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우리가 몰랐던 진짜 이야기!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요?
1. 6.25 전쟁, 군인들만 싸운 전쟁이 아니라고요?

- 6.25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만은 아니었어요 . 북한군과 국군, 그리고 유엔군과 중공군이 싸운 국제전의 성격도 있지만 , 사실 이 전쟁은 체제 전쟁이었죠 . 공산주의 체제로 가려는 세력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세력 간의 치열한 싸움이었어요 . 어쩌면 제2의 6.25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이 지금 우리 앞에도 다가오고 있고요 .
이 전쟁의 참혹함은 민간인 희생자가 많았다는 점에서 잘 드러나요. 놀랍게도 시신들이 전투 현장이 아니라 마을 곳곳에서 발견되었죠. 방공호나 우물가 같은 곳에서 집단 시신들이 발견된 거예요. 도대체 6.25 전쟁은 어떤 전쟁이었길래 이렇게 많은 민간인이 죽고, 그 시신들이 마을에서 발견된 걸까요?
우리가 잘 모르는 중요한 사실은, 이 전쟁에 군인들만 참여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남한이든 북한이든 마을에 살던 좌익 세력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이들이 전쟁의 중요한 주체였죠. 이 사실을 알아야 마을에서 벌어진 참혹한 일들을 이해할 수 있답니다.
2. 김일성은 왜 남침을 결심했을까요? 남한 좌익 세력 때문이라고요?

여러분은 6.25 전쟁이 김일성의 남침으로 시작됐다는 걸 잘 알고 있죠? 그런데 김일성이 남침을 결심하고 소련의 스탈린이 이를 허락한 배경에는 남한의 좌익 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전쟁 허락을 받으러 갔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김일성은 남한에 한두 번 자극만 주면 내란이 일어나 인민의 힘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했대요. 남한에 공산주의를 바라는 내란 세력이 많아서, 자극만 주면 인민들이 봉기해서 순식간에 공산화될 거라고 말했죠. 김일성은 실제로 남한 내 좌익들의 봉기를 믿었던 거예요.
전쟁이 일어나기 한 달 전쯤, 박헌영은 북한의 주요 군 지휘관들 앞에서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지하에 잠적해 있던 20만 남로당원들이 일어나 순식간에 공산화될 것이라고 장담했어요. 그래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3일 동안 기다렸던 이유가 바로 남로당의 봉기와 인민들의 호응을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해요. 북한의 남침은 남한에 있는 좌익들을 철저히 염두에 두고 일어난 전쟁이었답니다.
3. 서울이 점령당했을 때, 우리 이웃들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어요. 서울 점령 당일 새벽, 서대문 형무소와 마포 형무소에 갇혀 있던 수많은 재소자들이 풀려났는데, 대부분이 좌익 사범들이었죠. 이들은 북한군과 합세하기 시작했어요.
모윤숙 시인의 수기에는 당시 서울 시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어요. 북한군이 행진하자 길가에서 시민들이 붉은 깃발(적기)을 흔들며 환호했다고 하죠. 어제까지 태극기를 흔들던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마음이 변해 북한 만세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탄식했다고 해요. 물론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 어떤 사람들은 살기 위해, 혹은 출세하기 위해 변덕스러운 행동을 했을 수도 있어요. 이렇게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었답니다.
북한군이 마을에 나타났을 때, 그 마을의 좌익 세력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였어요. 그들은 북한군을 환영하고 관공서 점령을 돕기도 했지만 , 가장 앞장선 일은 바로 반공 세력들을 제거하는 작업이었죠. 북한군은 누가 반동분자인지 몰랐기 때문에 누가 지주인지, 경찰인지, 군인 가족인지 등을 알고 있는 그 동네 좌익들의 협조를 받아 그들을 색출하고 체포했습니다. 살생부를 만들고 처형에도 앞장섰어요. 이런 사실을 알아야 6.25 전쟁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답니다.
4. 후퇴하는 북한군, 왜 그렇게 잔인했을까요?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역전되면서 북한군이 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어요. 이때 북한군은 남한에 있던 8만여 명의 쓸만한 인재들을 북한으로 체포해 갔어요. 재헌 국회의원 중 50명이, 2대 국회의원 중 27명이 끌려갔고 , 교수나 청년 등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죽거나 굶어 죽었죠. 이들을 마을에서 체포한 사람들도 바로 그 지역의 좌익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서울 수복 전후, 전국 곳곳의 형무소와 내무서(경찰서)에서는 집단 학살이 일어났어요. 대전 형무소에서는 5~6천 명이, 전주 형무소에서는 1천 명이 학살당했죠.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사람들도 처형당했어요. 이들을 죽인 사람들은 북한군과 부역자, 그리고 그 마을의 좌익들이었습니다. 그전까지 형님 아우 하던 사람들이 상황이 바뀌자 변해서 체포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거예요.
