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3장 26~27절
우리 신앙의 과거를 돌아보면 가장 많이 슬펐던 때가 가장 행복한 때였다. 은혜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첫사랑이 아니더라도 일생 중의 하나님의 특별한 때가 있었을 것이다. 많은 눈물을 흘렸던 때인 것이다.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죄와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가기 부족한 자신의 때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격 안에 기쁨과 슬픔과 같이 담길 수 없지만 영적인 세상에서는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기쁠수록 눈물 흘리는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다. 눈물로 찬송과 성경을 읽으며 눈물이 떨어지기도 하였다. 이처럼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누리던 때인 것이다. 이 지상에서 한 성도가 하나님을 향해 가장순수한 때는 어떤 때인가? 한 성도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순수한 때는 바로 참회의 눈물을 흘릴 때와 사랑과 은혜가 너무 크지만 내가 미천해 보이는 그때이다. 바로 그 순간에는 하나님이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받아들일 순종의 준비가 되어있고 이 세상의 있는 것들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간인 것이다. 영국의 찰스 스펄전 목사는 "성도의 마른눈으로는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다"라고 하셨다. 원래 십자가는 죄를 지은 사람을 죽이는 집행방법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죄인 이어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빌라도 앞에서 사형 언도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있지 않다. 죄가 없으신 분이며 처음부터 죄를 지을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를 못 박아 백성들을 선동하였다. 법을 모르는 우리가 보더라도 잘못된 재판인 것이다. 재판이라는 것은 죄 있는 사람을 벌주는 제도인데 예수님은 죄가 없다. 예수님은 무슨 나쁜 일을 하였는가? 병든 자를 고치시고 무지한 자들을 말씀으로 깨우시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도 하셨다. 그뿐 아니라 법은 죄 없는 사람을 판결하지 않는 것이 동서고금의 법칙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짓 정죄를 받으셨다. 빌라도 조차도 무죄를 확신하였지만 선동에 의해 정죄된 것이다. 옳은 것을 따라 바르게 살라고 하였던 예수님은 사형판결을 감당하셔야 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는 억울하게 사형 언도를 받아 십자가를 지셨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죄인들을 용서하고 화목하게 하시기 위한 지혜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모함받아 십자가를 지셨지만 흠 없던 하나님의 아들이 진노를 받아 죽임을 당하므로 구원받을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지혜 있는 자들에게 감추어졌던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라고 물었다. 하나님의 팔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인 것이다. 사실은 그분이 십자가를 지실 어린양이며 구원받을 우리에게 임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십자가의 형벌은 인간이 고안해 낸 것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이었다. 이 사형 방법의 중요한 특징은 사형받은 죄수가 사형받을 고통의 최대 고통을 끌어내는 것이다. 십자가 형벌은 대개 사형 언도가 주어진 후에 이루어지는데 두 가지 규례가 있었다. 하나는 채찍을 맞는 것이다. 채찍은 특별했다. 당시 이 죄수에게 다루어진 채찍의 모습은 아홉 가닥의 채찍 끝에 금속 부착물이 있었고 내리치면 살점이 떨어졌다. 두 번째는 자기 십자가를 스스로이고 가야 했다. 약 150~180kg이었다. 가시면류관을 쓰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셔야 했다. 두 손을 나무에 박고 세로 막대를 세우고 도르래를 이용해 가로 막대를 들어 올렸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십자가에 매달리기 위해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던 것이다. 많은 살마들이 예수님을 뒤쫓았다. 당시는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모였으며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인지가 뉴스거리였던 것이다. 물 위를 걷던 예수가 자신을 위해서도 기적을 행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은 이미 기력이 없었다. 그래서 가시는 길에 계속 쓰러지셨을 것이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시기 전부터 과정을 생각해 보자.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보내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고 사랑하던 제자에게 배신당하셨다. 심문당하셔서 빌라도에 끌러가셔 헤롯에게 끌려가시고 빌라도에게 끌려오시고 구타당하시기까지 하셨다. 밤새도록 그 고통을 당하시고 재판을 당하셨다.
