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20 수영로교회 금요철야예배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이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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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승리의 비결

시편 63편 1~11절

 

이 본문은 굉장히 유명한 다윗의 시이다. 이 시는 다윗이 언제 기록하였을까? 시를 기록할 때는 시점이 중요하다. 1절을 보자. 다윗의 시인데 유다광야에 있을 때 기록하였다. 광야에 있다는 것은 어려운 시기라는 것이다. 압살롬과 그를 따르는 무리가 반란하여 피신하였다. 광야를 가는 것도 어려운데 왕으로서 피하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추락인 것이다. 아들에 의해서 쫓겨가는 것이다. 사랑하던 아들이었다. 생활 형편이 안 좋은 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추락이다. 이 정도 되면 어떤 느낌일까? 죽고 싶은 느낌일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 속에 시를 쓴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광야라는 곳은 외롭고 배고픈 곳이며 목이 마른 상황이다. 그가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가? 다윗이 찾는 것은 물이나 빵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통 때는 돈이 중요한 것처럼 여겨진다. 인맥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에 오면 다 쓸데없다. 도움이 안 된다. 가족과 형제, 자식 형제도 좋지만 다 필요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가? 1절을 보자. 이 말은 다윗의 영혼이 목이 마른 상황인 것이다. 광야에서는 필요한 것이 많다. 우리도 어려울 때 필요한 것이 많아 보인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만 찾는 것이다. 누가 이렇게 하나님만 찾았는가? 어떤 필요보다도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다. 이것은 경험해 본 사람만 찾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저도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 냄새가 엄청 심한 대 맛이 있는 과일이 있었다. 두리 향이다. 냄새는 화장실 냄새이지만 맛을 아는 사람은 찾는 것이다. 못생겼고 울퉁불퉁하고 냄새도 지독하다. 그런데 맛이 보통이 아니다. 호텔에서도 못 들어가게 해서 길가에서 먹었다.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맛을 아는 사람만 찾는 것이다. 오랫동안 그 맛에 길들여진 사람은 강력하게 당겨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추장과 김치와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김치가 없으면 밥을 먹은 것 같지 않은 것이다. 김치를 먹는 순간 영혼 깊은 곳까지 와닿는다. 외국인은 잘 모르는 것이다. 다윗은 친구를 찾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한 분을 갈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험한 것이다. 신앙생활도 누가 잘 하는가? 하나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갈망이 깊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유는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서도 굶주림과 갈망이 필요한 것이다. 그냥 목마른 수준이 아닌 목이 말라 입술이 타 들어가 죽기 직전에 상태이다. 다윗의 장막이라는 책이 있다. 오늘날 구해야 할 것은 탁월한 건물과 연주가 아니다. 세상에 자랑할 것이 없지만 하나님 앞에 굶주린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국에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굶주림이 있다. 다윗의 영성에서도 대변하는 것이 갈망이다. 야곱이 절체절명에서도 갈망하였다. 오순절에 마가에 다락방에서도 성령이 들어오길 갈망하는 것이다. 삭개오가 나무 위에서 주님을 만나길 기다리는 상태인 것이다.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좋아하신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찾는 것에 있어 쉽게 물러나면 안 된다. 이 밤에 은혜 안 받으면 못 산다는 마음으로 다가서야 한다. 쉬운 것이 아니다. 목회자도 그런 경험을 많이 한다. 신방을 보내면 "바쁘시죠? 오지 마세요~"라고 한다. 필요 없다는 듯이 말한다. 굉장히 이해하려 하지만 섭섭한 것이다. 어떤 분에 주례를 33살에 한 적이 있다. 저는 안 한다고 하였다. 내 주례를 받겠다고 하였다. 손사래를 쳤다. 안 물러나더니 인쇄를 다 해버리더라. 가운을 입으면서 신랑과 구별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집회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거절하지만 거절했을 때 다시 부탁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해마다 부탁드린다. 여러 경로로 로비가 온다. 기도하는 가운데 응하게 된다. 우리가 쉽게 포기하면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다.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하나님을 찾는다. 우리는 대체 가능한 것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다. 다원주의 시대이다. 하나님과 맞먹는 것 같은 신들을 만든다. 