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9장 11~13절
한 목사님이 새 사역지로 가기 전에 은사 목사님을 찾았다. 은사 목사님이 가장 힘이 되었던 구절을 제자 목사에게 주었다고 한다. 새로운 시작을 앞둔 제자 목사에게 어려운 일이 닥칠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을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가장 힘이 되는 말씀이다. 우리에게도 소망으로 다가오길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땅에서 포로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말씀해주셨다. 우리도 새로운 하반기를 앞두고 있고 어려움과 도전들도 기다리고 있다. 이방 땅에서 버려진 것 같고 하나님이 부재하신 것 같지만 새로운 꿈과 희망을 주시는 것이다. 11절 앞부분을 보면 "너희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라고 설명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는 것이다. 이번 주일에 강사 목사님이 사자성어를 알려주셨다. '새옹지마'이다. 변방 늙은이의 말이라는 것이다. 어느 날 변방 늙은이가 자기 소유의 말이 이방 땅으로 도망갔다고 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위로했다. 이 늙은이가 이것을 복이라고 여기며 알지 못할 말을 했다. 그런데 이 말이 곧 다른 말을 데리고 온 것이다. 변방 늙은이가 갑자기 이것은 화가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자기 아들이 말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 아들은 말에서 떨어져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염려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는 알고 있다."라고 얘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우리에게 좋을지를 알고 계시는 것이다. 확실한 계획인 것이다. 이사야 55장 8~9절을 보자. 시편 77편 19절을 보자. 뭐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다 계획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천수만의 배와 비행기가 부딪치지 않는 것이다. 비행기에 탈 때 우리가 하늘길을 알기 때문에 비행기를 알고 타지는 않는다. 우리는 모르지만 안전하고 평안하다. 왜냐하면 기장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모든 길을 모르지만 기장과 비행기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 모든 되는 길을 알기 때문에 평안한 것이 아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가 평안한 것이다. 만유의 주이신 그분께서 창조하시고 지으시고 인도하시는 사실을 기억할 때 평안하다. 하나님의 종합적인 계획이 있으시다. 그 어떠한 일들이 해치지 않고 망하지 않는다. 불행처럼 보여도 반드시 복이요 은혜의 통로이다.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가자. 둘째로 하나님의 계획은 다 선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인 것이다. 평안이라는 말은 샬롬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생각은 복지와 안녕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국민연금공단, 4대 보험이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책임을 져 주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평화의 근원이신 것이다. 불행처럼 보이지 않아도 어려움이 닥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불행처럼 보이지만 그곳에 평안이 있을 수 있다고 하신다. 시편 131편 2절을 보자. 평안을 생각할 때 젖 뗀 아이의 평안함이다. 우리도 하나님 품 안에서 그것을 누릴 수 있다. 수많은 소문이 있지만 주님 품 안에서 안정감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생각이 악이요 재앙인 적이 없다. 우리를 그렇게 대하시지도 않는다. 혹 육신의 부모가 우리를 잊어도 하늘 아버지는 우리를 향하여 그렇게 행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이요 복인 것이다. 그 동기로부터도 계획과 실행에 있어서 눈곱만큼도 악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꼭 붙들자. 아무리 악처럼 보이고 불행처럼 보여도 하늘이 무너져도 부재하시게 보여도 하나님의 계획은 선이요 평안이다. 비행기가 흔들려도 그것이 우리를 망하게 하시지 않고 선한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저는 외아들을 잃었던 권사님을 기억한다. 장례를 마친 후 "다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여전히 선하심을 고백합니다."라고 말하셨다. 다니엘서 3장 17~18절을 보자. 하나님은 선하시고 선대 하시고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은 재앙이 아니요 평안이라 고백하자. 우리 삶도 돌아보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보면 우리를 악으로 불행으로 두지 않았다. 거절과 사건 사고와 질병으로 낙심하고 눈물을 흘리고 내일로 염려하였지만 지금 돌아보면 변함없이 선하신 길로 인도하신 것을 고백하자. 단순히 입으로 고백함이 아니고 진심으로 여전히 선하시고 선대 하시고 돌보심을 진심으로 고백하자. 마음으로부터 중심으로부터 진짜 선하심을 고백하기를 바란다. 세 번째는 우리는 미래에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신뢰할 때 그것이 찾아온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선하심을 믿는다면 기본적으로 미래에 낙관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인데 매사에 부정적이라면 신자 답지 않은 것이다. 어떠한 순간에도 낙관해야 한다. 망해도 안돼도 천국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내일에 대한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살자. 우리에게 약속된 미래를 향하여 가야 한다. 물론 어려운 일이 있고 힘들면 낙심할 수도 있고 염려할 수도 있다. 베드로전서 1장 6절을 보자. 잠깐 근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쿠아리움에 가면 큰 상어가 나에게 다가올 때 잠깐 근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리문이 있기에 안심한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놀라우신 계획을 준비하신다. 우리가 천국에 도착하면 처음 5분 동안은 정말 놀라울 것이다. 괴로워서 밤잠 못 자며 설쳤던 그것들의 무익함을 생각할 것이다. 그것들이 퍼즐처럼 맞혀줘 탄성을 지르게 될 것이다. 베드로전서 4장 12~13절을 보자.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크게 기뻐할 것이다. 크신 하나님의 계획 놀라운 계획을 신뢰함으로 용기를 갖자. 어려울 수도 있지만 낙심하지 않을 이유도 있는 것이다. 7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걸어가자. 오늘 이 말씀을 들어도 별 감흥이 없다면 그것은 한 가지가 충족되지 않은 것이다. 약속의 말씀이 능력이 안되게 여겨지면 한 가지가 더 충족되어야 한다. 예레미야 29장 12~13절을 보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면 나를 만날 것이라."라고 하신다. 모든 것이 기도인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를 맞추는 것이다. 배가 항구에 정박할 때면 갈고리를 던져서 맞춘다. 줄을 당기면 육지가 배로 가까이 오는 것인가? 아니다. 배가 가까이 가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편으로 가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다가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우리를 맞추는 것이다. 팀 켈러 목사는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도록 하시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도가 나에게 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나에게 말한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도록 내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는 선하다. 나는 너를 지킬 것이다. 내버려 두지 않는다. 희망이고 소망이다.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라고 말이다. 기도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도록 내어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보고 해석하는 것이다.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어떤 사건이 있는가? 엘리사를 잡으려고 아람 왕이 쳐들어왔다. 성벽에 오르니 아람 왕의 병사들이 빼곡히 둘러쌓다. 엘리사는 요동하지 않는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그들보다 많으니라."라고 하였다. 무슨 말인가? 엘리사는 보았다. 하나님의 계획을 보았다. 열왕기하 6장 17절을 보자. 기도할 때 아람 사람에 눈을 어둡게 하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는 것을 보아야 한다. 종이에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살아계시는 역사인 것이다. 기도할 때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는 것이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하나님의 십자가를 통한 계획을 통해 구원을 이루실 것임을 신뢰하게 해달라고 하였다. 우리도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눈 앞에 실패처럼 보여도 신뢰하게 해달라고 선하심을 신뢰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여전히 미래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면 낙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터널 끝에 계신 주님을 신뢰할 때 책임져 주신다. 기대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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