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롭든, 외롭든 존재는 귀하다
창세기 1장 1~3절
존재의 목적과 의미는 무엇인가요?
전광식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자리에 모인 것에 감사를 표했어요.
존재론의 기원을 설명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했죠.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존재에 네 가지 원인이 있다고 주장했어요: 질료, 형상, 동력, 목적.
예를 들어, 의자의 경우 나무는 질료, 형태는 형상, 목수의 손길은 동력, 사용 목적은 그것의 의미라고 하였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목적을 이루어야 의미가 있으며, 목적의 구현이 최고선이라고 말했어요.
이러한 목적론적 세계관은 서양 사회가 존재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되었죠.
첫 번째로 부정적인 모습인 목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세상의 모습을 제시했어요..
하나님 없는 삶의 경향은 무엇인가?
목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이로 인해 창조주가 없다고 생각해요.
창조주가 없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우연의 산물로, 결과적으로 목적과 의미가 없게 되죠.
목적과 의미가 없으면 사람들은 두 가지 극단적인 경향으로 흐르게 돼요.
첫 번째 경향은 향락주의로, 내세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욕망대로 살아가게 되죠.
향락주의적인 삶은 소비중독, 문화중독, 마약중독 및 퇴폐적인 삶으로 귀결되죠.
두 번째 경향은 허무주의로, 삶의 허무와 무의미성을 느끼며 염세주의적으로 살아가게 돼요.
이로 인해 삶에 슬픔을 느끼고 극단적으로 자살로 이어질 수 있어요..
목적 중심의 삶이 왜 중요한가?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목적 중심의 삶을 살아간답니다.
릭 워렌 목회자가 쓴 책 '목적이 이끄는 삶'은 전 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최고 베스트셀러가 되었죠.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의 제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것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해요.
사도 바울도 표 떼를 향하여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언급하며 목적 지향적인 삶을 강조한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인들보다 훨씬 목적 중심의 삶을 영위하며, 이는 주어진 생을 무의미하게 살지 않으려는 아름다운 몸부림이죠..
목적 중심주의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과도한 육체와 정신적 스트레스가 발생해요.
그래서 늘 과도하게 일을 하게 되죠.
주변을 돌아보지 않아 가족들의 희생이 따르게 되고, 중요한 인간관계를 놓치게 되죠.
목적에 몰두하다 보니 삶의 여유가 없어지고, 따라서 인간미와 감성을 잃게 되죠.
목적을 이루면 자만하게 되고, 이루지 못하면 좌절감과 패배의식에 빠지게 되는데, 심지어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목적을 이루려다 마음과 몸이 병들고, 일찍 세상을 떠나기도 하여 남겨진 자들에게 슬픔과 비참함을 남기게 돼요..
목회에서 목적 중심주의의 문제는?
목적 중심주의의 근본적인 문제는 개인적인 욕망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에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특정 목적 설정이 필요함을 제시하죠.
많은 경우, 목적이 고상하고 선해 보여도 그 심층에는 개인적 욕망이 흐르고 있어요.
릭 워렌 목회자의 언어는 신앙적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인본주의적 욕망을 가릴 수 있죠.
목적 지향적인 삶이나 일은 목적 달성에 혈안이 되어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된답니다..
목적지향적 삶의 문제는 무엇인가?
때로는 신앙 양심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을 서슴없이 하게 되죠.
이성은 우리의 감정과 욕망을 통제하고 성찰하기 위해 주어졌지만, 목적지향적인 사람들에게는 욕망을 성취하는 도구로만 활용돼요.
이러한 삶의 방식에서 주변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만 여겨지죠.
목적지향적인 사람들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면 이용하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냉담하게 무시해요.
출세나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문제는 흔히 발생하죠..
존재의 가치는 어떻게 인식되나요?
사람들은 종종 기도나 신앙을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다고 해요.
목적 중심주의 관점에서는 목적이 없는 존재를 무가치하게 여길 수 있다고 하죠.
그러나, 존재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해요.
