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 1~4절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복을 받고 누리길 바란다. 세상 사람들은 하는 사업이 잘 될 때 자녀들이 건강하고 감사한 일이 가득하면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가 복 받으며 살기를 바라지만 현재 상황은 어려움과 하는 일이 잘 안되고 자녀들이 말썽을 일으킨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삶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 세상과 예수님이 말하시는 복에는 차이가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을 얘기한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으면 복 받았는가? 좋은 경치를 보면 복 받았는가? 그렇게 사는 사람이 많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사람들이 말하는 복과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전혀 다른 얘기를 하신다. 이 본문의 배경은 마태복음 5~7장을 배경으로 하는데 산상수훈, 산상보훈에 대한 것이다. 상상 수훈에는 구약의 율법보다 강력하며 어려운 설교로 무장되어 있다. 팔복에 관한 것이다. 나중에 이것을 보면 아시겠지만 이것이 과연 복인가?라는 질문이 따라 나온다. 구약의 율법보다 강력한 것을 요구하신다.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돌려대라고 하신다. 십리를 가면 이십 리를 같이 갈 것을 요구하신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다. 거짓 선지자들에 미혹을 피하라고 하시고 양의 탈을 쓴 늑대 같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실 때에 말씀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마태복음 5장 1~2절을 보자. 1절을 보면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두 부류가 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부류는 무리와 제자들이 있는 것이다. 누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지 주목하여야 한다. 마태복음 4장 23~24절을 보자. 여기 보면 무리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 주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다. 무리들의 특징은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병을 고칠 때 몰리는 것이다. 말씀을 전할 때는 빠져나가는 것이다. 내 문제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제자들은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 위해 관심을 갖는 이들이다. 혹시 자신의 문제만 관심이 있고 주님에게는 관심이 없지는 않은가? 남은 상관없이 자신의 배만 부르는 것에만 관심 있지는 않은가? 이런 사람이라면 무리들인 것이다. 이 무리들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깝지 않지만 교회를 위해서 오십 불을 요구하면 "뭐 그리 많냐?"면서 손사래를 친다. 오늘 나오는 제자들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나온 것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다섯 가지 설교가 나온다. 아주 강력하게 이런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이다. 본문에 제자는 열두 제자를 가리키지 않는다. 5~7장에 제자들은 제자에 삶을 살려고 모인 사람들이다. 이 분들은 열심과 충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회사가 신입사원을 뽑으려 한다면 학력과 적성을 입력하여 평가할 것이다. 예수님도 이렇게 평가할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의 출세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청탁할 사람들이다. 의심이 많아서 우리 회사에 부적합하다고 할 것이다. 베드로는 성격이 급해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높다. 안드레는 내성적이라 일을 할 능력이 안 될 것이다. 야고보는 혁명가 기질 때문에 노조를 만들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할 것이다. 제자들 중에서 신입 사원으로 뽑힐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아주 유능한 사람은 공교롭게도 가롯 유다인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기독교 역사에 보면 영광 돌렸던 사람들은 오늘의 진리와 비견하였을 때 어긋나는 점이 있는 것이다. 가롯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열한 제자가 진짜인 것이다. 오늘 자신의 문제만 생각하고 오신 분이 아니길 바란다. 주님의 제자의 모습으로 살자. 무리들은 자신의 뜻이 아니면 떠나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뜻을 먼저 헤아리는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 주위에 연약함을 바라보는 눈이 있는 것이다. 무리들은 좋은 자리를 찾아 음식을 먹으려 한다면 제자들은 입구에 앉아서 나중에 식사를 하려고 마음을 쓰는 것이다. 스스로 손을 얹고 무리에 가깝지 않은지 생각해보자. 나의 목적보다는 주님의 기뻐할 일들을 살피는 제자가 되자. 그러면 제자들은 도대체 어떤 복이 임하는지 찾아보자. 가난한 자는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하게 된 사람이며 웅크려있는 사람인 것이다. 고통받는 사람인 것이다. 미국에 힙 티그린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1916년 이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가스비를 아끼려 했다고 한다. 