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9/08 수영로교회 주일예배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이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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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그 위험성

창세기 6장 1~8절

 

1~2장은 하나님의 창조, 3장은 죄, 4장은 가인의 살인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 5장은 죽음의 서곡이 퍼져나간다. 6장은 죄의 영향력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된다. 창세기를 잘 들여다보면 인간의 본질적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인간이 왜 파멸하고 고통에 신음하는가? 그것이 창세기에 있다. 원인은 죄 때문이다. 죄를 듣기 싫어한다. 어디를 가도 얘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 모든 문제가 죄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도 이미 알고 있다. 아이도 죄를 잘 짓는다. 가르치기 전에 다 할 줄 안다. 한 교역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가 핸드폰을 사용한 얘기를 들었다. 돌아왔을 때 핸드폰이 따뜻하였다. 부모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아이가 갖다 놨었다. 죄는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가르치면 오히려 그르치는 것이다. 에덴동산은 완벽했다. 그런데 거기서 죄를 지었다. 죄를 짓는 것에 능숙하다. 아담 이후로 죄는 가속화되었다. 죄를 짓는 도구도 변화되었지만 본성은 같은 것이다. 창세기 6장 6절을 보자. 하나님이 한탄하시는 것이다. 민수기 23장 19절도 보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아픔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심판하시지는 않으시며 아파하시는 것이다. 창세기 6장 7절을 보자. 심판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악상을 얘기하시는 것이다. 창세기 6장 1~2절을 보자. 생육과 번성은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인간은 죄악으로 바꾸었다. 죄는 순기능을 역기능으로 바꾸는 것이다. 심판은 이것을 돌리고 정화하는 작업인 것이다. 우리도 쓰레기를 버린다. 쓰레기는 있어야 할 존재의 목적이 없는 것이다. 냄새가 나고 악취가 나고 균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쓰레기는 존재할 목적이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목적이 있다. 목적과 이유가 없이는 만드시지 않는다. 기대할 이유가 없을 때는 심판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놓치면 쾌락을 추구하며 죄악에 빠지는 것이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도 길을 잃었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삐끗하면 엉뚱하게 변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나 칼 막스, 진화론의 대가 찰스 다윈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론을 만든 어마어마한 공로를 세웠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곳에는 인간의 죄를 부정하는 것도 따라붙는다. 죄를 부정하고 싶어 하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면 죄의 기준도 사라지는 것이다. 죄의 판단 근거와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동성애도 인권이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인권을 다룬다고 하는 미명 하에 동성애 자체에 죄 악성을 다루지 못하게 한다. 죄를 죄로 규정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욕망이다. 공산주의도 죄를 사회학 구조속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인간은 죄를 왜곡하며 합리화한다.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아무렇지 않게 짓지만 양심이 있는 것이다. 양심도 자주 죄를 지으면 마비가 된다. 양심이 없는 것과 비슷하게 된다. 자기가 짓는 죄가 죄인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죄가 왜곡을 시키면 급속도로 끝을 향해 가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창조되지 않았다면 동물 수준으로 가는 것이다. 2절을 보자.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가인의 후손과 섞이는 것을 얘기한다. 비정상적인 결혼에 대한 심각성이다. 그 시대의 집단적 흐름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자손과 섞이는 것이다. 결혼할 때 매력을 찾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야곱도 라헬을 보고 7년을 하루같이 일을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성적 매력만 보고 결혼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왜 이 부분을 말하고 계시는가? 인류 역사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할 때의 파괴가 가정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도 마찬가지다. 비정상적인 사회는 비정상의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정이 미래의 어떻게 되는 지를 알려주는 징조인 것이다. 한 가정의 거룩 성이 결혼에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성의 신성이 부모에서 무너지면 다른 것은 볼 것이 없는 것이다. 신자와 세상의 구별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세속화라고 얘기한다. 하나님은 섞는 것을 싫어하신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도 칠족을 멸하라고 하셨다. 죄의 심각성과 파괴적인 것을 아시고 같이 망하게 됨을 아시는 것이다. 죄의 오염도가 굉장히 높은 시대에 살고 있다. 극심한 혼란은 명확한 기준이 없음이다. 죄의 기준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갈 때까지 가는 것이다. 신자도 세상과 다르지 않을 때 굉장히 위험한 것이다. 동성애가 무섭지만 꼭 그것 때문이 아니라 세속화 때문에 더 심각한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동성애 때문에 망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으며 의인이 없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롯의 자녀들도 세속화되어버렸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렇지 않은 사람과 똑같다면 하나님께서 기대할 것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면 심판밖에는 없는 것이다. 