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5 수영로교회 주일예배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이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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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과 은혜

창세기 6장 9~22절

 

창세기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창조주 하나님 안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있다. 그저 바라보시기만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만물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섭리하시는 것이다. 섭리라는 말은 개입하고 관여하시고 통치하신다는 의미이다. 요셉에 이야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의존하여 돌아가는 것이다. 죄에 대한 심판도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공의의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창조주이시기에 심판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창세기 6~9장은 노아의 홍수가 나온다. 이것이 시사하는 메시지는 강력하다. 노아의 이야기는 어린아이부터 자주 듣게 될 정도로 많이 안다. 심판의 이야기이지만 구원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심판보다는 구원의 목적이 있다. 죄에 대해 매우 진노하신다. 하나님의 공의 때문이다. 아담도 쫓아내셨다. 소돔과 고모라, 바벨탑의 심판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도 심판이다. 죄악의 심각성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창세기 6장 5절을 보자. 죄악이 세상에 가득한 것이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것이다. 계획적이며 의도적이며 지속적이며 회개를 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대로 사는 것이 동물적으로 사는 것이다. 본성에 지배를 받으면 동물보다 못한 것이다. 무수한 죄에 대한 심판을 하신다. 심판의 메시지는 죄에 대해 지나치시지 않음을 알려주신다. 성경은 죄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다. 갈보리 언덕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이 그것을 얘기하신다. 지금도 크고 작은 심판은 계속되고 있다. 국가적으로나 시대적으로나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은 그냥 심판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죄를 지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11~13절을 보자. 자주 반복되는 것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부패와 포악함이 가득한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상황을 개선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온 것이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았다. 하나님의 본마음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쏟아부은 것이 십자가이지만 죄가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보여주었다. 가장 유명한 성경구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이다.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이 다 찢어져나가도 이것만 알아도 복음이 있는 것이다. 17절도 보자. 하나님의 본마음이 나타나 있다.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기에 계속 미루시는 것이다. 그러나 심판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땅에 생명이 있는 것이 다 죽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모든 것들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인류 전체를 없애 버리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를 테바라고 한다. 구원의 상징이다. 방주의 설계도를 직접 주셨다. 방주는 3층으로 되어 있으며 동물들과 같이 거하게 되어 있다. 오늘날 같이 특수장비가 없이 어떻게 지었는가? 그리고 동물들을 어떻게 끌어들였는가? 성령이 얘기하지 않는 것이기에 알 수 없지만 우리보다 뛰어난 사람들이다. 방주 안에 생존문제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지만 하나님이 지원하셨던 것이다. 18절을 보자. 노아와 언약을 맺으셨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주신 언약도 마찬가지였다. 노아는 대표적인 케이스이기에 언약을 맺는 것이다. 너로 인하여 또 다른 새로운 인류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인간을 완전히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노아를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 안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실천의지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은 실패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다. 구약과 신약은 약속인 것이다. 누구의 약속인가? 하나님의 약속이다. 약속이라 하면 사람과의 약속이 떠오르는데 돈 떼인 생각과 사기가 생각난다. 약속은 깨진다라는 가상적인 생각이 난다. 나에 의해서 깨어지거나 상황 때문에 한계 때문에 깨어지며 악한 것 때문에 깨어진다. 한 번도 약속이 깨진 적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약속은 깨지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얘기하시는 약속은 전혀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실수가 없으며 반드시 지켜내시는 것이다. 이것을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천하가 배신하고 사라져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믿는 것이다. 노아에게 주신 약속이다. 내가 너의 가족을 지키리라. 창세기 3장 15절을 보면 하나님의 최초 약속이 나온다. 노아와 세 아들 며느리들과 모든 생물 암수 한쌍씩 들어갔다. 그 안에는 생명의 번식력이 숨어있는 것이다. 홍수가 끝난 뒤 생명의 번식을 통해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허언증이 있는 것이 아니며 신실하신 것이다. 어떻게 노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었는가? 노아는 의인이며 당대의 완전한 자이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인간은 다 죄인이며 의인이 없다. 