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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회개자만 줄 수 있는 도움

Q.T/C.S.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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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1일

이 회개, 즉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며 일종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로 찾으시기 전에 먼저 요구하시는 사항이 아닐 뿐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면제해 줄 수 있는 일 또한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회개란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표현법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고 당신께 돌아가게 해 주소서”라고 구하는 것은 “당신께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돌아가게 해 주소서”라고 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일은 당연히 일어날 수 없지요.

자, 그렇다면 우리는 반드시 회개를 거쳐야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회개의 필요성을 주는 그 악함이 동시에 우리를 회개할 수 없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회개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대체 어떤 뜻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겁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은 이를테면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조금 넣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의 추론 능력을 우리에게 조금 빌려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조금 넣어 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아이에게 처음 글쓰기를 가르칠 때, 아이의 손을 붙들고 함께 글자를 씁니다. 그러니까 그 글자가 쓰이는 것은 여러분이 그것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사랑하고 추론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추론하시기 때문이며, 그가 우리 손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2장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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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란 무엇인가?

Q.T/C.S.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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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누군가 곤경에 빠졌는데 그를 곤경에서 건져주는 일은 인정 많은 친구의 몫이 되는 상황을 다들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인간이 빠져 있는 ‘곤경’이란 어떤 것일까요? 스스로 독립적인 위치에 서려고 한 것, 스스로 자기의 주인인 양 행세하려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락한 인간은 개선해야 하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니라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입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면서 잘못했다고 하는 것, 그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왔음을 깨닫고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는 것, 이것이 이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렇게 항복하는 과정-전속력을 다해 뒤로 도는 동작-을 그리스도인들은 ‘회개’라고 부릅니다. 회개는 장난 삼아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히 굴욕을 감수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수천 년간 익혀 온 자기 민족과 자기 의지를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것, 일종의 죽음을 겪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회개는 선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정작 회개가 필요한 사람은 악한 사람인데, 완전한 회개는 선한 사람만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여러분이 약해질수록 회개의 필요성은 점점 커지고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은 점점 적어집니다. 완전하게 회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완전한 인간-회개할 필요가 없는 인간-뿐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2장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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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하나님께 다가서기

Q.T/C.S.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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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9일

사람들은 추상적이고 소극적인 신을 생각하던 것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으로 옮아가기를 꺼립니다. 당연합니다.……범신론자들의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존재,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런 하나님은 그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단지 선반 위의 책처럼 존재할 뿐입니다. 그는 여러분을 따라다니며 괴롭히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그의 명령에 하늘과 땅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염려도 없습니다. 만일 그런 범신론의 하나님이 진리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왕으로 묘사하는 모든 기독교적 이미지들은 그저 역사적 우연에 속하는 것으로, 이제 우리 종교는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충격적 이게도 우리는 그런 이미지들이 필요 불가결한 것임을 발견합니다. 여러분은 전에 더 작은 일들과 관련해서 이런 충격을 느껴 봤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잡고 있던 줄이 갑자기 반대쪽에서 당겨질 때, 어둠 속에서 무언가 옆에서 숨 쉬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와 같은 경우에 말입니다. 여기서도 그렇습니다. 무언가 실마리를 따라가다 어느 순간 예기치 못한 생명의 떨림이 전해져 오고, 그 순간 우리는 충격을 받습니다. 혼자 있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살아 있는 존재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충격을 줍니다. “저기 봐!” 우리는 소리칩니다. “저게 살아 있어.”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로부터 뒷걸음쳐 물러납니다. 할 수 있다면 저도 그랬을 것입니다.

어떤 ‘비인격적인 하나님’, 이는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있는 주관적인 진선미의 하나님, 이는 사람들이 더 좋아합니다. 우리를 관통해 요동치는 어떤 무정형의 생명력, 우리가 끌어다 쓸 수 있는 방대한 힘으로서의 하나님, 이는 사람들이 최고로 좋아합니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 반대쪽에서 줄을 끌어당기시고, 무한한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추적자, 왕, 남편으로서의 하나님, 이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도둑 놀이를 하고 있던 아이들이 갑자기 조용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방금 현관에서 난 저 소리, 혹시 진짜 사람 발자국 소리는 아닐까?(‘하나님을 찾는 인간!’ 운운하며) 그저 종교를 가지고 장난쳐 왔던 사람들이 갑자기 뒤로 움찔 물러서는 순간이 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는 정말 그런 것을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더 나쁜 경우로, 만약 그분 편에서 친히 우리를 찾아온다면? <기적> 11장 기독교와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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