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07 남부뉴저지장로교회 주일예배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권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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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변증학과 현대사상을 가르치고 있다. 3년 전까지 그리니치 한인교회에서 담임으로 17년 정도를 사역했다. 지금은 인디애나 주에 살고 있다. 그리니치 한인교회가 창립 19년을 맞았다. 약속을 해 놓았는데 가는 길에 초청하셔서 왔다. 한국 교회와 이민교회에 염려를 나누었다. 공감도 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었다. 생기를 넣었더니 생명체가 되었다. 하나를 더 만드셨다.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 베필은 짝이다. 똑같은 2개이다. 아담과 똑같은 사람을 하나 더 만드셔서 돕게 만드셨다. 아담을 만드실 때처럼 해도 되는데 에덴동산에 질 좋은 흙도 많은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아담이 잠들었을 때 갈빗대를 꺼내서 하나를 더 만드셨다. 처음 하나였으나 둘로 나누어졌다. 그래서 아담이 하와를 보았을 때 "이번에는 내 뼈에서 나온 뼈 내 살에서 나온 살이니 여자로 부르겠다."라고 하였다. 원래는 하나였다. 이게 바로 사람이다. 보통은 부부에 이야기만 하는데 그렇지 않다. 하나가 둘이 되었다가 둘이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이요 사람이다. 우리이다. 오늘 본문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이다. 예수님께 영생을 물었다. 사람은 누구나 영생에 관심을 갖고 있다. 다른 종교를 봐도 무언가 하라고 한다. 주님이 답을 주었다. 답을 질문 형태로 주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되어있으며 너는 어떻게 읽느냐?" 이미 답이 있다. 율법은 성경이다. 구약이다. 주님은 "영생의 길은 성경에 있지 않느냐?"라고 하셨다. "이것이 곧 나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명백한데 사람마다 다르게 본다. "너는 성경에 어떤 말씀이 영생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신다. 율법 교사는 "내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제법 잘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님은 더 말씀하시지 않고 그대로 행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살리라." 실천하면 영원히 산다는 말이다. 그런데 또 다른 질문을 한다.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정작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었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데 그 이웃이 누구인지 고민한 것이다. 실천하기도 전에 이론적으로 고민을 한 것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사람이다. 아파트로는 층, 열과 같은 것이다. 한인교회도 이웃이다. 유대인들도 똑같이 이웃을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고 정의하였다. 유대인이라는 한계를 넘지 못했다. 밖에 사는 사람은 이웃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절대 이웃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는데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사마리아는 원래 유대인이다. 외적 하고 통혼하고 우상 숭배해서 혼합이 된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은 경멸하였다. 왕래를 할 때도 돌아갔다. 보기 싫어서이다. 미워했다. 절대 사마리아 사람은 아닌 것이다.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이 말은 제한하는 것이다. 솔직히 바꾸면 "사마리아 사람은 설마 아니겠지요?"이다. 주님은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동안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이 폭행했는데 반죽음을 만들었다. 도망을 갔다. 한 제사장이 그 사람을 보고 지나가고 레위 사람도 보고 지나갔는데, 사마리아 사람이 출장 가다가 그 사람을 보았다. 일단 응급 처치하고 숙소에 가서 돌보아 주고 주막 주인에게 도움을 부탁하였다. 이것을 얘기하시고 "이 세 사람 중에 강도 만난 사람에 이웃이겠느냐? 물으셨다. 바꾸면 "누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이다. 차이는 그 사람이 나의 이웃이 아니고 내가 그의 이웃이 되는 것이다. 유대인의 관심은 범위가 어디까지 인가에 대해 물었지만 이웃의 정의를 하셨다. 내 사랑을 받을 누군가가 아니가 내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된다. 순서를 뒤집으셨다. 내 이웃이 먼저 있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내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핵심은 누가 누구인지 따지지 말라는 말이다. 가리지 말라는 것이다. 누가 우리 이웃인가요? 전부이다. 질문에 뜻을 묵상하자. 비유에도 비슷한 것이 있다. 질문이 "사마리아 사람은 사랑하지 않아도 되지요?"이다. 거꾸로 바꿔서 뒤집으셨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 교사처럼 같은 직종에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이 사람들의 행동은 하나님 사랑과 정반대이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도 잘 모르지만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킨 것처럼 주님께서 비유로 들려주신 것이다. 핵심은 마음이다. 불쌍히 여겼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사마리아 사람은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인간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인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무시했다. 