우상 전시의 시대이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간절히 찾지 않는다면 다른 것에 배부른 것이다. 당신 이외에는 없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전부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커 버리면서 부모를 찾지 않는다. 돈이 필요할 때만 찾는다. "엄마"라고 부르며 돈을 부른다. 배부른 아이에게는 젖을 물리지 못한다. 영적인 체험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온갖 배부른 것들로 넘쳐나는 시대이다. 간절한 사람들은 쉽게 만족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쉽게 재미를 갖게 하는 것이 많다. 너무 쉽게 즐거워하며 만족해한다. 훨씬 더 깊은 곳으로 가지 못한다. 깊은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있는데 쉽게 잡고 끝내버린다. 청소년들이 열광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스포츠, 휴가에 도취되어 만족한다. 그런 것들은 비교에 의한 것이고 제한적이기에 금방 질리게 되어 있다. 일시적 만족을 주지만 영원하지 않다. 이 세상에 어떤 것으로도 결코 만족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닌 것이다. 우리 안에는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갈망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갈망이다. 2절을 보자. 3절을 보자. 다윗의 시를 보면 하나님의 맛을 본 사람이다. 영적 갈망에 강도를 보면 안다. 다윗은 자신이 즐기는 것과 비교하는 것이다. 진정한 만족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다. 신앙의 중심은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인데 하나님과의 교제를 말한다. 사역의 성취가 아니다. 기도한 다음에 만족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생명력 있는 교제를 맛본 것이다. 종교생활과 신앙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다윗은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하나님에 대한 묵상 때문이다. 그 영혼을 뒤척이는 것이다. 우리는 야식과 스트레스 때문에 잠을 못 잔다. 인간적인 문제로 잠을 못 잔다. 다윗은 영적인 갈망으로 잠을 못 잔다. 누가 신앙생활을 잘 하는가? 영적 갈망이 강해지는 사람이다. 깊어지는 것이다. 어떤 것도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 1절을 다시 보자. 다윗이 광야에서 목이 마른 상태를 비유한 것이다. 우리는 물이 없으면 사면 그만이다. 그러나 다윗이 있는 곳은 물이 없는 곳이다. 죽음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느긋한 태도가 아니다. 절박한 마음에서의 표현이다. 신앙의 위험이 무엇인가? 영적인 갈망이 식어진 것이다. 그것은 영적 죽음을 의미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참여보다도 중요한 것이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존재하는가? 깊어지고 있는가? 점검해보아야 한다. 지금 시대는 거짓 만족이 많다. 아이들도 군것질하면 밥맛이 없어진다. 영적인 유해가 많다. 각종 음악, 책, 게임, SNS 같은 것이다.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지만 영적인 시선이 상실된다. 내 마음을 빼앗겨 시간을 쏟아버려 멈추어 버린다. 영적인 맛이 사라진다. 이 시간에 영적으로 갈망해보자. 황폐한 땅에서 주를 갈망하자. "죽을 지경입니다. 내 인생의 어떤 것보다도 당신을 원합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자. 선교사님들은 하나님을 경험한 분들이다. 오지에 이따 보면 경험하는 것이다. 지금도 철야에 라이브로 듣고 계신다. 이 자리를 사모한다. 사막에서 오아시스가 내리는 것 같다. 지하 교회에도 그런 마음이 있는 것이다. 내 형편과 처지와 환경이 어렵고 힘들지만 돈과 친구가 아니고 당신이 아니면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임재를 경험하면 그 임재에 머물고 싶은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죽고 사는 문제가 연결되는 것이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앉아있는가? 다윗은 인생의 위기 속에서 절박한 것이다. 간절히 찾는 자에게 만족을 주시는 것이다. 5절을 보자. 다윗은 하나님의 기대로 가득하다. 충분히 만족함을 기대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대체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 피곤하고 지친 사람이 다른 것에서 찾을 수 있지만 잠시뿐인 것이다. 다시 피곤이 오는 것이다. 완전한 만족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만족은 그 안에서 충만하며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은 강력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구하였다. 산에서 일시적 영광을 목격한 베드로가 "여기가 너무 좋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이 땅이 광야이다. 얼마나 에너지를 뺏는 것이 많은가? 탄식이 나오는 세상이다. 쉽게 만족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가볍게 찾으며 떠나가 버린다. 압도하는 영광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은 말초적이며 감각적이며 육체적이다. 문화가 주는 것들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그것을 본 것이다. 모세가 영광 앞에 눈을 멀어버린 것이다. 