인생에서 목적을 찾지 못한 사람들도 그 자체로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지 않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해요.
고대 헬라의 사상가들도 존재가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것이라고 여겼다고 해요.
정신(누스)보다 생명(조에이), 그리고 생명보다 존재(온)가 우선이라고 생각했죠..
성경 첫 문장이 의미하는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장엄한 말씀의 역사로 시작돼요.
시인들에게 첫 문장은 신이 주는 것이라고 하며, 성경의 첫 문장 또한 신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고 하죠.
"빛이 있어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는 무에서 유가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해요.
비존재의 세계에서 존재의 세계가 펼쳐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죠.
현대의 인류는 고도의 기술을 자랑하지만 무에서 유를 만드는 작업은 하지 못해요..
존재의 가치와 아름다움은 무엇인가요?
전광식 목사는 존재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해요.
우리의 하나님 창조주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의 작품으로서 귀하죠.
우주와 자연은 살아있고, 조화롭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이를 잘 깨닫지 못할 때가 많아요.
자연이 사계절마다 옷을 갈아입고, 바다와 하늘의 생명체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에요.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하나님께서 "있으라" 명령하셨고, 이는 하나님의 깊은 뜻임을 보여줘요.
그러므로,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는 것은 우리의 삶을 더욱 감사하고 신비롭게 만드네요..
하나님이 존재로 기뻐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크게 기뻐했어요.
인간을 만들어 놓으시고도 하나님은 가장 크게 기뻐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죠.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집 나간 자식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어요.
아버지는 자식이 객사하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격했죠.
누가복음 15장 1절에서는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라고 표현되죠..
존재의 귀함과 복음의 메시지는?
요셉의 경우를 통해 존재의 귀함을 강조해요.
요셉이 살아있는 소식만으로도 아버지 야곱에게 큰 기쁨을 줬죠.
부활의 복음은 출세나 성공이 아닌, 죽었던 인생이 되살아나는 것을 의미해요.
그래서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임을 알 수 있어요.
존재 자체가 가장 큰 축복이에요.
이는 하나님께 큰 기쁨과 영광이 되는 것이죠.
탕자의 아버지와 야곱의 기쁨을 통해, 우리도 이 땅에 존재함으로써 하나님께 기쁨을 준다는 것을 상기시켜요..
존재의 귀함은 어떤 의미일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우리의 성공이나 노력에 달려 있지 않아요.
사도행전 17장 1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죠.
하나님은 이미 영광 중에 계신 분이고, 그 영광은 우리의 행위에 의존하지 않아요.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 즉 우리가 살아있고 돌아오는 것 자체를 기뻐하신답니다.
존재의 목적은 존재한 이후의 문제이며, 설령 존재의 목적이 없더라도 모든 존재는 귀하다고 말씀하신답니다..
존재의 귀함을 어떻게 가르칠까?
존재의 가치와 귀함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해요.
비록 삶의 목적과 이유를 찾지 못하더라도, 존재 자체로 아름답다는 것을 가르쳐야 해요.
청년 자살률이 높은 우리나라에서, 젊은이들에게 존재의 귀함을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죠.
교회는 청년들에게 목적과 꿈을 가르치는 것에 앞서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귀하다는 것을 먼저 가르쳐야 해요.
외롭고 괴로운 상황에서도 본인의 존재가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줘야 해요..
존재의 가치와 목적은 무엇인가?
독일의 문호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존재는 의무라 하며, 일과성이라도 순간이라도 중요하다고 했어요.
그리고 예수님도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라고 하셨죠.
예수님의 말씀에서 천하를 얻는 것이 대통령 정도가 아닌, 온 천하를 손에 쥐는 것이라고 해석되네요.
인생의 성공과 출세가 중요하지만, 존재를 잃으면 그 가치는 무의미하다고 설명해요.
존재 그 자체가 귀한 것이며, 삶의 이유나 목적을 찾지 못해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고 강조하죠.
