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07 분당우리교회 주일예배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이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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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장 3~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찬송가 455장  '주님의 사랑을 본받는 자'

우리들의 찬양 331장  '예수 이름 높이세'

 

'설레지 않음은 버려라'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곤도 마리에라는 여성이 썼다. 금요 예배에서 알았는데 이 사람은 정리의 여왕이라 한다. "정리는 곧 버리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내버리는 것이다. 독특한 것이 버리는 기준이다. 그 물건을 가슴으로 안아보고 설레면 보관하고 설레지 않으면 갖다가 버린다고 한다. 부교역자가 자기 아내를 안아보고 설레지 않으면 버리지 말라고 농담으로 말하였다. 저는 엄청 은혜가 되었다. 왜냐하면 저같이 변덕이 많은 남편에 대해 여전히 설레지 않을 것이다. 저 같은 사람을 사랑해 주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느껴져서이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이 10년 이상 똑같은 사람에게 설교를 듣고 설레지 않을 텐데 너무 고마웠다.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는 내용이 주님에게도 연결되어 주님에게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로마서 5장 8절을 보자. 10절도 보자. 백화점 갔을 때 확 띠는 물건이 있을 때 설레기 마련이다. 주님은 우리를 보고 아주 설레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도 설레지 않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서 구원하신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이 의처증 환자 같다. 의심을 하고 하나도 설레지 않는다. 지난주에도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너무 감격하게 되었다. 찬송가 135장 3절 가사도 마음에 든다. 베드로와 도마보다도 더 하면 더했지. 우리 안에 설렘도 없는 저 같은 것을 감격에 버거워 견인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주님에 대한 사도신경 고백을 보면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 고백은 4가지 고백이 담겼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도 뺄 것이 없다. 로마서 1장 4절을 보자. 예수와 그리스도의 직분을 살펴볼까 한다.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직분이다. 누가복음 1장 30절을 보자. 성부 하나님께서 의도를 가지시고 지으신 것이 '예수'이다. 구원자라는 뜻이다. 마태복음 1장 21절을 보자. 사람들이 교회를 찾고 예수님을 찾는 이유는 아주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불면증으로 찾고, 어떤 사람은 대인 관계 때문에 고독하고 외로운 마음 때문에 찾는다. 또 어떤 사람은 병이 들어서 찾고,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문제나 어려움 때문에 찾는다. 여러 갈래로 양상이 나뉜다. 오병이어를 구경하러 오기도 하였고 귀신 들린 사람을 구원하러 찾으러 오기도 하였다. 주님은 외면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알고 믿어야 한다. 위 사항 모두 구원자 예수님의 영역의 들어가지만 그 근원적 의미는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위에 나열한 내용은 별책부록이고 가장 중심은 죄 용서함인 것이다. 십자가이다. 원수에서 회복된 것이다. 기억할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데 나의 유일한 고백이 되어야 한다. '나는 예수님만 믿습니다.'라고 해야지 '예수님도 믿습니다.'라고 하면 안 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보면 "왜 하나님의 아들을 '구세주'라는 뜻의 '예수'라고 부르십니까?라고 질문한다. 답은 "그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께 있으니 다른 곳에서 구원을 찾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가 구원자라는 뜻의 예수를 되네일 때 나는 구원자가 필요한 죄인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대조를 볼 수 있다. 사도행전 7장 54절을 보자. 사람은 자기의 약점을 드러내길 꺼린다. 사도행전 2장 37절을 보자. 그저 설교 듣고 죄지어도 상관없다는 설교만 기다리는가? 신앙의 성숙은 마음의 찔려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 죄에 대한 인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과 한국 교회는 우리가 노력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절망의 신음소리가 나와야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보이는 것이다. 만약 안 보인다면 말씀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심각하게 점검해보아야 한다. 두 번째로 직분은 '그리스도'이다. 누가복음 2장 11절을 보자.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구약의 히브리어로 '메시아'이다.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다. 