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23 금요철야예배

Q.T/수영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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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죽었다고 외친 철학자 니체는 인간은 권력의 의지를 갖었다고 하였다. 강해지고 높아지고 지배하려는 욕망이다. 우리 인간은 힘에 대한 본능적 욕구가 있다.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그렇다. 우리가 부지런히 돈을 모으려는 것도 부의 힘을 얻으려는 것이다. 힘들게 운동하는 것도 그렇다. 자기 수양과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서도 정신력을 배양한다. 나라도 힘이 있어야 한다. 일본과 대항해서도 국력을 길러야 한다. 우리가 힘을 얼마나 갖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이 부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시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함이다. 세상에서 이런 힘을 얻기 위해 목을 맨다. 우리가 하는 일의 저변에는 권력에 대한 욕구가 깔려있다. 신앙생활은 어떠한가? 신앙생활은 힘을 빼앗기는 것인가? 왜 이렇게 금요철야에 나와있는가? 왜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가? 철학자 니체는 권력의 대한 욕망을 부인하고 위축시킴으로 인간을 약골로 만드는 것이 바로 악이며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힘에 대한 욕망을 부인하지 않는다. 새로운 힘을 추구하게 한다. 정신의학자 폴 툴 루니에는 영적인 능력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능력이며 이 능력이 민족과 개인을 변화시킨다고 하였다. 우리가 모든 것을 전폭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맡기면 초자연적인 능력을 제공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능력이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함이다. 이 능력이 없으면 형식에 불과해진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보자. 이 말씀이 사도행전의 목차 아우트라인이다. 누가는 이 말씀대로 성령의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과정을 기술하였다. 제자들이 받은 권능은 증인이 될 수 있는 권능이다. 제자들이 복음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능력이 필요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주님 말씀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주님으로부터 믿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고 책망받았다. 요한복음 14장 26절을 보자. 성령이 오면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다. 흩어져 있는 퍼즐이 맞춰지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도 얘기하셨다. 성령께서도 파악하게 도와주셨다. 구약에 말씀을 자주 얘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음을 깨닫게 하셨다. 베드로가 전한 첫 번째 메시지는 구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잘 깨닫게 해주는 설교였다. 베드로가 들은 말씀을 기억하게 하고 깨닫게 하신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도 예언자라 지칭하는 이들이 많다. 그가 직통 자라고 하며 전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한 것이다. 성경말씀보다 그들의 말이 솔깃해 보인다. 그러나 성령의 주된 사역은 새로운 진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전해진 내용을 전하며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공백에서 전하시지 않는다. 항상 말씀으로 함께 하신다. 복음의 진리는 성령의 조명으로만 가능하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이 진리를 아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한다. 무지하면 유린당하기 때문이다. 무지의 속박이다. 중세 로마교회는 사람들을 성경의 무지함으로 속박하였다. 신앙생활에서도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함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생명과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함이다. 왜 그리스도인이 변하지 않는가?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개념적으로만 아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이 그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에 속박에서 건져내신 진리의 복음을 성령의 도움으로 깨닫는다면 우리의 삶이 송두리째 뒤바뀐다. 우리 모든 것을 이 진리에 걸게 만든다. 복음의 증인이다. 