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핵심적인 키 포인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임마누엘이다. 주님이 내 삶을 다스리시며 내 삶의 주인이시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교회에 나갔으며 고1 때 하나님을 만났다. "목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믿음도 없고 아버지는 파산하였다. 인생이 고단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나를 보고 계셨고 계획하셨다. 나중에 그것이 감격으로도 다가왔지만 부담이 공존하였다. 결국 신학대학교도 갔고 결혼도 하고 군대도 갔다 왔으며 신학대학원도 갔다. 그런데 학교에 선교사가 오면 숨고 싶었다. 자칫 아프리카 오지로 보낼 것 같아서였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은 평생 배우는 것이다. 우리의 불안을 극복해가는 것이다. 아주 충만한 감사의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 욥기는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욥처럼 투정하는 것조차도 믿음이라고 하신다. 누가복음은 마리아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볼 수 있다. 마리아는 20살이 채 안되었다. 10대 후반일 것이다. 그저 고등학생이나 중학생 정도의 나이인 것이다. 그녀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온 것이다. 1장 28절을 보자. 30절도 보자. 하나님이 잉태하게 하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그 당시 처녀가 잉태하면 죽을 가능성이 많다. 실제로 요셉이 잉태함을 발견하고 정혼을 파기하려 하였지만 막으셨다. 돌에 맞아 죽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역사가 지나서 마리아가 얼마나 놀라운 선택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몸을 통해 태어나는 것이다. 마리아가 엄청난 일에 개입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써의 부담은 죽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1장 33절을 보자. 아기 예수가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혈육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인이 1300만 명 정도 된다. 하지만 그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10%로도 안 되는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머지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극소수만이 그리스도인이다. 한마디로 야곱의 집에서 왕 노릇 하지 못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새 이스라엘을 위하여 우리들을 위하여 야곱의 집이 되는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서 왕 노릇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유대인들을 대신해 축복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통치권이다. 누가 왕인 것인가? 돈이 아니다. 권력이 아니다. 서기 70년 독립전쟁 때 예루살렘이 무너졌다. 성전도 무너졌다. 그런데 그 안에 은화가 엄청나게 나온 것이다. 백성들은 가난한데 누가 이런 것을 저축했는가? 제사장들이다. 은화가 무려 250만 개나 나왔다. 결국 성전과 함께 이스라엘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리고 새 이스라엘 운동을 하시는 것이다. 마리아를 하나님이 쓰셨는데 그녀는 나사렛 사람이었으며 시골 출신이었다. 아주 보잘것없는 여성이었다. 시골에서 밭에 나가 일하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하나님이 일부러 그러신 것인가? 귀족 집안에 제사장 딸이 아니다.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천사가 "은혜를 입은 자여~"라고 말하였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인 것이 말도 안 되는 개입인 것이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기적인 것이다. 우리의 삶도 쫄딱 망하게 될 것처럼 보인다. 은혜를 향해 가는 문이 좁은 문인 것이다. 마리아의 얘기가 우리 얘기이다. 로마 황제를 전도해서 뜻을 이루신다면 조금 더 효율적인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장로님이 대통령이 된다고 전도가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새로운 나라가 되는가? 더 이상 고통과 아픔이 없고 불완전한 나라가 될 수 있는가? 우리가 받아들일 때 그 새로운 나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만약 그것을 거부했다면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택할 것이다. 오늘도 이것이 반복되는 것이다. 결혼도 하나님 나라 운동에 일부인 것이다. 에베소서 5장 27절을 보면 결혼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인 것을 얘기한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도 마찬가지다. 순종을 하는 사람을 통해 사랑과 평화가 임하는 것이다. 삶의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연예인으로 살면서도 하나님이 왕 노릇 하시는 것이다. 인기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도전을 받는 다면 마리아와 마찬가지인 입장에 놓이는 것이다. 인기를 붙잡으며 고자세로 버틴다고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성경에 얘기가 우리의 삶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신학으로 부름을 받는 것과 내 삶을 산다는 것이 똑같은 것이다. 직업을 통하여 부르시기도 하시지만 결국 똑같은 부름인 것이다. 저도 교회와 선교에 서 있다지만 교회도 세속적인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 안에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왕으로 임재할 때 필수적으로 순종하고 섬기는 것 뒤에는 두려움이 따라오지만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마리아보다 요셉이 일찍 떠났다. 외로움이 찾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마리아는 더 나아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떠나는 모습과 찢기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마리아의 모습에 슬픔과 평화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다. 마리아가 먼저 길을 걸었고 우리는 그 뒤를 뒤따라 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을 원하지 않으시며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원하신다. 반드시 두려움이 따라올 것이지만 오늘도 그런 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 이 가운데 역사가 임하는 것이다.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보고 복의 근원임을 얘기하신다. 우리를 보고도 얘기하시는 것이다. 마리아가 순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리 가운데에도 얘기하시는 것이다. 마리아를 기준으로 보여 주시는 것이다. 사탄은 오늘도 그것을 고백하지 못하게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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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다시 읽기1 (0) | 2019.0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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