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10/02 사랑의교회 주일예배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故 옥한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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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라는 사람

창세기 4장 1~12절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큰 경사가 생겼다. 황량한 벌판에서 하와가 옥동자를 품에 안았다. 인류의 장손이다. 가장 최초로 결혼생활에서 태어난 생명이다. 얼마나 그 감격이 컸던지 그 아이를 부둥켜안고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통해 득남하게 하셨다"라고 하였다. 아담과 같이 생긴 사람을 얻은 것이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자녀를 품에 안은 사람들은 알 것이다. 범죄 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인 것이다. 하와가 가인을 품에 안고 기뻐하며 마음속에 기대를 했던 것 같다. 저도 그렇다고 생각된다. 남편과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던 순간 소망의 말 한마디를 들려주셨다. 이제는 이 세상의 여인의 후손인 하나님의 백성과 마귀의 백성인 후손이 서로 대립하며 싸울 것이다고 하였다. 이 싸움이 계속될 동안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가 나타나서 마귀의 세력을 부수고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인류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아담과 하와가 그것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아들이 하나님이 주신 구원자가 아닐까?"라고 생각하였다. "이 아들이 구원을 주는 구원자가 아닐까?"라고 꿈을 꾸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는 죄악의 씨가 자라나 열매를 맺었다. 그들의 본성이 악해졌는지 보게 되었다. 어린아이에게서부터 볼 수 있는 것이다. 악한 모습이 나타나고 그 본성이 노출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소한 일로 자기 동생을 무자비하게 돌로 쳐죽였다. 아담과 하와의 고통은 오죽했겠는가? 드디어 살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모든 역사의 구석구석마다 의로운 자의 피가 얼룩졌다. 가인의 후세들이 칼을 들고 날뛰는 관장이 되었다. 오늘날 이 세계도 의로운 자가 소리 없이 죽어가는 세상이 되었다. 권력자의 손에 이슬로 사라져가는 이들의 역사가 가인의 손에서 시작된 것이다. 강국은 어디서 나왔는가? 선량한 이들의 핏속에서 건국된 것이다. 배후에는 의로운 자의 피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피의 역사이며 살인자의 역사이다.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신문지상에서도 의인의 피가 뿌려질 것이다. 원통스러운 이야기들이 나타날 것이다. 사람들은 피에 중독되어서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다. 주님 오실 날에 의인에 피에 취한 음녀들이 비틀거리는 무서운 세계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국가에 세계 문명에 기대할 것이 있는가? 주님은 기대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가인의 후예들이 칼을 휘두른 이 나라는 주님의 나라가 아니라고 하셨다. 이 세계 국가에 마음 두지 않고 영원한 나라에 마음을 두 자. 살인자들의 나라가 심판받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와 같은 가인의 살인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배울 점이 있는 것이다. 가인이 제사를 지낸 것이다. 또 하나는 가인의 질투이다. 가인은 아벨과 함께 제사를 지냈다. 인류의 후손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무신론자는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 중에 무신론자가 있다면 돌연변이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유신론자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부정하면 어리석은 자이다. 미련한 인간이다. 인류 시조는 유신론자이다. 어디서 제사를 드렸을까?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다음 광야생활을 하며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아담은 구원받은 사람이다. 일순간에 죄악으로 망쳐놓았지만 하나님을 섬겼다. 에덴동산 길목에서 제단을 쌓았을 것이다. 그곳은 천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불이 항상 타오르는 곳이었을 것이다. 늘 알던 장소였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언제 드렸는가? 안식일을 정해놓고 7일 만에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어떠한 제사였을까? 제물을 놓고 불태웠을 것이다. 제사는 예배이다. 이것만큼 귀한 것이 없다. 인간다운 것이 예배인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자랑하는 의식이 예배이다. 이것만큼 인간에게 어울리는 것이 없다. 예배 없이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이길 이탈한 존재인 것이다. 예배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무시해도 좋다. 차라리 옷을 벌거벗고 나다니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주일에도 상당수가 놀러 가지 못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자세이다. 물론 돈이 없어서 못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없다는 것도 얼마나 다행인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지 않는가? 저는 돈 없는 것도 감사하다. 이렇게 형제가 같이 가서 제사를 지내고 문제가 생겼다. 가인은 농부이기에 추수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냈고 아벨은 목축하는 사람이니 양을 가져다 제사를 지냈다. 보편적으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을 깨끗이 태우는 것이다. 가인은 완전히 화났을 것이다. 아벨의 것은 태워졌는데 자신의 것은 그대로였다. 학자들이 이것을 놓고 다양한 견해를 내놓았다. 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을까? 하나는 가인의 제단에는 피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드시 피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인의 제단에는 피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것이지만 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창세기를 여기저기 살펴보아도 양과 소를 잡아서 제사드리라는 규례가 없기 때문이다. 가인은 잘못될 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제물을 가지고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우선 4절을 보면 순서를 잘 보자. 