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함

Q.T/C.S.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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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일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걱정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 여기는데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네. 그건 고통거리지 죄가 아닐세. 모든 고통거리가 그렇듯, 우리가 잘 감당하기만 하면 걱정도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일이 된다네.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작, 그 첫걸음은 겟세마네에서 일어났잖은가. 겟세마네에서 아주 이상하고 중요한 일이 벌어졌네.

우리 주님이 하신 여러 말씀을 통해 볼 때, 그분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음이 분명하네. 주님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자신처럼 행동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아셨어. 그러나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기 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이 지식이 그분을 떠난 것이 분명하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단서를 달았다고는 해도, 잔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임을 아셨을 수는 없어. 그것은 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야.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겠나? 인류가 당하는 어떤 시련도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을까? 십자가를 앞둔 마지막 순간, 주님께 긴장과 염려가 찾아왔네. 희망을 품을 때 찾아오는 고통들이지. 주님은 그 극한의 공포를, 어쩌면 혹시라도 면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품게 되신 거야. 선례가 있었거든. 바로 이삭이네.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그것도 마지막 순간에 이삭은 목숨을 건졌네. 그런 일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란 말이겠지……. 그리고 주님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보셨을 거야……. 대부분의 종교화나 이미지가 표현한 것과는 전혀 다른 끔찍한 장면이었겠지.

이 최후의(그리고 틀린) 실낱같은 희망과 그에 뒤따른 영혼의 동요, 핏방울 같은 땀이 없었다면, 주님은 참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네. 완전히 예측 가능한 세상에서 사는 것은 인간의 삶이 아니니까.

마침내 천사가 주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comforting)”는 말씀이 있네. 16세기에 쓰인 comforting이라는 영어 단어나 그리스어 엔니슥쉬온(?)은 ‘위로(consoling)’라는 의미가 아니네. ‘강화(strengthening)’가 더 적절한 의미라고 볼 수 있지. 여기서 강화함이란 다가올 상황을 감당해야 한다는 필연성과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는 뜻 아닐까? <개인기도>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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