그 자손인 아들이 다리를 다쳤으면 치료를 위해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데 "가만히 두면 낳는다."라고 말하고는 데려가지 않았다. 그래서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통장에 천억 원이 있었다고 한다. 통장에 억만금이 있으면 무엇하는가? 그것을 쓰지 못하고 오트밀 먹으며 거지처럼 행동하면 가난한 사람이다. 누리지 못해 가난한 것이 아니라 인색하고 세상에 진리에 빠져 이기적인 삶을 살다가 결국 많은 사람에게 손가락질받으며 가난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집에 가스도 좀 틀고 좋은 것도 좀 먹자. 예수님이 얘기하시는 가난함은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자기 힘이 약함을 인정하며 주님 앞에 내려놓는 자이다. 붙들어 주시도록 도와주시도록 고백하는 사람인 것이다. 요즘은 몇 세까지 사시는가? 평균적으로 80 내외로 사신다. 워낙 장수하시는 분이 많으셔서 명함도 못 내민다. 60세가 지나면 인생의 3분의 2는 지난 것이다. 앞으로 살 날이 짧은 것이다. 지금까지는 내 이기적인 목적으로 살았다면 남은 인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내 평안과 가족만 위하였다면 소외된 이들을 섬기다가 가야 하는 것이다. 심령의 가난함. 실패와 좌절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통로가 되길 바란다. 주님을 바라볼 때 천국이 임하는 것이다. 내 심령이 가난해지고 낮아지고 주님을 바라보며 이제는 주님이 통로가 되셔서 천국 백성임을 감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인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복이 있기를 바란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어떤 위로를 받는가? 4절을 보자. 애통하다는 의미는 마음에 아픔이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도 누구를 애통하며 눈물을 흘린 적이 있을 것이다. 제자들의 삶을 보면 칼을 향하는 자들에게도 애통하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미국에 프레이라는 박사가 눈물에 대한 연구를 하였다. 양파를 썰때 눈물을 채취하고 누군가를 안타까워할 때 눈물을 받아보니 다르다는 것이다. 양파의 눈물은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애통하는 눈물은 치료의 호르몬이 섞여 있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삶의 고통이 해결되는 것이다. 우리도 실컷 울면 시원한 것이다. 하나님이 애통하며 눈물 흘리는 자들에게 치료의 원기를 주시는 것이다. 나무도 울창하게 자랄 때는 커진다. 그 나무의 활엽수 밑에서는 쉼이 있을 수 있다. 사막의 선인장에는 가시밖에 없다. 강퍅하다. 눈물 흘리며 부르짖으면 위로와 회복이 있어 치유가 있는 것이다. 눈물과 애통을 아시고 위로해 주시는 것이다. 진짜 애통하면 눈물이 나는 것이다. 제가 목회를 하다 보면 자녀분 때문에 부탁의 기도가 많이 들어온다. 그러면 제가 "돈 그만 주시고 그 자녀를 위해 애통하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라고 얘기해 준다. "자녀가 잠들 때 애통하는 눈으로 기도해 보세요."라고 얘기하였다. 거의 대부분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벌어진다. 오늘부터라도 애통하는 기도를 하자. 눈물의 기도가 자녀를 바꾼다. 이것이 하나님께 인도하는 도구로 작동한다. 그러면 그것이 주의 허리병에 담아 전달되는 것이다. 이것이 씨앗으로 심기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의 단비로 회복과 치유가 일어난다. 암 환자를 치료하는 이병욱 박사의 책에 보면 "저는 이제까지 치료하면서 웃음과 눈물의 치료를 하였다. 웃음치료보다 중요한 것이 눈물 치료다. 원망과 불평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치료약을 선물하셔서 깨끗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치료하시는 것이 눈물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통해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신다. 스트레스는 질병 덩어리이다. 이것을 치료하는 것이 애통하는 눈물이다. 이것이 치료의 도구인 것이다. 서로를 위해 애통하는 것은 치료가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이다. 옆 사람을 보며 그 가치를 경험해보자.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와 애통함을 통해 참 위로를 경험하자. 어떤 초등학교 3학년생이 열심히 발표하였다. "저는 충청북도 청주가 고향입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교장이며 아버지는 무역회사 과장입니다. 나는 훌륭한 집안에 태어나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발표하였다. 그다음 아이도 자랑하며 발표하였다. 선생님이 당황스러워했다. 저쪽에서 다가오는 아이가 고아원에 아이였다. 혹시나 상처 입지 않을지 두려웠다. 그런데 그 아이가 미소를 지으며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아버지는 많은 자녀가 계십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많은 형제가 있어요. 우리 아버지는 주인이시며 사랑이 많아요."라고 하였다. 선생님은 어느새 눈물이 났다고 한다. 저와 여러분도 어떤가? 우리도 고아처럼 불쌍함으로 쳐다볼지 모르지만 주님의 제자들은 나의 아버지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천국 위로와 은혜 때문에 눈에 보이는 어려움이 지나가는 것이다. 인생에서 어떤 것이 남아있는가? 주님의 모습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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