이것이 진리를 아는 힘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를 방해하는 것이 어둠의 세력이다. 어둠이 도사린다. 죄인은 어둠을 사랑하며 빛을 싫어한다. 악한 마음의 작용이 무의식처럼 일어난다. 원수 된 마음이다. 내가 듣기 싫은 말씀은 흘려보낸다.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우리 머리에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문제이다. 마치 무의식처럼 오는 반역이다. 필사적으로 사탄의 세력이 몰려온다. 고린도후서 4장 3~4절을 보자. 성령의 1차적 사역이 우리 마음에 진리의 비추는 것이라면 악령은 이것을 결사적으로 방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역사함과 동시에 악령도 역사한다. 말씀을 들을 때 치열하게 싸운다. 주님께서도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길가에 씨를 새가 재빨리 가로채 버린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심령 말씀에 임하면 어둠의 왕국이 붕괴되며 열매가 60배, 100배로 늘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이 이것을 가로챈다. 변화되지 않으면 악한 자에게 말씀을 착취당하고 유린당한 것이다. 사탄의 능력은 거짓말에 의하여 역사한다. 성령과 반대다. 복음을 믿지 않으면 다른 것을 믿는 것이다. 사탄의 거짓말이다. 그 배후는 악한자가 도사리고 있다. 진리에 빛을 비추면 거짓말에 지탱해온 우리 마음속 어둠이 붕괴된다. 자유하게 된다. 그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하였다. 성령의 권능은 어둠의 속박에서 우리를 비추는 빛의 능력이다. 진리의 능력이다. 빛으로 첫 창조를 이룬 것처럼 새 진리의 빛으로 새 창조를 이루실 것이다. 오순절에 새 설교가 유다인이 마음을 찔리게 하였다. 어두운 마음에 빛을 비추게 하신 것이다. 삼천 명이 회개하였다. 예수님을 못 박아 행한 사람들이었다. 많은 기적을 믿지 못하며 죽인 사람들이다. 놀라운 기적이다. 베드로가 전한 메시지가 예수님이 전한 메시지보다 사람들을 회개하게 한 강력한 효력이었다. 나보다 더 큰일을 하리라고 하셨다. 주님께서 지상에서 전한 말씀보다 제자들이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신 능력을 발한 것이다. 새 창조의 능력이었다. 믿는 자가 늘어났다. 무슨 일인가?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을 회복하신다는 말씀이 성취됨이다. 이스라엘이 멸망하였지만 그들을 다시 회복하신다는 오랜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 이스라엘이 회복하시고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게 하심이다. 마른 뼈가 있었던 에스겔의 메시지가 성취되는 것이다. 마른 뼈는 메마른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베드로가 전한 메시지로 이스라엘이 살아난 것이다. 새로운 이스라엘의 교회를 일으킨 것이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확산되며 새 창조의 역사가 거대한 스케일로 일어난 것이다. 지금도 교회가 이 영광을 온전히 전할 때 에스겔 골짜기와 같은 세상에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심이다. 성령은 새 언약과 창조의 영이시다. 하나님 통치가 일어나는 것을 방해하는 불순종의 마음을 변화시킨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 우리 마음이 변화하는 것이 우주의 변혁보다 더 놀라운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독생 자를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인간으로 구성된 공동체를 창조하셨다. 사도행전 2장 44~47절을 보자. 이것이 성령 안에서 사랑과 화평과 희락을 누리게 하는 공동체와 참된 교회에 모습이다. 성령의 권능은 우리를 죄에 속박에서 해방되게 하시고 사랑하고 섬기는 능력으로 인도한다.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가? c.s.lewis는 우리 안에 거대한 공허가 있음을 얘기했다. 서로에게 지옥인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이다. 우주에서 가장 큰 기적이다. 성령의 거대한 능력은 우리 존재를 변화시킨다. 우리 존재의 핵을 자아에서 떼어내 하나님 안에서 재부팅시킨다. 모든 것을 재설정하게 하신다. 우리 삶의 의지와 가치관과 목적이 하나님 중심으로 설정하게 만드신다. 하나님의 존재의 근원이다. 생명의 근원이며 넘쳐흐르는 생명과 은혜를 공급받는다. 다른 이들에게도 생명과 은혜를 넘쳐흐르게 통로를 내신다. 이중적인 축복이다. 아브라함의 축복도 이중적이었다.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이 전해지게 하겠다. 성령이 더 온전하게 실현된다. 이중적인 축복을 누리게 하신다. 넘쳐흐르도록 은혜의 축이 흐르게 된다. 삶의 모습을 보고 칭송하였다. 세상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다. 증인 된 삶이다. 영광의 모습이 복음의 증거이다. 믿는 자의 수를 더하셨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 전하지 못하면 전도의 문이 막힌다. 누가는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기록하였다. 아나니아와 삿비라이다. 죽게 하셨다.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을 죽이신 것이다. 