구약의 기름 붓는 행위는 직분자에게 행하는 것이다. 선지자, 제사장, 왕이다. 구약의 세 직분은 각각의 역할의 구분이 명확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것의 3개를 통합적으로 이루시는 분이다. 하이델베르크 제31문을 보면 "왜 예수님을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의 '그리스도'라고 부르십니까?"라고 질문한다. 답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기름 부으심으로 우리의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과 뜻을 완전하게 계시해주는 위대한 선지자가 되셨고, 자기 몸을 화목제로 드려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늘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이 되셨으며, 우리를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시고 죄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늘 지켜 보호하시는 영원한 왕이 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을 통합하는 예수님의 직분을 설명하였다. 당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신 것이다. '그 외아들'은 우리 번역이 잘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녀독남을 외아들이라 하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다. 총신대 이상훈 교수가 쓴 것을 보면 '하나라는 숫자의 개념보다는 독특하며 특별하다'의 의미이다. 독생자라는 표현이 더 좋다. 사도신경은 성부, 성자, 성령의 신비의 일체인 한 몸을 이루는 의미가 녹아내려야 하는 것이다. '우리 주'라는 것은 헬라어로 퀴리오스이다. 그 당시 로마 황제에게 사용되던 의미였다. 마태복음 16장 15~16절을 보자.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이 대화를 하였다. 이 도시는 헤롯왕이 로마 황제에게 받은 도시이다. 빌립이 이곳을 수도로 만들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세상 권력을 상징한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심을 밝혔다. 내 인생의 돈이 주인이지 않는가? 우리는 돈이 시키면 다 한다. 권력, 명예 등 교회를 개척하고 정신 차리지 않으면 내가 주인이 될 수 있다. 오늘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주님이 물으신다. "너의 주인이 누구이냐?" 김덕종 목사님이 쓴 '사도신경 안 외어도 좋지만'을 보면 신학대학원 시절 회상이 나온다. 신학교 교수는 늘 주님을"주인님"이라고 불렀다. 주인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신학생들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그러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자. 사도바울의 주인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신앙고백이다. 내면에 사도바울과 같은 고백이 생기면 첫째로 성품이 닮고 싶어 지는 것이다. 둘째로 사역을 닮아가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시시한 사람은 없는 것이다. 모두가 소중하다. 어제 오전에 너무 은혜가 되었다. 부흥회가 되었다. 갑자기 제 어린 시절 생각이 났다. 저는 골목길 끝 집에 살았다. 그 앞에 저 보다 한 살 어린 친구가 살았는데 보통 성격이 아니었다. 한 성격이었다. 성격이 저와 마찬가지여서 많이 싸웠다. 싸우고 풀고를 반복했다. 그분의 엄마가 더 이해가 안 되었다. 싸우면 문제를 삼았다. 소리를 질렀다. "찬수 엄마여~"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 분이 막 뭐라고 항의를 하면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저희 어머니였다. 한 번도 저의 편이 돼주지 않았다. "왜 나 보고만 잘못했다고 하는가?" 저희 어머니는 5남매 중에 제가 막내였기에 저를 제일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어제 아침에 그 생각이 났다. 어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는 예수 믿는 가정이잖아. 저 집은 예수 안 믿잖아."라고 생각이 들어 울컥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예수님의 고난이 표현되어있다. 3절을 보자. 7절도 보자. 그 억울한 십자가를 지시고 조롱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어린양처럼 잠잠히 서있으며 입을 열지 않으시는 것이다. 왜 항변하지 않으셨을까? 베드로가 병사의 귀를 잘랐을 때를 기억하는가? 마태복음 26장 54절을 보자. 두려움에 떠는 양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하는 순간 우리의 구원은 없는 것이다. 왜 어머니가 대들지 않을 수 없었냐는 것이다. 이런 것 때문에 눈물이 났다. 찬송가 455장 1절을 불렀다. 하늘로부터의 평강을 원하는가? 이 찬양이 한국교회에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상처가 있는 분이 있다면 성령께서 요한복음 16장 33절을 쥐어 주셔서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네가 손해를 봤지만 네가 이기는 거야."라고 말이다. 결론을 맺는다. 이번 여름도 비장한 마음으로 몇 주간 설교를 내려놓는다. 미국 설교가 잡혀있다. 취소하고 싶다. 대안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면 진 거 같아도 이기고 손해본거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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