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08 목새벽예배

Q.T/수영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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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

에스겔 18장 21~32절

 

에스겔을 통한 예언의 말씀이 주어지고 있는데 큰 틀은 동일하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예외가 없이 해피엔딩을 원한다. 누구의 행복한 결말일까? 주인공의 행복한 결말이다. 결말이 잘 되고 행복하게 끝나는 것이다. 오해가 있거나 꼬여도 끝이 좋아야 한다. 반드시 주인공과 대치하고 있는 악역이 심판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악역이 조금이라도 잘 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해피엔딩을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멸망하게 된다. 첫째는 '악'에서 떠나 '의'를 행하는 경우이다. 둘째는 '의'에서 떠나 죄를 짓는 경우이다. 먼저 회개한 악인을 보자. 21~23절을 보자. 회개한 악인의 구원의 말씀이다. 두 번째는 실족한 의인의 말씀이다. 악인이라도 죄를 돌이켜 의를 행하면 죄를 기억하시지 않지만 의인이라도 죄를 범하면 구원을 고려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현재의 행동이 현재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다. 실족한 의인의 멸망이 먼저 나오고 회개한 악인의 구원이 그다음 일어나는 것이다. 악인이 과거에 모든 죄에서 돌이키면 과거에 죄악은 기억되지 않으며 살게 되는 것이다. 과거는 현재에 대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죄에서 돌이킴으로써 악인에 대한 생명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결국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다. 이러한 처사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한다. 25~29절을 보자.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들은 의인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니 하나님의 결정하신 처사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니 우리의 이가 시리다는 것이다. 끝까지 남 탓과 조상 탓을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의롭다는 것이다. 악인이 구원 받음이 억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네가 의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속으로는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 증거로 일이 잘못되거나 불행하게 되거나 내 마음에 안 맞거나 불만이 생기면 화살을 남에게 향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옳고 너희는 틀렸다는 것이다. 요즘 일본과의 관계가 많이 좋지 않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이 교육, 경제, 체육, 문화가 모두 우리를 이긴다면 이것은 억울한 것이다. 요나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조국을 망하게 한 앗수르에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였을 때 요나는 명령을 거부한다. 하나님이 쓰는 드라마에는 악인이 잘 살기를 원하신다. 악인이 잘 살고 잘 되는 것이 기쁘다는 것이다. 기가 막힌 것은 악인이 잘 되는 것을 기뻐하시고 의인은 잘 안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화가 나는 엔딩은 없는 것이다. 주의 길이 결코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도 보면 이상하게 악인이 잘되는 것 같다. 건강하고 오래 사는 것 같다. 나보다 더 잘되는 것 같아 보인다. 혹시 내 삶의 결과와 현실이 불만족스럽고 화가 나는가? 그렇다면 내가 의인이며 주인공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인생이 자꾸 화가 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내가 주인공인데 무조건 내가 잘 돼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화가 나는 것이다. 부부간의 문제이건 가정이건 직장이건 사업이건 나라이건 그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내가 바로 악역이라고 볼 수 있다면 해피엔딩의 시작인 것이다. 인생의 열쇠가 주어지는 것이다. 정말 내가 옳은가? 혹시 내 욕망과 내 중심적인 자아가 대부분이지는 않는가? 하나님은 내가 악역이라는 것이다. 죄인인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죄를 보고 돌이켜야 하는 것이다. 내가 내 삶의 악역을 자처하는 것이다. 내가 자식을 다그치는 악역인 것이다. 악역을 행하는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이다. 21절을 보자. 내 안의 죄악이 가득함을 알고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악인이 모든 윤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직 그 죗값으로 죽는 것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야 주인공이 잘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의 드라마 속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나는 악역인 것이다. 모두가 행복하려면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열쇠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내가 악인이라는 것을 알고 "나를 죽여주소서."라고 외쳤다면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부관계가 나빠지면 서로 탓을 할 것이 아니고 내가 악역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죽는 것이다. 그 죽는 길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매일 십자가 붙잡고 매사에 죽는 것이다. 이것이 윤례와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것이다. 내 인생의 불행함은 내가 악역인지 모르고 완성해 가려는 것이다. 이것이 불행인 것이다. "나는 죽고 교회가 살게 하옵소서"가 저의 기도제목이다. 교회가 쇠하든 말든 내가 흥하려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나도 모르게 내가 잘되고자 한다. 반드시 악역이 죽고 주인공이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악인이다. 오직 이 땅에서 활동하실 성령과 다시 오실 주님이 주인이시다. 우리는 주인공이 아니다. 내가 바로 악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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