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1 주일예배

Q.T/은혜샘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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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오늘이 삶에 마지막이라면 무엇을 후회할 것 같나요? 돈이나 명예가 아니겠지만 임종의 순간을 맞이한 다른 사람의 깨달음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호주의 말기 암환자를 돌봤던 간호사 브로니 웨어라는 사람이 자신의 블로그를 모은 책 "죽을 때 후회하는 5가지"를 보자. 첫 번째는 "내 뜻대로 한번 살아봤다면", 두 번째는 "일 좀 적당히 하며 살 것을..", 세 번째는 "내 기분을 좀 더 솔직하게 했었더라면.."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 것이다. 네 번째는 "오래된 친구들과 좀 더 가깝게 지냈을 것을.." 수소문했을 때는 친구들의 연락처조차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지막은 "좀 더 내 행복을 위해 도전해 볼 것을.." 평생 행복을 위해 노력하지 못하였다. 변화롭게 삶을 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모든 사람은 이 땅 마지막 순간에 이런저런 후회를 할 것이다. 후회가 없는 사람은 없다. 오직 한 사람만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도다." 성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남김없이 이루셨다. 모든 후회와 원망의 자리로 가셨으며, 3일 만에 부활하셨다. 우리는 소망이 있다. 주일은 우리가 언젠가 부활할 것을 소망하며 찬양하며 기뻐하는 날이다. 그분이 우리 부활의 첫 열매이시다. 그래서 후회 없이 살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그분의 소원을 내 소원으로 삼고 영생을 위해 사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주의 십자가의 은혜로 돌아오는 것이다. 참 평강을 덧 입고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한 자로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는 자로 서로 사귐이 있게 하는 것이다. 교회이다. 하나님의 나라. 거룩한 공동체. 이 일의 부활의 증인으로 부르신 것이다. 방황하는 사람에게 사명자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가장 보배롭고 영광스러운 사명임을 알 때 후회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하신 목적도 이것이다. 배현규 목사님은 그 소망에 대하여 책상 위에 이런 글을 적으셨다. "온전한 헌신은 마지막 것을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백대로 마지막 것을 드렸다. 순교하셨다. 왜 그런 것인가? 그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후회 없이 남김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순교는 그렇다. 내가 받을 몫을 계산하지 않는다. 되값을 수 없는 사랑을 받았으니 내어 주는 것이다. 오직 복음 때문이다. 오직 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은혜이다. 마지막을 드리는 자는 영원한 나라에 약속을 두는 자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자.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계산한다. 이 만큼 희생하면 나에게 뭔가 돌아오지 않아야 하지 않느냐고.. 왜 우리는 거짓말할까요? 사랑하지 못할까요? 이기적으로 살까요? 팀 켈러 목사는 약하고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우상이다. 그 우상은 온전한 헌신을 돌아서게 만든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힘과 영향력을 끼쳐야만 가치 있게 만든다고 한다면 인정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다. 즐거움과 삶의 질을 느낀다면 나는 지금 편안함과 물질주의의 우상에 빠진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돕고 필요로 해야만 삶의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면 도움 우상에 빠진 것이다. 내가 생산성이 많고 많은 일을 이루고 내 직장에서 탁월해야만 한다고 여긴다면 일과 성취 우상에 빠진 것이다. 심지어 열심히 종교적 신념으로 종교활동을 해야만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신다고 느낀다면 종교 우상숭배에 빠져있을지 모를 일이다. 더 긴장할 것은 더 고난 받고 어려움을 겪어야만 사랑받아야 할 가치가 있고 하나님 앞에서 죄책감에 줄일 수 있다고 느낀다면 이것도 우상숭배라고 보아야 한다. 고난조차도. 우리는 순교 주일을 지킬 때 순교자를 영웅으로 만들면 안 된다. 배현규 목사와 심성민 형제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이 모든 우상숭배는 온전한 헌신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우리의 마지막 것도 우리 것이 아니다. 내 것이 아님을 인정할 때 마지막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마지막 것을 드리는 온전한 헌신은 우상을 돌이켜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리로 나아오는 것이다. 하나님 채움의 자리에 성령의 열매가 순교인 것이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온전한 헌신인 것이다. 대학교 때 선교 사랑방을 만들어 섬겼다. 저는 배현규 목사의 후배이다. 2층 침대를 써 보았나요? 아침에 2층 침대에서 내려오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런데 방을 들어선 순간 놀랐다. 배현규 목사가 먼저 2층에 올라갔다. 1층은 네가 써라. 2층은 내가 쓸게. 그것이 배 목사의 한결같음 이셨다. 자기가 먼저 감수하셨다. 뒤따라 가는 사람들 입 벙긋 못하게 만드셨다. 너무 자연스러웠다. 주변을 자유롭게 하셨다. 기숙사 사랑방 전원이 장학금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참 감사하였다. 결국 전부 성적장학금을 받았다. 이 일에 또 한 명의 증인이 저 뒤에 앉아계신다. 25살 늦은 나이에 대학교 3학년 때 결핵에 걸렸다. 휴학했다. 나라가 정해놓은 전염성이기에 군대에 제외되었다. 독서 총무로 어렵게 공부했다. 학생 가르치는 것도 법으로 금지되었었다. 과외 안 하고 독서 총무로 고생하였다. 배현규 목사가 10만 원을 저에게 쥐어 주셨었다. 그립다. 장로회 신학대학원 시절에도 배 목사는 유명했다. 어려운 이들을 돕는가 하면 10년째 떨어져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위해 지도하셨다. 