의인이라는 말은 노아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게 여기신 것이다. 믿음을 보고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다. 은혜라는 단어는 아무런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이다.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다. 우리의 행위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쫓을 수 없다. 개울이 거센데 아이가 아빠 손을 잡으며 빠지는 것이지만 아빠가 꽉 잡으면 사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은혜이다. 저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실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있는 것이다. 노아는 순종을 통하여 확인되었다. 하나님의 방주를 짓는 순종이다. 노아의 홍수가 있기 전에는 태풍이나 비가 온 적이 없는 완벽한 환경이었다. 하나님이 방주를 지으라는 말씀에 의존하여 짓는 것이다. 말씀에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도 없지만 마치 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미친 짓처럼 보이는 것이다. 믿음은 비장한 것이다. 마른하늘에 빗방울 하나 없는데 방주를 짓는 것이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욕하고 손가락 질 했을 것이다. 왕따에 원조가 되었다. 120년간 지었다. 이 정도면 인간의 뚝심으로 가능한가? 배짱으로도 가능한가? 조롱하는 정도는 참을 수도 있을 것이다. 노아가 이런 환경 속에서도 버텨낸 것이 믿음이다. 진짜 믿음은 끝까지 가는 것이다. 힘들다고 도중에 하차한다면 진짜가 아니다. 진짜 믿음이 끝까지 가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 믿음이 견고 해지는 것이다. 떠난다면 가짜 믿음인 것이다. 직장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어느 시대마다 깨어있는 사람들은 외로웠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신약시대 바울은 잘 나가는 바리새파에서 승승장구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기 동족으로부터 심각하게 왕따를 당했다. 마틴 루터도 마찬가지다. 그 시대가 마틴 루터를 죽이려고 하였다. 믿음의 순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계속 외로워질 것이다. 세상에 유혹을 따른다면 괜찮아질 것이다. 이 세상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하면 외로워질 것이다. 세상에 평가와 인정에 목이 말라있는가? 진짜로 두려워할 것은 믿음이 뒤떨어질까 봐 두려워해야 한다. 아파트에 가면 전자발찌를 차고 있는 사람이 돌아다니며 밑에 층에는 칼싸움하고 있다. 무법천지다. 다니엘을 보면 왕실에서 탁월함이 드러나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죽이려고 득달하는 것이다. 바벨론의 문화가 다니엘을 끌어당기기 위해 휘감는 것이다. 세상은 늘 편 가르기를 한다. 우리 편이 아니면 나쁜 인간이 된다. 다니엘은 거센 회유에도 저항하였다. 마침내 사자굴에 던져졌다. 오늘 우리는 신 바벨론에 살고 있다. 신자는 소수이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면 많이 힘들어진다. 매우 불편하다. 그것이 정상이다. 감각이 무너져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 심판에 때에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마태복음 24장 37~39절에 나와있다. 멸하시기 전까지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그 자체가 전부가 될 때에는 문제인 것이다. 그것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때 문제인 것이다. 인간이 존재 가치를 잃는 것이 타락이다. 궁극적인 목적을 잃어버린 것이 탈선이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다. 이제 바쁘면 바쁠수록 교통이 발달할수록 더 바빠질 것이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12분짜리가 나올 예정이다. 그것이 좋은 것 같지만 바빠지는 것이다. 바쁘게 쫓긴다면 잘못 가고 있는 것이다. 바쁘고 쫓겨 지쳐서 영적인 잠을 자게 되는 것이다. 주일도 교회에서 주무시는 것은 괜찮지만 늘 주무신다면 영적으로 잠을 잘 가능성이 많다. 스스로를 확인해야 한다. 영적인 병이 들게 되는 것이다. 영적으로 죽게 되는 것이다. 육체와 마찬가지다. 롯도 마찬가지였다. 현실에 이익을 좇다가 목적을 잃었다. 매몰되어 타락하였다. 소돔과 고모라로 향하는 영적인 무감각인 것이다. 이민도 마찬가지다. 환경을 쫓아온 사람들은 전부 힘든 것이다. 좀 더 살기 좋은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면 어딜 가도 만족이 없어 방황하는 것이다. 어디 사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곳에 살게 하신 목적과 이유를 아는 것이다. 선교사들은 만족도가 너무 높다. 거기서 사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목적이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오지에서도 행복한 것이다. 시드니 같은 아름다운 곳에 사는 대도 푸른 것을 보고도 지겨운 푸른색이라고 표현한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하면 끝나는 것이다. 수단이 목적이 될 때 저주와 같은 인생이 되는 것이다. 영적으로 태만해지면 증상이 나타난다. 위기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그 원인도 모르는 것이다. 돈 벌기 위해 살다 보면 다 잃는 것이다. 세상과 보조를 맞추면 그 세상이 가만히 두지 않는다. 내가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악이 만연하기에 우리도 모르게 세상과 똑같아져 버린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 안에서 기름을 정비하지 않은 처녀와 같이 되는 것이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예외가 없는 것이다. 심판에 때와 시각은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미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방주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는 시청각 교재이다. 구원을 알려야 하는 것이다. 깨어있어야 한다. 세상에 방식에 따라 정신없이 살면 안 된다. 우리는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다. 바울 사도가 얘기했던 로마서 11장 13~14절과 같이 살아야 한다. 어거스틴이 회심할 때 읽었던 구절이기도 하다. 지금은 죄악이 들끓고 범람하는 마지막 때이다. 금요일에도 철야를 했지만 상징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외로운 길이며 쉽지 않은 길이지만 깨어있는 교회를 찾고 계신다. 세속화되어 가는 이 시대 속에 영적으로 깨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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