종교적으로는 거룩한 모습을 가졌을지언정 인간 이하가 된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의 문자는 몰랐지만 율법의 정신은 가지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실천했다. 정성을 다해 도왔다. 우리가 제사장과 레위인 사마리아 사람을 비교했을 때 종교적 행동과 일상의 행동의 괴리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 생활하며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알고 교회 봉사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고 이런 것이 중요하지만 인간다움이 없다면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알 것이다. 사랑, 희락, 자비.. 정말 멋진 인간이 되는 것이다. 사람다움을 갖게 된다. 주님의 비유 가운데 중요한 단어는 반죽음이다. 그런데 한국 개역성경만 빠져있다. 생사에 기로에 있다는 것이다. 그 말 듣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반 살았다. 가능성은 2가지이다. 그대로 죽을 수도 있고, 삶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이 삶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이 자비는 죽음에서 건져준 자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산다고 하였다. 방법을 물어보았기 때문에 이 비유를 던지신 것이다.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다. 그 뜻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자비를 베풀어서 삶으로 불러들여 살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라 뒤에 하나 더 필요한데 그 말씀은 안 하셨다. "너 역시 살리라. 영생을 얻을 것이다." 이것을 뒤집으면 이웃을 살리지 않으면 너도 못 산다는 것이다. 이웃을 살리는 것이 내 목숨과도 연결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이며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로 연합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사실 깨어져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도 깨진다. 아담과 하와 사이를 보자. 돕는 짝으로 만드셨는데 싸우고 경쟁한다. 남녀불평등이다. 남자와 여자만이 아니다. 부모와 자녀도 마찬가지다. "네가 애를 낳을 때 고통할 것이다." 부모 자녀가 갈라진다. 창세기 4장에서는 가인이 아벨을 쳐 죽였다. 죄가 갈랐다. 모든 사람이 갈라져서 싸운다. 남을 짓밟는다. 주님은 "네가 다른 사람을 못 살리면 너도 죽는다."라고 말하신다. 이웃은 나와 가까이 사는 사람이 아니다. 이웃은 사람이다. 사람은 모두 이웃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는 우리가 반죽음 상태이다. 생사에 기로이다. 이웃을 살리느냐 살리지 않느냐에 따라 삶이 결정된다. 우리의 이웃은 육신이다. 주님만이 영적으로 살릴 수 있다. 영생은 영원의 목숨이다. 질적인 차이를 알자. 공로 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 재물로 시간으로 사랑을 베푼다. 그런데 이것이 뭐가 대단한가? 영생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왜 주실까? 우리 주님이 먼저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이 왜 행해야 한다고 하시는가? 우리 삶에 열매가 없다면 가짜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주님 사랑해요라고 하면 가짜라는 것이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로 접붙임 된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해야 된다. 사람답게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자. 제가 미국에서 27년을 살다가 학기마다 한국에서 가르친다. 학교 친구들은 지금 완정 경쟁뿐이다. 저 사람을 제거해야 내가 산다고 퍼져있다. 이런 마인드가 퍼져있다. 사회 모든 면에서 같이 죽어간다. 핵심은 돈이다. 경제적 문제이다. 빈부격차이며 돈 독에 올랐다. 이 주범이 교회이다. 돈 독에 든 인간들 사이에서 독을 빼야 하는데 번영 복음이라는 가짜 복음이 들어섰다. 번영은 "돈은 하나님의 축복이다."라고 뒤집었다. 교회가 타락하고 세상이 타락하였다. 지식이라든지 지위라든지 권력이라든지 자동차라든지 같은 것이다. 차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조국에도 다른 인종이 많이 들어온다. 어떤 사람은 멸시하고 어떤 사람은 도와준다. 이럴 때 우리가 성경적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난민 이슈도 심각하다. 세계를 떠도는 이민이 많다. 크리스천은 배척하지 말아야 한다. 이슬람 사역하시는 분도 많다. 우리는 말씀에 원리로 나가야 한다. 한인은 정착을 잘한다. 고생하는 다른 이민자도 많다. 우리 조국을 위해 기도하자. 남북이 가까워지고 있다. 한국은 뒤집어지고 있다. 조국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 통일은 천천히 되어도 된다. 그러나 평화는 아니다. 이 모든 기도할 때 원리를 알아야 한다. 남쪽이 서로 갈라져 있다. 남쪽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든지 성경의 가르침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안보이신다. 이웃만 보인다. 이웃을 살리자. 그 일을 할 때 가장 기억할 것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자. 은혜가 원동력이다. 누가 죽어가는 그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 그래도 율법 교사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하지 않고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우리 이야기다. 말씀을 거듭 듣고도 도망하는 우리 마음을 꿰뚫어 본 것이다. 우리하고 생각이 다르면 사마리아 취급해버린다. 우리끼리만 살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도 죽는다. 무지이다. 사람은 사랑이다. 하나이다. 함께라야 한다. 살아있는 것이 사람이다. 먼저 우리를 살려 주셨기에 영생의 길을 알고 그 길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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