왕궁 수비대에서 수많은 군병에게 조롱당하시고 벌거벗기셨고 채찍을 당하시고 고통을 당하셨다. 십자가를 지시다가 계속 주저앉으셨다. 억지로 지신 것이었다.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을 사랑해서 진 것이 아니었다. 이후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헌신하여서 인도에서 순교하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실 때 항상 기뻐하는 것만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사명을 발견하지 못한 때도 있었다. 주권적으로도 쥐어 주시는 것이다. 사람이 깨닫는 것이다. 억지로 받은 집사 직분 때문에 떠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봉사하다가 하나님을 만난다.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예수님이 골고다로 올라가실 때 많은 사람이 따랐다. 그 사람들은 남녀모두 섞여서 예수그리스도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두 부류로 나누는 것이다. 첫 번째는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누구인 것인가? 우리가 성경을 보고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방관자로서 구경하며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오르실 때 구경하면서 따르는 구경꾼이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를 들었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보리떡을 먹이실 때에 거기에 함께 있어 주린 배를 채우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질병에 걸렸을 때에 고침 받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뿐 아니라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에 종려나뭇가지를 흔들며 외치던 무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싸늘한 마음으로 피 흘리며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그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일까? 예수님이 어떤 잘못이나 과오가 있었나? 그분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을 버리고 낮고 낮은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 세상을 창조하셨던 분이었어도 구유에 누워 이 땅에 오셨다. 결핍과 고난에 생애 이셨다. 허드렛일로 30년을 보내셨다. 가난과 굶주림으로 보내셨다. 고달픈 생애였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목마르셨기 때문이셨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무슨 나쁜 짓을 하였는가? 의사가 되셨으며 선지자도 되셨고 고독한 자들에게 친구가 되셨다. 티끌만큼도 당신의 생애가 아니셨다. 액체의 생애셨다. 땀 흘리셨던 생애셨다. 휴식도 없이 고단한 연대기였다. 병든 자들과 주린 자들을 먹이셨다. 섬김의 생애셨다. 눈물의 생애셨다. 통곡과 눈물로 생애를 보내셨다. 신앙이 무엇인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그리스도 앞에서 누구인지 깨닫는 것이다. 창조하신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나는 하나님을 모르고 산 죄를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산 모든 날들이 고통과 시련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나를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엎드려 이제는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신앙의 시작인 것이다. 오늘 주님 앞에 모인 우리들을 위해 살을 찢고 죽으신 십자가의 그분 때문에 울어 본 적이 있는가? 1907년 평양에 대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1904년 인도에서 큰 부흥이 있었다. 존 스토드 목사가 방문한 적이 있다. 골목에 아이들이 울고 있었다. 선교사 물었다. "왜 울고 있니?"라고 물었다. "아저씨, 우리가 우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아 울고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육체의 수많은 유혹과 정과 욕심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생각하자. 흠도 티도 없는 그분이 십자가에서 찢겨 고난을 당하시고 옆구리에 창을 찔려 물과 피를 모두 쏟으신 그것이 이 세상의 죄악 때문인 것이다. 오늘 이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죄를 짊어진 것이다. 오늘날 이 시대의 냉담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이다. 주일날 예배에서 감격을 간직하는 교인이 얼마나 될 것인가? 진정으로 깨닫는 자들이 아닐 수 있다. 이 백성들을 보십시오. 병든 자가 일어나고 치료하시는 것도 보았고 나사로를 살리신 것도 보았다. 보리떡으로 먹이신 것도 보았다. 산상수훈도 들었다.
놀라운 경험이 영혼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변화시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의 죄를 위한 것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진정한 회개가 이 시대에 있는가? 부자일 때도 아니며 고생할 때도 아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회개할 때이다. 이천 년 전 고난의 아픔이 스며들었을 때 신자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이 백성들에게는 없었다. 아주 차갑고 냉담한 마음으로 고난당한 그리스도의 뒤를 따랐다. 달 때는 담고 쓸 때는 뱉었다. 두 번째는 여자의 큰 무리였다. 이들 중에는 갈릴리로부터 내려오는 이도 있었다. 칼빈 선생은 "이 여자들도 부활하실 것은 몰랐다"라고 하였다. 이들은 울부짖으며 따랐다. 예수님이 홀로 되셨을 때 제자들 조차 살기 위해 도망갔을 때도 이들은 통곡하며 따랐다. 피투성이가 되셨어도 여인들은 통곡하였다. 타는 목마름으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실 때도 이들은 더 슬프게 통곡하였다. 그들의 울음소리는 핏빛 통곡으로 바뀌었다. 이 차이는 무엇인가? 이 여자들은 더 큰 기적을 보았기 때문인가? 차이는 오직 하나이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이 여자들은 묻고 싶을 것이다. 예수님이 무엇을 잘못하셨는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뿐이었다. 만일 내가 대신 지을 수 있다면 대신 지고 싶다고 울부짖었을 것이다. 사랑의 차이가 이것을 만들어낸 것이다.
강도들과 같이 치욕스럽게 당 아시는 것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예수님과의 추억도 생각해 내었을 것이다. 버림받았던 나에게 오셔서 섬기시더 것, 무지하신 나를 감미로운 목소리로 가르치시는 모습들과 발을 씻기시던 모습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 모든 섬김의 동기는 사랑인 것이다. 주님이 고난을 당하실 때 구경하며 따라갈 수 없었다. 그분의 십자가는 내 십자가이며 그분의 고난도 내 고난이고 그분의 죽음도 내 죽음이었을 것이다. 우리 선조들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였던 정신은 종말과 십자가 정신이었다. 일사각오의 신앙인 것이다. 물질의 풍요로움과 경제적인 번영 속에서 선조들의 본질과 멀어지지 않았는지 되물어봐야 한다. 우리에게도 이런 사랑이 있는가? 고난과 천대의 길을 가셔도 우리는 따를 수 있는가? 이 여인들은 예수님을 충심으로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통곡할 수밖에 없던 광경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다. 그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다. 십자가 고난의 정신으로 교회 한 구석에서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골고다 언덕이 가까이 오면서 더욱 슬피 울었지만 예수님은 못 박히셨다. 그 친절한 손은 못 박히시고 예수님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박혀 피가 온 얼굴로 흘러내렸다. 갈릴리 유대땅 사마리아까지 다니시던 팔에는 뼈가 드러났다. 그분의 심장은 옆구리로 들어온 창에 의해 폐를 관통당하셔서 터졌다.
요한이 예수님의 피와 물이 다 흘렀다고 고백하였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였고 모두를 사라지게 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 흔적은 교회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삶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구경꾼이며 어떤 사람은 눈물 흘리며 따라가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이 땅에서 오래도록 지속되는가? 지나온 생애는 우리가 잘 몰랐기 때문에 철없었지만 이제는 주를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모퉁이에서 피 묻은 그리스도의 손을 붙들고 그분이 엎드리신 자리에 우리도 울고 섬기다가 죽으신 그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고난의 길을 걸어가자. 이게 바로 예수님 만난 사람들의 신앙이다. 이겨나가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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