- 6.25 전쟁을 겪은 많은 분들이 “그때가 되니 이웃이 더 무섭더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 평화로울 때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극단적인 정치 상황이 오면 사람들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는 거죠 . 특히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영광군에서는 2만 명 이상, 신안군에서도 수천 명이 죽었다고 해요 . 학살 가담자의 수기에는 보복이 두려워 씨를 말려야 한다며 일가친척까지 모조리 잡아다 죽였다는 끔찍한 내용도 있어요 . 갓난 아기들은 자루에 담아 던져버리기까지 했다니, 얼마나 잔혹했는지 알 수 있죠 .
5. 북한 지역에서는 어떤 비극이 있었을까요? 교회가 사라진 이유가 궁금해요!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북한 지역에서도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어요. 특히 38선 돌파 이후 함흥에서는 엄청난 집단 학살이 있었습니다. 동굴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수류탄을 던지거나 입구를 폭파시켜 질식사시키는 방법으로 죽였다고 해요. 덕산 니켈 광산에서는 6천 구, 반용산 방공호에서는 8천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함흥 지역 전체에서 2만 구가 넘는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함흥 교도소 우물에서는 단무지 담그듯이 묶인 채 죽은 300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그중에는 국군 환영 대회를 했다가 친구에게 잡혀 죽은 사람도 있었어요. 이런 학살은 북한 정권과 그 마을 좌익들이 합세해서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평양 부근과 황해도에서도 많은 학살이 일어났어요. 평양 칠골리에서는 2,500여 구, 승호리에서는 4천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 기독교인이 많았던 황해도 신천, 재령, 안 지역에서는 어마어마한 학살이 있었습니다. 신천 양민학살 사건에서는 3만 5천 구가 발견되었는데 , 북한은 이를 미군 소행으로 조작하지만 , 사실은 국군과 유엔군이 올 것을 두려워한 황해도 노동당이 반동분자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 마을 좌익들이 처형장을 만들어놓고 사람들을 집단 학살한 것입니다.
이렇게 잔혹한 학살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피난 왔어요. 흥남 철수 작전 때 수십만 명이 피난선에 오르려고 했던 것도 북한 지역 학살의 광풍 때문이었죠. 6.25 전쟁을 겪은 월남 가족들이 지금도 공산주의라면 몸서리치는 이유랍니다. 북한 교회가 완전히 사라진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교회가 멸절된 과정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교회는 분열되었고 , 반공 지도자들이 사라지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어요. 조만식 선생이나 김익두 목사 같은 훌륭한 지도자들도 사상에 대한 분별력을 잃고 북한 공산화에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선전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6.25 전쟁을 거치며 북한 교회는 저항하다가 완전히 멸절되었고 , 지금은 김일성, 김정일 동상이 서 있는 곳이 되었죠. 공산주의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보고 혁명의 방해물로 여겨요. 6.25 전쟁을 통해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가 사랑의 대상이 아닌 사탄이며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6. 6.25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 6.25 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 세월이 흘러 6.25 전쟁을 남의 나라 일처럼 잊고 살면 역사는 반드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고 하죠 . 지금 우리 앞에 체제 전쟁이 다시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
공산주의는 결코 교회와 공존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의 본질은 사탄 숭배와 같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과의 싸움은 영적 전쟁이라고 보는 것이 맞아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지, 사탄을 사랑하라고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사상과 영적 상태를 제대로 분별해야 할 때가 온 거예요. 공산주의 사상은 인간 자체를 말살하려 하고 , 사람을 잔혹하게 살해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해요. 적어도 200만 명은 죽여야 혁명이 된다는 생각처럼 말이죠.
교회는 정교분리의 족쇄를 벗고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있어요. 한경직 목사님은 교인들이 공산주의에 대해 혼미한 것을 보고 십자가를 지고 정치 운동을 하자고 했습니다. 이는 좌파나 우파 정치 운동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정치 운동을 하자는 것이었어요. 왜냐하면 자유민주주의 체제만이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죠. 교회가 나서지 않으면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6.25 전쟁의 비극을 잊지 않고 공산주의의 본질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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