 경계를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정신적인 경계를 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하시는 것이 엄청난 선물이며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인이 되게 하신다. 이것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다른 눈으로 살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믿음으로만 들어오신다. 그러나 믿음으로 우리가 살아갈 때 모든 것이 변화하게 된다. 이를 위해 우리 성부 하나님과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도움을 구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