신자의 거룩 성은 생명이며 거룩을 잃으면 끝나는 것이다. 창세기 6장 4절을 보자. 네피림은 고대의 명성 있는 자들이다. 인간의 자랑을 얘기한다. 이것을 극대화하는 것이 창세기 11장에 바벨탑 사건이다. 성을 하늘까지 쌓으며 자기들의 이름을 자랑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랑은 하나님의 반역이 따라붙는다. 인류의 문명도 마찬가지다. 뉴욕의 9.11 테러를 보면 미국의 교만을 볼 수 있다. 성적인 타락은 인간의 교만이다. 교만은 하나님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무섭게 다루시는지 알 수 있다. 대적하시며 없애버리는 것이다. 교만은 자기 숭배이며 대적인 것이다. 교만하면 남 얘기를 듣지 않는다. 세상이 그렇다. 누가 더 높아지는지 사족을 다한다. 죽고 죽이는 것이다. 자기 이름에 생명을 건다. 죄 중에 죄가 교만이다. 점점 더 교만하다면 끝이 나는 것이다. 교만이 무서운 것이 경고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 망하는 길인 것이다. 창세기 6장 5절을 보자. 인간의 마음과 계획이 항상 악하다. 인간의 속성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 자체가 부패한 것이다. 신문을 보면 가끔 경악한다. 이것도 작은 표출에 불과한 것이다. 부패한 상태이며 항상 악을 생각한다. 죄의 계획은 악한 것에서 나온다. 구정물과 같은 것이다. 성경은 매우 의도적으로 말씀하신다. 인간은 매우 치밀하고 계획적인 것이다. 심판이 임하는 것이다. 심판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시점이 중요하다. 죄를 지을 때 다분히 의도적이다. 어떤 죄가 드러났을 때는 초범이 아니다. 마음으로 수없이 예행연습을 한다. 관찰하며 죄를 지으며 갈고닦는다. 인간의 욕망은 중간지점이 없으며 파멸에 이른다. 죄가 시작되면 볼륨을 올리며 빈도가 잦아진다. 죄로 망하는 것은 어떤 죄 때문이 아니다. 수많은 죄가 쌓인 결과이다. 우리의 비극도 우회의 사건이 아니라 돌발 사건이 아니라 불순종이 축적되어 그 사건이 터지는 것이다. 심판의 목전에도 회개가 없다. 가롯 유다를 보자. 스승을 팔고도 회개는커녕 자살로 마무리하였다. 우리가 매일 목격하는 모습이다. 우회로는 없다. 하나님은 외통수라고 하신다. 죄의 가속도는 누룩과 같다. 밀가루 반죽의 누룩을 넣으면 부푼다. 우리는 죄가 창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죄의 둑이 터지고 파도처럼 몰려온다. 구체적이고 담대하게 지으라고 부추긴다. 광고, 신문, 매스미디어를 통해 충실히 본능을 터트리라고 한다. 은혜의 강도를 높이지 않으면 이겨낼 재간이 없다. 하나님은 철저히 오류가 없으며 전지전능하시다.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이지 않으시며 완전무결하시며 오래 기다리신다. 심판을 미루심이다. 사실 우리도 지금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이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자비를 베푸시며 눈을 감으신다. 주일설교를 들을 때 "제발 그만해~"라고 하신다. 곁에서 사인을 주신다. 돌아올 순간을 기대하시는 것이다.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시듯 하신다. 하나님은 오래 기다리시지만 하나님은 심판 날이 오면 실행하신다. 죄악이 가득한 시대에서도 한 장면이 들어온다. 8절을 보자.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도다. 다 망하고 끝나는 시대에서도 은혜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6장 가운데서 8절은 영롱하게 빛난다. 노아가 심판에서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노아는 은혜의 빛줄기를 보았다.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 띈 것이다. 그 시대 백성과 다르게 살았기 때문이다. 9절을 보자.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이다. 그 시대를 거슬러 살은 것이다. 그 시대의 방식과 세속화를 피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바르게 살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하나님의 은혜에 이끌려 살아서 그런 것이다. 은혜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의 줄기를 붙들며 동행한 것이다. 우리도 우리 힘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세상을 역류할 힘이 생긴다. 세상의 악은 지금도 기승을 불이며 영향력이 어마어마하다. 청년들을 보아도 느낄 수 있다. 죄의 열기에 빨려 들어간다. 속수무책이다. 은혜를 붙들어야 한다. 죄인 이어서 자포자기하면 안 된다. 얼마든지 은혜를 붙들면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죄는 강렬하지만 은혜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널빤지와 송사리 얘기가 좋다. 널빤지는 강물에 떠내려 간다. 아무리 커도 떠내려 간다. 그러나 송사리는 아주 작은 몸집에도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복음이 들어온 이후 예수의 생명이 흐른다. 이제는 죄와 갈등하며 시름하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기는 수준에 이르는 것이다. 로마서를 읽어봐도 그렇다. 로마서 8장을 보면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을 이기는 것이다. 기가 막힌 성경에서 빛나는 부분이다. 죄의 권세를 이기고 성령의 법이 죄를 다스린다.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는 약속을 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5장 21절을 보자. 우리를 승리케 하시는 것이다. 그 은혜의 힘이 왕 노릇 하여 영생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를 알기 전에는 죄가 왕 노릇 하였다. 대책이 없었다. 겉으로는 포장이 되어있는데 그 안에 죄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은혜의 시대이다. 은혜를 받기 원하는 자는 폭포수처럼 받을 수 있다. 영권 회복 집회에 은혜가 넘쳤다. 다르게 사는 힘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죄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갈보리 언덕에서 죄의 실체를 본 사람은 구토한 흔적처럼 여기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를 바꾸는 것이다. 흰 옷 입은 사람은 뭐가 조금만 묻어도 씻어내고 싶은 것이다. 조그만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거룩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이다. 거룩한 사람은 더더욱 거룩해지고 타락한 사람들은 더더욱 타락으로 달려가게 된다. 마지막 시대인 것이다. 노아처럼 은혜를 구하며 다른 길을 걸어서 구원에 이르러 승리하는 백성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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