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13 수영로교회 금요철야예배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이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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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 좋다는 것은

빌립보서 4장 4절

 

인간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본능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도록 만드신 것이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은 원리이다. 행복을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기쁨인 것이다. 기쁨을 누리고 있다면 행복한 것이다. 모든 것을 가졌어도 이것이 없다면 불행한 것이다. 전도서 2장 24~25절을 보자. 전부 먹고 마시고 하는 것이다. 솔로몬은 안 해본 것이 없는 사람이다. 저도 호주에 있어 봤는데 소고기를 좋아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안 먹는 것이 없다. 중국도 안 먹는 것이 없다. 그러나 세상에 들어가면 우울함이 있다. 세상의 만족은 허접한 것이다. 목이 마른 것이다. 너무 빨리 만족하고 끝낸다. 인류는 어떻게 해야 기쁨을 얻는지 갈길을 잃었다. 우울한 사회일수록 오락이 난무한다. 그리고 곧 쾌락으로 이어진다. 환락으로도 이어진다. 점점 강도가 높아져간다. 스포츠는 광기에 가깝다. 도박으로도 이어진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게임과 도박이 연결성을 가진다. 즐기기 위한 도구와 장비가 난무한다. 호주와 미국은 캠핑카가 대세다. 우리나라도 슬슬 따라가는 중이다. 그리고 술 문화와 와인문화가 다양하다. 서양은 더 역사가 깊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위한 술을 만든다. 창고에 저장하다가 기념으로 꺼내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엄청나다. 왜냐하면 사회가 스트레스가 많고 우울하기 때문이다. 기쁨을 얻지 못하면 환각적인 것을 따라다니며 절망이 채워진다. 우울해지고 어두워진다. 어떤 추구도 만족이 없다. 냉소적이고 칙칙하고 시니컬하다. 기쁨을 얻기 위해 찾아다닌다. 어떤 죄는 순간적으로 기쁨이 찾아오기도 한다. 유명하고 돈도 많지만 곧 도박장을 찾는다. 돈과 시간이 있으면 찾는 것이다. 마치 불나비가 불을 찾아다니다가 타 죽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존재의 밑바닥으로부터 갈망하는 것을 찾지 못하였기에 더 타들어간다. 기쁨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인생의 성공을 하면 어느 정도 기쁨을 누릴 수 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류현진이 다저스에서 연봉을 많이 받아서 똑같이 되고 싶어 하지만 웬만한 사람들은 마이너 그룹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배트를 몇 번 휘둘리다가 끝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 얻는다 해도 잠시에 기쁨이다. 쾌락이다. 영원하지 않고 지속적이지 않다. 세상에도 축제가 난무한다. 개발을 하고 먹거리와 시장을 만든다. 강에 고기를 풀어놓고 잡기도 한다. 결국 고기를 못 잡고 바가지를 쓴다. 널려있는 것에 기쁨을 추구하지만 짝퉁이다. 그 모든 것들은 계속 돈을 써야 한다. 기쁨을 주지 못하고 돈은 나가며 중독이 찾아온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만족을 얻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돈 벌기도 쉽지 않다. 그 즐거움이 찾아올 것처럼 보이지만 계속 목이 마르다. 기쁨이라는 것은 원초적인 것이다. 바울을 보자.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한다. 명령조이다. 감옥 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라지지 않는 기쁨이다. 왜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창조하셨다. 기쁨을 누리도록 창조하셨다. 절대로 우울하게 창조되지 않았다. 즐거움을 추구하도록 창조하셨다. 그래서 반드시 기뻐해야 한다.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 거짓된 기쁨을 추구하도록 갈 가능성이 많다. 오늘 세상에 불행은 거짓된 기쁨을 쫓는 것이다. 왜 그런가? 참 기쁨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청춘을 쏟아붓는다.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인생을 망치는 것이다. 불나비처럼 불을 쫓는다. 그러니 어떤 형태로든 기쁨을 추구하지만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이 비밀을 오늘 쥐고 가자. 천국은 기쁨의 나라이다.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우울한 곳이 아니다. 기독교에 분위기도 밝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면 밝아진다. 그림도 이상하게 그린 사람이 있는데 무섭기도 하다. 마귀 닮은 추상화도 있다. 돈 주고 절대 사지 말자. 예수 믿는 사람은 밝다. 십자가가 기독교에 상징이지만 십자가는 부활도 완성되는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추모하는 종교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것이다. 부활은 기독교에 심장이다. 죽음을 절대 소망으로 바꾼 것이다. 어둠을 겆어낸다. 영생의 복음은 부활로 주어진다. 절망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을 이겨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우울함 정도로 사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사는 것이다. 어두움이 깃들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복음을 고백한다면 어두움이 깃들 수 없다. 고통과 신음이 있지만 믿음으로 고백하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이다. 소극적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기뻐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뻐하는 것이 멀어 보인다. 청교도 신앙 안에 좋은 보석 같은 유산이 있지만 아쉬운 것도 있다. 금욕적인 삶을 추구한 면이 있다. 적극적으로 누리기보다는 억제하려다 보니 어두운 면이 있다. 옆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도 몇십 년 전에는 금지된 것이었다. 하나님에게 인사하기 전에 옆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이 경망스러운 것이었다. 경건과 거룩으로 엄숙했지만 어두웠다. 예배 밖에서는 친하다가도 안에서는 조용하게 들어왔으며 여성들은 검정 치마를 입고 들어왔다. 