성령은 결코 유약하지 않으시다. 무력하지 않으시다. 성령은 죄와 거짓을 무섭게 징계하시며 파괴하신다. 두려운 영이시다.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한 공동체가 되면 죄와 위선이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성령을 계속 거스르면 큰 화가 임한다. 5장 11절을 보자. 성령은 새로운 공동체 의식을 형성한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과 떨림으로 행하는 코람데오의 의식을 고취시킨다. 교회가 타락하고 침체하면 공동체가 흐려진다. 거룩한 두려움이 참된 믿음의 기초이다. 두려움이 사라지면 부패가 밀려온다. 방종과 나태함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데 무슨 짓인들 짓지 못하겠는가? 두려운 것은 이런 목사와 장로 권사와 집사가 많은 것이다. 성령은 사탄을 궤멸하신다. 성령은 장의사이다. 우리의 옛사람을 완벽하게 죽여 장사하신다. 악한 행실을 죽이는 능력이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3절을 보자. 우리 몸에 가장 악한 지체가 어디인가? 혀이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입술은 독사의 독이 있는 것이다. 맹독이 흘러나온다. 성령은 이것을 정화시킨다. 성령 충만하게 되면 혀가 제어되고 성령께 통제가 된다. 혀가 회심한다. 혀에 임할 때 하나님에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확장된다. 성령께 통제되지 않은 혀가 사탄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성령의 권능은 우리들의 으뜸인 교만을 죽인다. 성령으로 교만의 세력이 꺾이면 온유해진다. 혈기에 눌리지 않는다. 온유한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신다. 성령의 능력은 종으로 낮아지게 하신다. 자신이 약해짐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무로 만든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기까지 약해지셨다. 무력의 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 위에 거하려는 교만함이 죽어야 다른 이를 섬길 수 있다. 성령의 권능은 자신의 성공과 영광을 죽이는 능력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이것을 구하기 쉽다. 특히 목사가 그렇다. 저는 진정으로 성령 충만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령의 권능을 잘못되게 구함이었다. 위험한 것이었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이 죄에 역사이다. 기묘하고 교묘하다. 성령은 헛된 욕망을 시들게 하신다. 비참한 실패와 좌절과 수치를 당하게 하셔서 욕망이 시들게 하신다.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추해진다. 목사와 교인들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영광만 구할 때 존귀케 하신다. 성령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신다. 악하게 하는 헛된 욕망에서 건져내신다. 오순절에 구하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이다. 높아지려는 사람이었다. 제자들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켰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경건과 능력으로 이 사람을 일으키게 한 것처럼 놀라느냐?"라고 하였다. 바울도 비슷하게 앉은뱅이를 일으켰다.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기려 하자 그들의 옷을 찢으며 성을 내었다. "나도 너희와 같은 사람이었다."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에게 향할 때 혐오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영광 뒤에 잊혀야 한다. 자신에게 은근히 이끄려는 부패성이 있다. 사람들이 우리를 추종하기가 쉽게 된다. 대중을 상대하는 이들은 관심과 시선이 자신에게 쫓게 되지 않도록 철저히 감춰야 한다. 어떤 이는 성령의 권능으로 자신이 종교적인 왕국을 이루려 한다. 자기 자식에게 물려준다. 한국 대형교회에 세습이다. 제자들은 자기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순교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희생하며 견디었다. 하나님 나라와 위용과 난관과 대적에 겁먹지 않고 담대할 수 있다. 강하고 담대하게 하신다. 성령의 능력이다. 제자들이 얼마나 겁약하였나? 뺑소니를 치기도 하였지만 성령이 임하자 담대히 전했다. 두려워하지 않았다. 용기가 중요한 덕목인 것이다. 용기와 담대함이 없으면 불의한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생내적으로 지니고 태어나지 않는다.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신사 참배를 강요할 때도 그랬다. 부흥사가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거부하라고 독려하는 감동적 설교를 하였다. 교인들에게 손을 들라고 했을 때 전도사 외에는 전부 손들었다. 전도사는 그때 가보아야 알겠다고 얘기했다. 일본은 거부하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고문하였다. 그 전도사는 끝까지 거부하다가 죽었다. 