샘물교회 개척 멤버로서 뒤따라 가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부를 수 없다는 것이 미안함으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다시 말씀을 보면 솔로몬이 지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르지 않다. 다윗의 일상의 순종이 나은 열매이다. 성전 짓기를 바라는 것은 솔로몬 이전에 다윗이었지만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장소였기에 거룩한 통로여야 했다. 그러려면 그 짓는 손이 평화의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나 다윗은 피를 묻힌 사람이었다. 다윗에게 허락하지는 않으셨다. 다윗이 이 말씀 앞에 고집부리며 하나님께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지 않았다면 솔로몬에게도 허락지 않으셨을 수 있다. 배 목사님의 쌓인 일상에 말씀을 이룬 순종이 헌신의 열매를 이룬 것이다.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이라 부르지만 약속하신 내용은 다윗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을 짓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성전이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우리가 지어야 할 것이다. 그 성전은 예수님 자신이다. 몸 된 지체인 우리가 예수님이 거하시는 성전인 것이다.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다. 솔로몬은 "드디어 내가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구나." 그다음은 무엇일까? 칭찬일까? 눈에 보이는 성전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명심하라. 하나님이 소망하는 것은 말씀에 따라 순종하여 따르는 것이다. 자신의 백성이 순종하며 자리로 나오기를 소망하셨다. 하나님은 이동식 천막이든 거대한 성전이든 언제나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온전한 헌신은 짓기 이전에 이스라엘이 성전으로 지어지는 순종인 것이다. 이집트에서 부르실 때 약속하신 언약인 것이다. 그 복이 이 백성이 제사장 나라로 온 민족의 참 하나님이시고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구별하신 것이다. 가끔 어떤 분들은 "왜 우리가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 반문하신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삼으셨을 뿐이다. 이스라엘을 말이다. 거룩한 사명을 깨달아야 한다. 그 거룩한 사명의 부르심을 위해 부르신 것이다. 그 당시 피라미드도 세워졌다. 성전은 지금 가치로 1조 원의 가치다. 결코 한 건물에 쏟아부을 가치가 아니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그 성전에 하나님이 거하시기에는 부족하다."라고 표현했다. 솔로몬은 거기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도 응답하시기 바랐다. 그러나 하나님은 응답하시자 않으셨다. 거룩한 소명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성전을 통해 복된 것을 순종으로 드리길 바라셨다. 솔로몬은 교만해졌다. 성전의 제사는 이동형 제사와는 성대하고 화려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은 자신들만 복을 누려야 한다는 기복신앙에 빠져버렸다. 귀한 헌신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무심함에 빠졌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이 중요하다. 정말 중요하다. 그리스 아테네에 5.0 강진이 발생했다. 선교사의 연락을 받았다. 자신은 부동산 가치만 흔들리는 줄 알았더니 집도 흔들렸다고 하였다. 여진이 있다. 선교사님이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야 하는 것이구나." 만약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여러분 삶에 남은 것이 마지막이며 그것이 은혜의 마지막 흔적일 것이다. 매일 잘 정리하자. 그것이 은혜이다. 앞으로 살 날이 많을지 적을지 알 수 없지만 진정한 헌신은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사는 것이다. 성전에서 언약궤는 지성소였다. 언약궤가 없다면 성전도 껍데기일 뿐인 것이다. 언약궤를 옮기는 과정도 세심하게 기울였다. 언약궤 안에는 모세가 받은 돌 판 2개가 있었다. 아론의 지팡이와 항아리의 담은 만나는 없었다. 의도적으로 강조하셨다. 모세 이후에 아론의 지팡이와 항아리를 우상화했기 때문이다. 놋뱀을 높이 들어 올렸는데 그것도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도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자 히스기야는 그것을 파괴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인 두 돌판은 남았다. 기적과 이적은 사라져도 말씀만 영원하다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은 영원의 말씀에 따라 순종으로 채워가야 한다. 기적과 신비한 체험에만 몰두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알아가야 한다. 언약의 기초이다. 말씀으로 사는 자들이다. 그것이 내 힘으로 되는가? 순종할 수 있는 길은 의지와 열심 이전에 영광과 임재가 먼저인 것이다. 제사장들이 성전을 나오자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을 때처럼 자신의 영광 가운데 나타내 보인 것이다. 그들의 주인 것임을 확인시켜주신 것이다. 임재가 있어야 한다. 임재가 없다면 지혜가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임재와 영광을 먼저 구해야 한다. 보아야만 하는 것은 높은 곳에서 율법이나 던져주시는 곤경에서 벗어나라는 메마른 이야기가 아니다. 인생의 시궁창에 내려오신 하나님이시다. 모른 체하시지 않으신다.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성전에 영광이 지금도 함께하심을 말씀하신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함께 하심을 믿자.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런 은혜가 메마르지 않기를. 진리가 충만하기를 바란다. 교회에 영광은 건물이 아니다. 내가 뭔가를 하면 위대해지는가? 프로그램? 사람? 오직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함께 하심을 기억하자. 독생자의 영광만을 자랑하자. 드러내기를 바란다. 자랑할 것은 주안에서의 십자가의 영광뿐이다. 사도 바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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