경건과 거룩을 오해한 것이다. 율법적인 분위기가 많았다. 하지 말라는 것이 많았다. 아이도 대학 가면 교회를 안 나갔다. 너무 옭아매고 어두웠다. 고행 주위와 금욕주의가 성행한 때가 있었다. 수도원도 크게 웃는 것도 못했다. 표정이 없었다. 하나님이 한 방 내리칠 분으로 오해하였다. 예배 마치고 나갈 때 오히려 환해졌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기쁨의 하나님이시다. 시편을 보라. 기쁨으로 가득 차 계신다. 시편 16편 11절을 보자. 시편 90편 14절을 보자. 기쁨에 관련된 성경구절은 너무 많다. 존 파이퍼 같은 목사도 기독교 희락 주의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밖에 없다. 기쁨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어둡고 화가 나있으시다면 누가 다가갈 수 있겠는가! 우상들은 위압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크게 만들었다. 너 함부로 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우상이 작다면 흉측하게 만들었다. 겁과 두려움을 주었다. 많은 의무와 규칙을 만들어 억지로 따르도록 하였다. 예수님의 시대에서도 율법자들이 비슷했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기쁨이 떨어진 것이다. 잔치 집에는 반드시 포도주가 있어야 하였다. 의무감만 남은 것이다. 자발성이 없이 버텨내는 신앙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포도주를 회복시켜 주시었다. 기쁨이 회복되는 것이다. 기쁨은 우리의 힘으로 얻을 수 없다. 하나님에게서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세상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스도만이 참된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책상 위에서 쓰지 않았으며 감옥에서 썼다. 자신이 누리면서 쓴 것이다. 성도들에게 나와 같이 누리자는 것이다. 바울에 삶은 누리는 것이다. 장가도 가지 않고 나이도 들었으며 기쁨이 없지만 가식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옥 안에서 환경이 좋겠는가? 어떤 상황에서도 그 상황을 뛰어넘는 것이다.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이다. 무조건 기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희락이 기쁨이다. 성령의 열매라는 것은 주도적으로 맺는다는 것이다. 성령이 맺으시는 것이다.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이라는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보자. 성령을 따라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육체에 욕심을 맺지 않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성령을 따라 행하는데 육체를 거스르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19~20절을 보자. 이 모든 육체의 일들이 만족을 위하여 추구하는 삶은 성령을 거스르는 일인 것이다. 오늘 이 세상의 모든 모습이다. 우리도 영적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희락은 사라진다. 답은 갈라디아서 5장 24절이다.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우리가 왜 기쁨을 놓치는가? 자기 육체의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 때문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으며 자기중심적이다. 자아 중심적 삶이다.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 자아 중심적으로 살아간다. 기쁨은 곧 사라진다. 기도를 하는데도 기쁨이 없다면 점검해보아야 한다. 기도하는데 우울한가? 오랫동안 기도 생활하는데도 우울하다면 이상한 것이지 않겠는가? 하나님께 열심히 나아가는데 어떻게 어두울 수 있는가? 그분은 전능자이시며 아버지이신데 내 모든 것을 맡겼는데도 그렇다면 자기중심적 기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누구 죽는 꼴 보시려고 그러세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못해서 일 수 있다. 내 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내 문제만이 관심이다. 그렇다면 기쁨이 없을 수 있다. 주기도문을 보자. 양식을 보아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되어있다. 오늘도 먹을 것이 없어서 죽은 탈북자 가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기적인 기도가 아니다. '나'라는 세계에 갇히면 기쁨이 없다. 내 만족만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채워도 밑 빠진 독이다. 채워지지 않는다. 왜 채워지지 않는가? 내가 추구하는 것을 채워도 만족이 없는 이유는 창조하실 때 그렇게 만드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만족은 이웃을 위하여 헌신하여 드릴 때 기쁨이 오도록 설계된 것이다. 기름을 넣어야 자동차가 가는데 물을 넣으면 가지 않는 것이다. 사용설명서대로 써야 돌아가는 것이다. 내 만족을 추구하면 만족과 즐거움이 오지 않는 것이다. 기도가 내 기도만 한다면 기쁨이 없다. 초기에는 그럴 수 있다. 유치반이니 그럴 수 있지만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가족들끼리도 기쁨이 없다면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부부간에도 이기심이 찾아오면 기쁨이 사라진다. 철저하게 상대를 위하여 헌신해야 한다. 아내와 남편이 서로를 위하여야 한다.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은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틀림없다. 내 마음대로 안되니 화를 내는 것이다. 기쁨이 사라지는 것이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을 유의하자. "주 안에서 기뻐하라." 여기에 비밀이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못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바깥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확실한 결론이다. 기쁨의 근원이다. 그리스도이다. 출처를 알아야 한다. 주 안에서 살아갈 때 찾아온다. 요한복음 15장을 보면 포도나무 비유가 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탕자에 비유에서도 아버지에게 돌아왔을 때 잔치집에 잔치가 일어났다. 풍악을 울리고 기쁨에 겨운 것이다. 그 축제에서 가장 기뻐한 사람은 아버지이다. 그 돌아온 탕자로 두 번째로 기뻐할 사람은 맏아들이다. 자신의 동생이 돌아왔기에 기뻐해야 하는데 기뻐하지 않는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는 알아보지 못한다. 