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2 수영로교회 주일예배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이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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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수 심판

창세기 7장 1~12절

 

성경에 제일 중요한 주제가 심판과 구원이다. 죄를 심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에 대한 심판을 완전하게 하신다.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이 죄에 대한 불완전한 심판이다. 국가적인 법 시스템, 직장에 법 같은 룰과 같은 것들이다. 공정하지 못하다. 인간에 한계이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불공정성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심판은 그렇지 않으며 악인과 의인을 구분하신다. 악을 징벌하신다. 창세기를 보면 인간의 실패를 볼 수 있다. 인간은 좋은 세상을 꿈꾼다. 겉으로는 긍정인 것 같지만 비관적이다. 죄인은 세상을 살 능력이 없는 것이다. 낙원이 없는 것이다. 어느 나라를 보면 복지가 넘쳐난다. 그렇지만 타락했기 때문에 낙원이 아니다. 먹는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성적인 타락, 자살의 상승 같은 문제가 있다. 인간의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이다. 하나님의 마지막 선택이다. 홍수 심판을 볼 수 있다. 4절을 보자. 홍수 심판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11~12절에 있다. 여기 보면 땅에서도 물이 터졌다. 하늘에 창문이 열리는 것이다. 사실은 노아 홍수 이전에는 오늘날과 같이 자외선과 같은 것이 차단되었었다. 사계절이 없었다. 너무 좋은 환경이었다. 노아 홍수 이후에 급격히 수명이 줄었다. 얼마나 내렸을까? 40일 동안 부어졌다. 이런 하나님의 명령 앞에 노아가 피하였다. 1, 7, 13절을 보자.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이 노아 가정 전체의 구원이다. 노아의 역할이 컸다. 죄악이 꽉 찬 시대에서 노아의 가정이 구원받는 것이다. 1절을 다시 보자. 노아가 그 시대에서 오염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별히 그 자녀들과 며느리까지 방주에 들어갔다. 창세기 6장 2절을 보자. 사회에 가장 극한 타락이 가정이 무너지는 것이다. 성적인 타락이다. 어느 시대나 타락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성적인 타락이다. 로마의 역사에 한가운데에서도 성적인 문제가 대두되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을 보자. 가정 전체의 구원이다. 사랑하는 가족 중에 누군가 구원을 놓친다면 그것처럼 기가 막힌 일이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도 혼탁한 시대이며 오염되었다. 자녀들을 믿음으로 지키는 것도 어렵다. 로마서 12장 2절을 보자. 이 시대의 정신과 문화의 특성들 안에 쾌락과 물질 중심적인 것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자녀에 결혼을 앞둔 부모들이 걱정이 많다. 좋은 신랑감이 없다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자매들이 많고 형제들이 적다. 확실히 자매들이 천국에도 많을 것이다. 결혼도 타협할 가능성이 있다. 불신 결혼은 위험하다. 기준을 느슨하게 하면 걷잡을 수 없는 것이다. 신앙의 계승이 중요하다. 그 자녀들의 믿음의 세대가 끊기기 때문이다. 오늘 이 세대의 오염 수치가 강하다.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않으면 오염된다. 플라스틱 제품도 넘쳐난다. 그 플라스틱이 바다로 흘러가 우리가 먹는 것이다. 이런 것은 육체적인 것이다. 문화 속에 숨어있는 독소도 있다. 문화에 관한 책들을 보면 노골적이다. 문화를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폭력성이 들어있으며 선정성과 음란성이 도배되어 있다. 단단히 무장하지 않으면 세상에 빼앗긴다. 호적상으로는 자녀이지만 이미 세상에 빼앗긴 자녀들이 많다. 세상의 자녀들이다. 가치관과 모든 것이 세상적이다. 부모의 신앙이 굉장히 중요하다. 돈이 중요하다면 자녀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는 어렵다. 아이들은 신앙이 없어도 부모의 신앙을 분별하다. 눈 뜨자마자 공부 못하면 돈 못 번다고 야단친다. 노아의 가정이 구원을 얻은 것이다. 하나님은 이삭의 하나님이시며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내 자녀에게도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미간에 붙이고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여야 한다. 한국교회가 위기인 것이 자녀의 신앙 계승에 실패한 것이다. 부모가 가정에서 신앙이 일어나 믿게 해야 한다. 부모가 교회 일에 바빠서 신앙 계승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신앙 계승이 먼저이다. 5절을 보자. 9절도 보자. 16절도 보자. 노아의 순종이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노아의 순종에 왜 주목하는가? 그 당시는 비가 오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일기예보가 없었다. 상황적으로나 조건적으로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전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것이다. 이것이 귀하다는 것이다. 말씀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를 견고히 하는 것이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노아에게 중요한 것이 순종의 타이밍이다. 11절을 보자. 시간들을 명시한 것은 정확한 시간대에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불규칙하게 임의로 된 것이 아니라 명하신 대로 시행되는 것이다. 순종을 하되 타이밍인 것이다. 그 역사에 시점이 지나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 순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13절을 다시 보자. 구약에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날이란 표현을 많이 썼다. 카이로스이다. 출애굽기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던 전 날에도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야 했다. 순종의 타이밍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도 중요한 것이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반응하는 순종이 필요한 것이다. 방주 짓는 것을 상상해보라. 남자라고 해봐야 4명이었을 것이다. 필요한 나무와 기술적인 것도 필요할 것이다. 짓는 사람들이 질 물들을 던졌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 들었던 말씀을 들려주었을 것이다. 방주로 들어가면 산다는 것을 얘기했을 것이다.