출세와 성취 중심의 삶이 아닌 존재 중심의 삶을 설정해야 한다고 제안하며, 현재 사회는 무한 경쟁과 출세를 위한 교육으로 순수함과 착함이 사라졌다고 비판해요..
존재의 가치와 무게는 무엇인가요?
현대 사회에서는 겉으로는 교양과 화려함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생존의 기술과 욕망적 목적의 무거움에 휩싸여 살아가요.
그리스도인은 참을 수 없는 목적의 무거움에서 벗어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치와 무게를 인식해야 해요.
하나님은 야곱과 탕자의 아버지의 사례에서 보이듯 존재와 생명을 목적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고 하죠.
예수님은 수고의 양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우하셨죠.
존재 중심과 생명 중심의 공동체가 목적 지향적인 공동체보다 더 아름답고 귀해요.
목적을 세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중요성을 알고 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해요.
첫째로, 한 영혼의 소중함과 귀함을 인식해야 해요.
너무 큰 꿈을 지니고 나아가면 성취 중심으로 흐르기 쉬우므로 주의해야 해요..
존재의 소중함은 무엇인가요?
결과 중심의 사고는 영혼의 소중함을 간과하게 만든다고 해요.
사람을 목적에 따라 대하면, 도움이 되지 않으면 소홀히 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은 모두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하죠.
교회 안에서 직분을 받아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귀한 존재이듯, 직분이 없거나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 나라에서 존귀한 존재라고 해요.
예수님은 달꽃의 존재 자체가 아름답다고 노래했어요.
달꽃처럼 외로운 사람들이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인식할 필요가 있죠.
또한, 교회는 병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해요.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자들, 노숙자, 외톨이, 실직자, 환자, 장애우 등도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존재로 여겨져야 한다고 하죠..
사랑의 실천이란 무엇인가요?
예수님을 닮은 사회는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사회예요.
손양훈 목사님과 서스펜 선교사는 그러한 일을 했죠.
사랑의교회는 약한 교회와 힘든 목회자들을 돕고자 힘쓰고 있어요.
교회는 아웃사이더,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민초들을 위해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생은 목적에만 이끌려 질주하는 것이 아니며, 옆을 돌아보는 여유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느껴요.
성경의 말씀도 족장 중심으로 개시의 역사가 전개되지만 하나님께서 이를 강조하신다고 믿어요..
이웃을 돌보는 마음은 왜 중요할까?
광야에서 하갈과 이스마일이 고통받고 있음을 봐야 해요.
우리가 정신없이 살면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게 되죠.
개인과 공동체는 연약한 이웃과 동료를 돌보는 안목을 가져야 해요.
조선시대 선비들도 연약한 사람들을 돕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죠.
경주의 최부자는 백리 안에 굶는 백성이 없게 도왔어요.
구례의 운조루는 쌀을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했죠.
그러므로 우리는 연약한 이웃을 돕는 마음을 가져야 해요..
삶의 존재와 목적의 관계는?
전광식 목사는 삶의 존재 자체가 목적 성취보다 더 큰 축복임을 강조해요.
운조루가 오랜 세월 동안 선행을 통해 건재할 수 있었음을 예시로 드네요.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변의 어려운 문제를 돌보는 따뜻한 이웃 사랑의 시각을 가져야 함을 지적해요.
아침에 일어나 햇빛을 보고 숨을 쉴 수 있는 존재 자체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죠.
성경 속 인물들이 특정 목적을 가지고 삶을 이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삶을 인도하셨음을 강조해요..
천국과 존재의 가치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결국 천국에 이르게 된다고 해요.
요한계시록 22장은 천국을 최고의 주얼리 상점으로 묘사하지만, 목사님은 천국의 영원성에 더 관심을 두고 있죠.
우리의 인생은 늘 무존재와 비존재의 불안 속에 놓여 있어요.
삶의 이유나 목적을 찾지 못해도, 존재 자체로 하나님이 주신 귀한 생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죠.
삶이 괴롭고 외롭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 의지하며 나그네 길을 걸어가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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