바울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본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랐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직접적인 대면인 것이다. 풍설과 얘기가 아니며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손으로 만진 것과 같은 것이다. 다윗은 광야에서 그의 성소에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면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상관없이 성소가 된다. 광야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그곳이 성소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광야에 시련을 이겨내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힘들기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다. 그분의 영광과 임재에 앞도를 경험한다면 그 광야를 통과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놓치지 않는다. 6절을 보자. 7~8절을 보자. 다윗의 표현은 그냥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기도생활도 종교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기도의 횟수와 경력을 보는 것이다. 연애를 하는 것도 횟수를 채우기 위해 만나지는 않는다. 잊는 것이다. 그 만남이 간절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자체를 즐거워한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예배자이다. 기쁜 입술로 찬양하는 입술이다. 입술에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게 무슨 입술인가? 기쁜 입술이다. 완전한 만족을 경험해야 나오는 것이다. 찬송이 터져 나오는 입술이다. 그 예배는 어떤 것인가? 주를 경험한 사람들이 만족한 상태에서 나오는 예배이다. 완전한 영혼의 만족함 상태에서 예배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 힘이 나는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한 순간에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예배 안에서 영원히 즐거워하며 찬송이 나오는 상태이다. 영혼이 굶주린 상태가 해결되어 나오는 예배에 자리이다. 마귀에 공격이 거세지고 있다. 웬만해서는 버텨낼 수 없다. 다윗의 신앙은 생동감이 있다.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만남이 있는 것이다. 살아있으며 생생한 만남이 있는 것이다. 신자의 힘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삶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내가 주안에서 살면 그것이 능력이다. 마귀를 쫓아내야 능력이 아니다.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다. 내가 주안에서 기뻐하는 삶이다. 그런 삶이 아니면 생동감과 에너지가 없으며 활력이 없다. 내 힘으로는 지친다. 사회생활도 신앙생활도 지친다. 세상에 우리가 보여줄 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살아있는 삶이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로 살아가면 불신자들도 느낀다. 무당들도 신기가 있는 무당들은 신기가 느껴진다. 신 내린 무당은 신기가 있다. 그런데 학수 무당은 신기가 없다. 그냥 배운 것으로 하는 것이다. 굿을 밤을 새워서 한다. 얼마나 힘들겠는가? 앞에 돈 보며 힘을 얻는 것이다. 돼지에 꽂힌 돈을 보며 힘을 낸다. 철야를 할 때 지치면 내 힘으로 하는 것이다. 밤새워 하게 되면 느낄 수 있다. 은혜가 없는 사람은 시계가 가질 않는다. 한참 기도해도 10분밖에 안 갔다. 우리 힘으로는 힘든 것이다. 금요철야가 얼마나 좋은가? 중보기도를 할 수 있다. 새벽 1시까지 기도하는 분들이 많다. 진짜 맛본 사람은 더 갈망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경험하고 살아가면 세상에 사람들이 느낀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그냥 보지 않는다. 신앙이 없어도 맹탕인지 금세 알아챈다. 진짜인지 알아본다. 함부로 할 수 없다고 느낀다. 하나님이 가만 안 둘 것 같은 느낌이 있다. 내가 하나님의 임재에 살지 않으면 만만하게 본다. 내가 막 사니까 그런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별것 아닌 것처럼 본다. 영적인 어떤 권위도 느낄 수 없다. 8절을 보자.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주님의 오른손이 붙드는 것이다. 다윗을 공격하려던 악인들이 도리어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원수를 이기는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원수들의 추격에서도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다. 주님의 보호 아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입술로 노래하며 높이는 것이다. 원수들이 떠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무엇을 의지하며 만족하려 하는가? 하나님은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주신다. 완전한 만족이 되신다. 그분이 함께 하실 때 모든 환경이 억압할 수 없으며 스트레스를 주지 못한다. 능력이 임하여 승리를 주실 것이다. 만족하게 하시고 입술로 주를 찬양하는 예배자로 살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늘 갈망하며 식어지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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