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방주에 들어가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방주로 들어가면 사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이 임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일에 말씀 듣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믿음이 중요하다. 전도해보면 알 수 있다. "사업하느라 정신없어요.", "죽기 한 며칠 전에 믿고 가면 안 됩니까?"라고 얘기한다. 미루는 것이다. 마귀가 하는 가장 놀라운 전법이 미루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짐승들이 줄을 지어 있는 것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교회 봉사해도 구원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문이 닫히면 모든 게 끝나는 것이다.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에 문이 닫힌 순간부터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 어디에 속하느냐가 우리의 삶이 결정된다.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기로 작정해야 한다. 22~23절을 보자.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다. 슬픈 스토리다. 죄로 인하여 인류가 다 죽은 것이다. 그런데 그 긴 한숨과 함께 다른 심장에 소리가 들린다. 남은 자들은 노아의 가정뿐이다. 아무리 심판이 쏟아져도 남겨두시는 것이다. 뿌리가 생명인데 그것을 남겨두셔서 다시 번성케 하신다. 심판 안에서 남은 자들을 통해 생명을 창조하시는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홍수 속에서도 구원 안에 있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시대는 마지막 시대이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초림 예수를 기다린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종말이 아득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미 오셨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이다. 임박한 그리스도에 재림에 긴장감을 가져야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이란 기존의 것들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무지개를 통해 심판하지 않으심도 약속하신다. 물로는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불의 심판이 남은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과 비슷하다. 소돔이라는 것이 동성애이다. 그 시대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타락한 상징성의 죄를 노골적으로 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동성애가 활개를 치고 있다. 70만이 전국에서 모여 참여하는 것이다. 마지막 시대인 것이다. 심판은 모호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그 어떤 상황과 조건, 지성을 넘어선다. 죄를 심판하시며 인류의 마지막을 클로즈업하는 것이다. 우리도 해야 할 것이 신앙을 확인해야 한다. 불교는 끝도 없이 돌고 도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작과 끝이 분명하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을 보자. 은혜를 언제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언제나 구원의 기회가 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종말도 종말이지만 개인의 종말은 언제나 찾아온다. 요즘은 장례식도 많다. 모르는 것이다. 암이 많다. 우리가 언제나 기회가 넘칠 것을 생각하면 안 된다. 제자훈련도 기회가 있으면 받아야 한다. 은혜받을 때 받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주인이 오고 싶을 때 오는 것이다. 준비해야 한다. 시간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가 컨트롤하지 못한다. 시간은 1분 1초도 움직이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움직이실 수 있다. 시간 속에 관여하셔서 시간을 완성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 시간 속에서 그 뜻에 복종해야 한다. 만삭이 되면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때가 되면 나오는 것이다. 역사의 그 순간이 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암울했을 때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서 그 역사를 걷어 내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불로 온 세상을 끝내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앙을 확인해야 한다.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는 것에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피 묻은 십자가에 복음을 이해하고 믿고 복종해야 한다. 오늘도 세례식을 하고 간증이 넘쳤다. 1년 안에도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났다. 주님이 오실 때 내 신앙으로 과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가? 저도 목회를 하면서 관심 있는 것이 행사와 집회가 아니라 한 영혼에 집중하여 회심하여 구원을 얻었는지이다. 교인이 많아서 감동되지는 않는다. 교인들이 복음을 이해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져 부끄럽지 않게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천국 갔는데 교인들이 안 보이면 안 되는 것이다. 전도사였을 때 정말 열심히 동네 꼬마들을 모았다. 껌과 사탕을 나눠주고 곳곳에 깃대를 모아 왔다. 갑자기 깨달음이 왔는데 "너 이 아이들의 영혼 구원에 관심 있는 것이냐?"라고 물으셨다. 제자훈련도 하고 노력했지만 부족하였다. 저는 우리 교인들이 복음을 이해하고 구원을 확신하여 제자가 되길 바란다. 노아는 안타까웠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죽어가는 영혼이 많다. 오늘도 주님이 오시지 않는 것은 주변의 영혼들이 구원받기를 소망하시기 때문이다. 전도라는 것은 누구에게 교회 나오라고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하여 얘기하는 것이다. 달랑 짜장면 집 갔다 와서도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최근에 칼국수집에 다녀왔는데 기가 막히더라. 영생을 깨달았는데 입을 다문다면 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날은 꼭 올 것이다. 준비하여서 구원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하자. 가정, 이웃, 친척들에게도 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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