아벨은 소 새끼와 양 새끼를 바쳤다. 하나님이 먼저 받으신 것은 사람을 먼저 받은 것이다. 물건을 드리는 사람이 중요한 것이다. 제물 때문에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마음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그것이 가증한 제물인가가 판별되는 것이다. 예배하는 사람이지 내 앞에 헌금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심정으로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가가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는 것이다.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벨을 보시고 그 아벨을 보시기에 합당하여 제물을 보시고 양을 받으시는 것이다. 가인은 그렇지 않으셨다. 이 해석이 성경적인 근거가 있다. 요한일서 3장 12절을 보자. 가인같이 하지 말라.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본래가 악한 자에 속하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러 갈 때부터 악한 것이다. 마음이 악한 것이다. 네가 선을 행하지 않은 이상 죄가 네 앞에 엎드려 있다. 죄짓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다스릴지라. 성경에서 죄라는 대상이 적용되는 대상이 가인이었다. 악한 자에 속해있는 사람이 제사드리는 것이다. 악한 생각을 가지고 그대로 지내는 사람인 것이다. 무엇이 중요한가? 회개가 중요한 것이다. 자기 죄를 고백하고 자복해야 하는 것이다. "아바 아버지여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엎드려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을 먼저 불태우고 제물을 불태워야 맞는 것이다. 그는 형식만 차린 것이다.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의 피를 흘렸지만 그들의 죄는 그대로였고 바벨론에게 끌려갔다. 생활의 변화가 없었고 가증한 제사였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자세는 어떠한가? 우리 마음에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가? 11시 정각에 시간 맞춰들어오는 것도 좋아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안 좋아한다. 적어도 10분 전에 들어와 통회하고 자복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제 마음에 모든 죄를 씻어주옵소서."라고 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아벨의 제사가 될 수 있지만 가책 받아도 가슴이 캄캄해 자신의 죄를 느끼지 못하는 예배는 똑같은 의식이지만 받으시지 않으신다. 그 안에 성령이 찾아가셔서 어두운 부분을 밝혀주셔서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부분을 노출되게 하신다. 그 성령을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셔야 한다. 저도 강단에 오를 때 가책을 받는다. 목사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순간순간 가슴속에 더러움을 씻지 않으면 성경을 들고 얘기하지 못한다. 죄 없는 사람 있는가? 가책 안 받는 사람이 있는가? 가인의 예배를 드리지 말자. 가인의 얘기가 있다. 히브리서 11장 4 절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가인은 믿음 없이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곡식을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받으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주의 전에 나오는 사람마다 전부 믿음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니라.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가? 보혈의 피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고백하는가? 지난주에 저지른 범죄도 보혈의 샘 때문에 이 순간 용서받고 새사람이 되는 것을 믿는가? 추하고 더럽지만 오늘 이 시간 마음을 토하고 예배하며 공포를 없애주시고 새롭게 힘이 되어 주심을 믿으시는가? 이 연약한 것을 돌보아 주심을 믿는가? 거룩한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임을 믿는가? 이 믿음을 가지고 예배드릴 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없이는 가인의 예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 믿으시는 분은 모를 수 있다. 2~3년이 지난 뒤에도 그렇다면 두려움이 앞선다. 가인 같은 자가 없기를 바란다. 어린아이가 되자. 회사의 중역인가? 사장인가? 독보적인가? 좋다. 신자는 남의 지도자가 되면 좋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와서는 다 잊어야 한다.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주여 믿습니다. 주님이 머리털까지도 붙드시지 아니하면 저는 죽습니다. 병원에서만 찾지 말고 형통할 때 믿음을 갖자. 하나님이 생명이심을 믿자. 예수 그분 만이 구원자라는 믿음을 갖자. 나와서 어린아이같이 예배드려야 한다. 의식만 드리는 자는 비극이다. 어떤 비극인가? 제사드리고 문제가 터졌다. 얼마나 분하던지 안색이 변했다. 하나님도 물으셨다. 왜 그렇게 안색이 변하느냐? 우리도 그렇다. 예배를 보실 때 진지하게 드리지 아니하면 예배드린 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우리 형제분들 중에도 부인 때문에 따라온 분이 계신다. 그날따라 기분 나쁜 설교로 들렸다. 회사에서 시달리고 그랬는데 죄가 어떻고.. 문제는 그때부터 터진다. 인상이 험악해진다. 우리 주변에도 비일비재한 일이다. 제사를 받지 않은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분한 것이다. 왜 차별하느냐 이거다. 왜 장자에 것을 먼저 받지 않고 불공평하냐는 것이다. 요즘도 마찬가지다. 눈물로 회개를 해도 내 마음에 아픈 소리를 들어도 격려를 듣고 희망의 소리를 들어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위로와 격려를 주시는 것이 설교이다. 그 내용이 살로 오려낼 것 같아도 믿음으로 바로 드리는 예배라면 상처를 꿰매주시며 기쁨이 솟는 것이다. 이것이 예배이다.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시지 않는다. 믿음을 가지자. 정신 나간 의사가 아닌 이상 그대로 내보내는 의사는 없다. 우리에게도 회개하게 하시지만 위로해 주신다. 진실로 예배드렸다면 얼굴이 밝아지며 그 기쁨을 맛보아 찬송이 나온다. 가인처럼 되는 것이 하나님의 책임인가? 내가 제사를 잘 못 드렸기 때문이다. 저는 사람의 교회 성도들이 가인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항상 하나님 앞에 나오실 때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으로 나오라. 나 같은 것을 받으신다고 믿고 나오라. 그러면 분노로 가득 차지 않는다. 필요한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돌아가실 때 얼굴이 밝아지고 기쁨이 충만해지기를 바란다. 천사의 모습을 가지고 돌아가시길 바란다. 용기와 힘과 능력을 주신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제사드리면 우리에게도 아벨의 축복을 주신다. 부디 가인처럼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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