자기의 몫을 챙기기에 바쁘다. 아버지의 기쁨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마음 안으로 들어가려면 아버지와 교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의 핵심중 하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다. 창세기를 설교하면서 준비하다가 타락한 세상을 쓸어버리시는 하나님의 아픔을 느꼈다. 기계적으로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셨다. 굉장히 인격적인 하나님이셨다.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돌아온 기쁨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 길이 없으며 잔인하기까지 하다. 전적으로 자신만 생각한다. 집 안에서도 부모 마음을 아는 자식이 있고 전적으로 자신만 생각하고 아버지의 재산만 노리는 자식도 있다. 욕심을 가진 동안은 누구와도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안 되는 것이다. 왜 친구인가? 관계에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맏아들이 기쁨이 없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를 말하는 것이다. 규칙을 지키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관계는 없고 자기 공로에 빠져있다. 자기중심적으로 가면 불평과 원망밖에는 없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존재한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을 다시 보자. 정욕과 탐심을 못 박아야 한다. 이것을 못하면 기쁨이 사라진다. 육체와 함께 탐심을 못 박겠다고 선언하자.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주님이 주신 것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이 기뻐하게 하는 것인지 잘 모른다. 발을 동동 구른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지만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붙든다. 구별해야 한다. 관점이 중요하다. 주님이 주신 것으로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 좋은 생각들이다. 빌립보서 4장 8절을 보자. 좋은 생각들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 중 좋은 것들이 많이 있다. 무엇을 주셨는가? 구원이다. 구원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구원이라는 단어에는 항상 구원의 기쁨이 따라다닌다. 구원의 기쁨이 와야 한다. 구원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한테는 기쁨이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이것보다 더 큰 선물이 없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구원을 받았다면 기쁨을 누려야 한다. 이것을 잃으면 구원파가 좋아한다.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 몰려와야 한다. 십자가로 주신 구원이 광대하고 부요하고 놀라운 것인지 이해하면 그 기쁨은 그 어떤 것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누렸다. 바울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도 누리게 할 때 더 증폭됨을 알았다. 그래서 거기에 생명을 걸은 것이다. 자신의 삶을 복음을 위해 내어 놓았다. 바울이 발견한 것이다. 감옥에서도 매를 맞아도 장가가지 못하여도 좋다는 것이다. 바울 때문에 빛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얘기를 들어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았다. 복음이 누군가를 통해 전해지기만 한다면 기뻐하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기쁨이 혹시 자주 없어진다면 모조품일지도 모른다. 진짜 기쁨을 누리면 쉽게 빼앗기지 않는다. 가장 인생을 무겁게 만들고 우울하게 하는 것이 '죄'이다. 우울증도 자기 연민에 빠져있는 '죄'에 문제가 있다. 죄를 짓는 순간 급격하게 기쁨이 사라진다. '죄'는 원흉인 것이다. 관계가 꼬이면 기쁨도 사라진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이것이 사라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중 하나가 사죄의 기쁨이다. 염려와 불안이 사라진다.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 안에서 살면 세상 사람 눈치를 보지 않는다. 그냥 좋은 것이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남자들이 좋아한다. 그런데 비슷한 사람이 나온다. 그런데도 좋아한다. 주변에 아무 눈치 보지 않고 사는 것을 동경한다. 떠나고 싶은 욕구이다. 가정을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른다. 각자의 삶이 있는 것이다. 도시의 삶은 늘 눈치를 보며 산다. 남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 기쁨을 빼앗아 간다. 허세와 위선이 난무한다. 보여주는 것에 급급하다. 가면을 다 벗어야 한다. 오늘 우리 안에서 주님이 살아있을 때 자유할 수 있는 것이다. 외부에 압력보다 내적인 힘이 강하여야 한다. 영적으로 성숙해 갈수록 기쁨은 커진다. 믿음이 자라난다는 것은 결국 기쁨이 커져가는 것이다. 어떤 외부의 압력과 시선과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이 더 크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기쁨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 빌립보서 4장 13절을 보자. 어떤 형편에서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능력은 주 안에 있다는 것이다. 느헤미야 8장 10절을 보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살아갈 때 기대할 때 기쁨이 있다. 신앙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이 세상 문화에 편승하지 않고 주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며 이웃을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에 끝까지 완주해야 한다. 끝까지 완주하는 사람은 주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다. 누구보다도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자. 기쁨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하나님도 그렇게 살아가길 바라신다.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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