이 육신도 힘이 있어야 하듯이 마음의 힘이 필요하다.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없다. 마음이 허약하여 지례 겁먹어 낙담한다. 기분 나쁜 말 때문에도 견디지 못한다. 우리에게 가장 취약한 부분이 마음이다. 그래서 어둠의 세력이 이것부터 공략한다. 상상이 부정적이게 꼬리를 물게 한다. 사상누각을 짓게 만든다. 실제 존재하지 않을 허상으로 염려와 불안을 증폭하게 한다. 이것의 공장이 되게 한다. 해독을 못한다. 우리 삶이 힘들고 불행해진다. 평안해지려면 마음이 강해져야 한다. 그 마음에 성령의 권능이 함께하여야 한다. 성령은 면역을 강화하신다. 제균이 가득한 세상에서 마음이 병들고 속이 병들게 하는 것을 막으신다.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신다. 우리의 속 사람을 새롭게 강건하게 한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였을 때 속 사람이 강해진 것이다. 제자들의 문제는 속 사람이 둔하고 어리석음이었다. 교만과 시기와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여서였다. 예수님이 있었을 때도 해결되지 못한 것이 성령이 오셔서 해결되게 하신 것이다. 속 사람을 새롭게 되게 하셨다. 제자들 곁에 육신의 주님이 떠났는데도 그곳에 더 탁월한 임마누엘의 축복이 임하였다. 그 안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리라고 하였다. 우리 존재 깊은 내면과 심연이 새롭게 된 것이다. 의식 수면 아래 무의식이 있다. 우리는 그동안 광활한 무의식 세계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선한 것도 그 쌓인 것에 의해 나온다. 그것이 우리의 인격이고 됨됨이이다. 많인 이들이 무의식으로 산다. 은혜롭게 되려고 하지만 무의식처럼 흘러나오것들 때문에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지 못한다. 가정에서 특히 그렇다. 남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하지만 가정에서는 무의식의 뚜껑이 열리며 그 안에서 흘러나온다. 자녀들과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한다. 세상과 직장에서도 자연스럽게 흘러나가게 해야 한다.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과 다르지 않으면 실패하게 된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무의식처럼 흘러나오는 것이 영향을 미친다. 증인 됨에 삶과 사역이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의 비결이 넘쳐흐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넘치도록 수고하지만 열매가 없다. 생명과 능력이 약하다. 우리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 권능이시다. 성령을 주셨다. 성령은 넘쳐흐르는 은혜이다. 생수의 강이다. 성령의 생수는 우리 안에 흘러나오기 전에 먼저 깊숙이 들어간다. 주님이 주는 생수를 들이켜 마시면 우리 안에서 영원히 솟는 생수가 된다. 죄의 불순물도 씻어낸다. 깊은 내면에 치유와 정화가 일어난다. 우리 안에 마음의 상처와 감정과 욕망 자존감과 병든 자의식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부정적인 염려와 감정과 스트레스가 넘치면 고달파진다. 죽을 맛이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셨듯이 생수가 강처럼 흐르면 평안과 안식이 있다. 인간적으로 불안하여도 평안할 수 있음이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다가 참혹하게 파괴될 수 있음에도 깊이 잠들을 수 있었다. 천사가 깨워야 할 정도였다. 주님께서 약속한 평안의 은혜이다. 요한복은 14장 27절을 보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평강의 영이시다. 평강은 평화의 왕이신 주님과 화평을 누리는 증거이며 그 열매이다. 모시지 않은 사람은 이것이 없다. 악인은 평강이 없다. 성령을 거스르는 삶을 오래 살면 평강이 없다. 돌이키고 회개해야 하는 사인이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찾으라는 사인이다. 평강이 능력이다. 매일 자질 구래 한 일을 해도 그렇다. 평강으로 사는 힘이요 능력이다. 기도의 열매인 것이다. 빌립보서 4장 6절을 보자. 우리 신자의 삶은 기도 거리를 만듬으로 이것을 대량으로 생산해낸다. 평강을 만들어낸다. 오순절에도 신약교회가 기도의 능력으로 출발했다. 그들이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 사도행전 6장 4절을 보자. 예루살렘에 믿는 신도가 늘은 것이다. 영적 부흥과 각성은 기도에 있다. 각성하는 것이 영적 부흥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부흥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으로 이루신다. 영적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시기에도 누군가 기도하게 하심으로 당신의 교회를 부흥케 하신다. 한국교회가 쇠락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된다.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비상사태에서 수영로교회가 있다. 한국 교회가 이 땅에서 빛을 발하는 통로가 되길 바란다. 항상 이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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