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
사람마다 인생의 전환점이 있다. 사람마다 몇 번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제 인생에 있어서 중학교 2학년은 특별했다. 은혜받고 기쁨을 경험했었다. 그 밤에 은혜받고 나무 잡고 기도했었다. 또 하나는 다니던 교회를 떠나는 일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 이후에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교회를 개척하셨었고 부교역자로 일했었다. 저에게 인생 전환의 시점에서 가장 빠른 타임은 중학교 2학년이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다윗에 생애의 전환의 한 부분을 살펴보자. 최상의 환경을 찾았지만 국가적 망신을 당하면서 최악의 상황에 빠지는 부분이 있었고, 최하의 환경이지만 고독한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왕으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부분이 있었다. 두려움의 옷을 벗기를 바란다. 그의 내면에 하시는 말씀이 있다. 다윗에게 요구하는 것도 있다. 사실은 같은 한 가지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라!" 개인의 모든 가정들이 납작 엎드리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란다. 첫 번째는 다윗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자.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갈 수 있는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쟁자인 아기스에게로 갔다. 그의 두려움은 증폭되고 있었다. 심리적인 궁지에 몰리면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잘못된 결정도 내린다. 이스라엘 안에서 벗어나 사울이 없는 곳으로 간 것이다. 의탁을 하면 용병으로 받아주는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다윗이 가드로 도피를 한 것은 실수였다. 아기스 왕의 신하들은 그를 비난했다. 다윗을 너무 잘 알았다.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했다. 그래서 미친 척을 했다. 목숨이 달렸기 때문이다. 아기스 왕은 속았다. 다윗의 승리였다. 가드 땅을 잘 빠져나왔다. 그렇지만 다윗은 하나님 앞에 묻고 인도함을 받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묻는 것은 빼놓지 않고 하여야 한다. 또한 두려움이 우매하게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으로 갔다는 것은 우매한 행동인 것이다. 전도서 7장 7절에는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한다"라고 나와있다. 두려움에 압박이 시험 들게 한 것이다. 더 심한 두려움을 맞은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다 내려놓았다. 세상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이 시험에 들게 할 수도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빠져나와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거저 주시지는 않는다. 지혜를 주실 때 마음의 결단을 해야 한다. 그래야 구원의 역사를 완성시켜 주시는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어떻게 해야 할까? 사명자의 삶이 있는 것도 아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자존심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자존심은 남에게 굽히지 않고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이다. 세상 앞에서도 자존심 세워야 하는 일도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필요 없는 것이다. 그것은 교만이다. 하나님이 원치 않으신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은 더 이상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다윗이 아기스 앞에서 자존심을 내려놓지 않았다면 생명이 거두어졌을 것이다. 지난 주일 10년 만에 오신 성도에게 전화를 짧게 걸어 얘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계속 나오실 여부를 물었을 때 "저의 본 교회는 송원교회입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모든 자존심을 다 내려놓았음을 느꼈다. 자존심을 내세우는 신앙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다. 상처 준 사람이 떠오르고, 모욕을 준 교회 돌아보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정서적으로 계속 영향을 주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의지한다면 사람을 의지하고 있는 신앙이 맞다. 하지만 누군가 상처를 주어서 내가 하나님에게 엎드리지 못하면 이 사람도 역시 사람을 의지하는 신앙 관인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살려달라고 엎드린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아기스를 속일 수 있었겠는가? 시편 34편에는 자존심을 다 내려놓은 구절이 나온다. 세상의 모든 두려움이 엄습할 때 납작 엎드렸던 것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을 때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자. 다윗처럼 고백하자. 다윗이 아둘람 굴로 갔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알 수 있다. 이 은신처에서 얼마나 위로를 받았겠는가? 샘이 솟는 물이 있었고 그렇지만 오랜 시간 머물 수는 없었다. 스펄전 목사님은 기도를 위한 골방이라고 표현하였다. 아둘람 굴에서의 기도는 시편 142편과 57편에 기록되었다. 다윗이 여호와께 집중하는 모습이다. 다윗은 영혼이 상함 가운데 있으며 올무가 있는 것을 얘기한다.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 아둘람 굴의 캄캄함과 같지만 "주는 나의 피난처시며, 분깃이시라." 시편 142편과 같이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사울에게서 떠난 이들이 다윗에게 찾아왔다.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보내주신 것이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이들인 것이다. 아둘람 굴이다. 경제적으로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을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이셨다. 400명가량이었다. 사람의 숫자는 여자와 아이들을 빼고 나온 것이다. 600명가량이 되었을 것이다. 시글락이라는 땅을 받았다. 이들과 새로운 시대를 열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가 되었다. 이들은 양식 구하기도 쉽지 않았지만 5만 번의 기도응답을 받았던 조지 물러 처럼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다. 그 공동체가 굴 안에서 무엇을 하였을까? 다윗이 하나님에 말씀으로 조언하고 문제에 해결책을 권면했을 것이다. 공동체 안에 하나님에 말씀이 있었다는 것이다. 시편 57편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것이 있다. 고백하였다. 다윗은 실제로 세상의 영광과 권세는 없지만 하늘의 놀라운 보화를 받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필두로 공동체가 세워졌다. 다윗이 계획한 것이 아니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비결은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고 말씀이 역사하는 것이다. 비결이다. 병들어 죽지 않은 것은 공동체였기 때문이며 말씀으로 인도받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 아둘람 굴과 같이 사람을 피할 수밖에 없고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는 신앙을 갖춘다면 놀랍게 역사하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곳에 수많은 영혼이 있기 때문인 줄 믿는다. 새 주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도하여 주실 줄 믿는다. 고린도전서 1장 29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는 자의 신앙을 가진 이들을 사용하고 맡기심을 얘기하신다. 교회는 아둘람 공동체로 쓰임 받아야 한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성령의 공동체, 생명의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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