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장 1~6절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성경을 펼쳤을 때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읽어가는가? 제가 드리는 조언 몇 가지는 '성경과 누가복음을 누가 썼는가? 기계적으로 썼는가?'의 관점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쓴 것이다. 누가가 쓴 것은 누가의 냄새가 바울이 쓴 것은 바울의 냄새가 물씬 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학자가 기계적으로 쓴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다. '유기적 영감'이다. 유기적이라는 말은 생명적 연합인 것이다. 손과 손목은 연결되어있는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연결이 유기적 연결이라는 말이다. 성령께서 누가를 감동시킬 때 어떻게 하였을까? 신비로운 일이다. 50/ 50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인가 인간인가? 100% 사람이며 100%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질문해보자. 왜 이 얘기를 첫 장에 기록하셨을까? 항상 생각해보자. 구약성경은 히브리어,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번역을 잘해도 항상 벗어나기 십상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번역이 있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무 치우쳐지면 안 된다. "강물에 네 돌을 던져라." 이것은 어떤가?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무슨 말인지 모른다. 수 천 년 전에는 남을 도와주라는 말이었다. 그대로 번역하고 설명을 붙이던가 해야 할 것이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지방 신문에 실린 내용이다. 고등학교 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차를 하나 선물해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졸업식날 성경이 들어있었다. 그래서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가출해버렸다. 여러 해 뒤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가 끝난 뒤 자기 방에 들어가 보니 자기 책상 위에 성경이 그대로 있었다. 그것을 다시 열고 성경을 열어보니 봉투가 있었다. 자동차 값이 들어있었다. 편지도 있었다. "자동차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고 싶다."라고 쓰여 있었다. 누가복음을 읽으면서 우리도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갖고 싶은 것이 많은가? 결혼, 집, 건강 등 수도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외면하시지 않는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 영성이 높아지는 것이 현실에서 도피하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공격한다. 스크루 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을 보면 스크루 테이프라는 사탄이 졸개들을 훈련시키면서 "네가 공격하는 크리스천을 그렇게 공격해서는 힘들다. 그 청년이 어머니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을 닮게 하시고, 기도 많이 하시고, 성경 많이 읽게 하시고'라는 내용의 기도는 그대로 두고 그 어머니의 관절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못하게 막으라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현실 문제는 그대로 버려둔 채 별세계로 살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나라에 속해 있다. 하나님 나라와 현실 세계이다. 사탄은 우리를 믿음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 쉽지 않으니 우리의 균형을 깨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잘못 깨닫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접할 때 위 내용처럼 아버지가 자식에게 주어야 할 때 갖고 싶은 것뿐만 아니라 훨씬 더 큰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이 기록을 주신 것이다. 서론에서 기억할 것은 예수님의 전기가 네 권이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다. 전기가 이런 방식으로 기록된 적이 없다. 링컨의 전기는 대개 비슷하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다. 마태복음의 복음은 사자 복음이다. 백수의 왕 라이언 같은 모습이다. 사탄의 시험을 깨끗이 이기는 모습과 바람이 잔잔하게 되는 복음이다. 마가복음은 소 복음이다. 채찍을 맞으며 묵묵히 이겨내는 모습이다. 요한복음은 독수리 복음이다. 하늘 높이 떠 있는 독수리 같은 모습이다. 누가복음의 별명은 사람 복음이다. 인간 예수님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것이 사복음서이다. 옛날에는 마태, 마가, 누가를 공간 복음이라고 비슷하다고 여겼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너무 좁게 설명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시험기록만 해도 새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전혀 다른 접근으로 다가온다. 가령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소 복음이라고 하였다. 고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시험을 물리친 라이언 같은 모습이다. 성경을 좁게 보면 의미를 놓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눈을 하나님에게 고정해야 한다. 본문을 보자. 누가복음을 누구에게 썼다고 되어있는가? 데오빌로가 누구인가? 높은 분이라고 되어 있을 것이다. 4절을 보자. 물론 완전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소개하는 면도 없지는 않다. 목사도 그렇다. 항상 성도 앞에 서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읽을 때마다 다르다. 우리가 삶 속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언제가 기쁜지 물어보면 언제가 가장 기쁜 때 일 것 같은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결혼한 날을 꼽는다. 별로 행복하지 않아도 그렇게 대답한다. 두 번째는 첫 아이를 얻었을 때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전혀 다른 것을 얘기한다. 14절을 보자. 요한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태어날 것을 예언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태어난 것도 아닌데 기뻐할 것이라고 얘기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도 생각해보자. 요한은 주인공이 아니다. 예수님이시다. 천사가 사가랴에게 "아들을 날 것이다."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 10달 동안 벙어리가 된다. 자기 아내의 나이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도 아닌데 예수님이 오시기 6개월 전부터 전령사 얘기를 하시는 것이다. 세례를 주신 것도 중요한 것이지만 세례 요한은 샘플인 것이다. 예수님 이전에 앞서서 활동하지만 먼저 죽었다. 누가는 이 사람들 다음 세대이다. 누가복음 다음이 사도행전이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연속 편이다. 시리즈이다. 그런데 세례 요한과 예수님, 예수님과 베드로가 교차하여 나타난다. 2000년 전에 기록된 것이 누가복음이고 그다음이 사도행전이다. 성령의 역사는 계속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까지 흘러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큰 계획이시다. 그런 부름이 우리에게까지 임하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 낮은 자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분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주셨는데 우리에게도 계속되는 것 같다"는 느낌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분의 아들이 SKY 대학을 가면 이런 것이 임하는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의 자녀 중 이삭만 약속의 땅을 주셨다. 에서와 야곱도 그렇다. 에서는 하나님과 상관없다. 이렇게 해서 12지파가 형성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 배척하였다. 왜 12제자를 주셨나? 12지파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완전수인 것이다. 12제자는 12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12명에 포함되는 모든 사람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가 믿는 믿음인 것이다. 우리가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말씀을 믿는 사람인 것이다.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인 것이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은 같은 피를 가져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믿음을 가져서이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얘기가 우리 얘기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얘기인 것이다.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 > 성경사랑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다시 읽기2 (0) | 2019.11.2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