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기도하라
열왕기상 8장 22~30절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 사원에 있는 마니차라는 기도 바퀴이다. 기도 바퀴가 설치되어 있는데 기도 통 안에는 라마교 경전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지나가며 기도 바퀴를 돌리면 된다. 한 번 돌릴 때마다 경전을 한 번 읽은 것으로 되는 것이다. 한 번 돌릴 때 죄의 업보가 없어진다고 믿는다.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난다고도 믿는다. 사이버 기도 바퀴라는 것도 있다. 자동차에 붙이고 쉬지 않고 돌린다. 그것을 기도라고 주문을 외우며 위로를 받는다. 오늘도 열심히 돌리고 있다. 일본의 신사에서 승려에게 기도를 받으려면 5, 6만 원을 내야 한다. 카드도 받는다. 기도를 시작한다. 겉으로는 정종을 늘여놓고 기도한다. 참배객들은 기도 종이를 잡아서 맨다. 그것들이 벚꽃처럼 나부낀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어떤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갚을 것이라고 기도하지는 않는가? 마치 주고받는 거래처럼.. 거래로서의 기도는 정해진 관습으로 변하게 한다. 위의 다른 기도들과 다르지 않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에게 긴 기도를 올려드린다. 22~30절은 이것의 서론이다. 7가지 청원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용서를 누리게 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솔로몬의 서론에서 기도란 무엇일까? 솔로몬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기도 목적을 찾아보자. 그리스도의 기도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참된 지식과 믿음으로 시작된다. 솔로몬은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였다. 그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하지 못함을 고백한다. 유일한 주권자이심을 고백한다. 세상이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그 안에 사는 모든 인생을 창조하셨음을 간섭하시고 통제하심을 고백한다. 이 믿음도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상대하는 대화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 당연하다고 하였다. 하나님을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누구이신지를 우리 눈높이만큼 알려주시면 이해한다. 그러나 이런 것도 알지 못한 채 기도한다. 우리 스스로가 만든 우상과 나를 기뻐하게 하는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는다. 아담 또한 하나님을 알았다. 모든 시간을 하나님과 같이 하였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그 친밀함은 어렴풋하게 상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회복시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독생자의 영광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게 되었다. 잃어버렸던 거룩한 지식을 회복하였다.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자격도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심을 아는 게 가능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덕이다. 우리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는 유일한 분이시다. 기도해야만 하는 이유인 것이다. 주권을 인정해야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얘기하지만 진짜 주인도 하나님 이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조차 내 만족과 허황된 과시로 만들 가능성도 있다. 참된 지식과 믿음이 없다면 나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의 기도는 신들을 달래서 원하는 것을 받는 것이다. 열심히 무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신실하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무엇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미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다. 솔로몬이 확신한 이유는 하나님이 백성과 맺은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기도하며 나아갈 때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히브리서 11장 5~6절을 보자.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곳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다. 약속 가운데 우리에게 준 은혜인 것이다. 그래서 확신과 약속을 붙들고 기도해야 한다. 솔로몬은 하나님 깨로부터 지키셨으며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루셨다고 하였다. 이루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근거이다. 세상 사람들에 기도가 신에게 바치는 기도가 자신의 지성과 장성의 분량이 근거라면 그리스도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이 근거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다른 종교의 기도 차이는 무엇일까? 모든 종교는 지성이면 감천이다. 모든 결과는 나에게 달린 것이다. 그 기도는 하나님에게 달려있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달려있다. 모든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자기를 믿는 것에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믿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이 없다면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근거이다. 십자가의 은혜이다. 솔로몬은 지금 하나님이 머무실 성전을 지었으니 복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건강, 물질, 자식, 권세를 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받은 복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예배드리는 것이다.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복을 받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섭섭해질 것이다. "이런 것이 예수 믿는 것이라면 난 못하겠다"라고 할 것이다. 산상수훈. 만약 "이것이 복이라면 예수를 안 믿겠다"라고 한다면 아니 이런 고민이 아예 없었다면 둘 중 하나다. 정말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던지 아니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복을 구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다고 이제까지 착각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방인처럼 기도하지 않기를 원하셨다. 그들은 필요로 기도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이 주기도문조차도 주문을 외운다. 바리새인의 문제는 마태복음 6장 5절을 보자. 그들의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된 것이었다. 우리는 많은 기도의 가르침을 받아왔다. 그러나 제대로 된 경건의 모습은 없는 것 같다. 그만큼 기도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의식하는 경건의 삶이기 때문이다. "집사님 기도해주세요." 손사래를 친다. 나의 기도를 통해 어떻게 비치는 것에 너무들 신경 쓴다. 그만큼 기도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조종한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기도 모습은 사람을 판단하게 한다. 기도의 내용을 들어보고는 그 삶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판단해버린다. 그만큼 기도가 은밀함 중에 드리는 것이 너무 어려운 까닭인지도 모른다. 내 기도소리에 스스로 속기도 한다. 가장 많이 속는 게 목사이다. 잘못된 동기로 기도하는 자들이 바리새인이었다. 초점이 있는 곳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다. 공적 기도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기도가 없다면 잘못될 가능성이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 이런 기도를 하나님은 못 알아들으셨다. 그들은 또 말잔치를 벌였다. 거룩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외식하는 기도는 사람을 의식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기회로 삼기도 한다. 위선이다. 하나님에 백성다운 기도는 오직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골방에 들어가 닫고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과 문제를 의지적으로 끊고 하나님만 바라는 것이다. 집중하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를 내려놓는 것이다. 시편 46편 10절을 보자. 가만히 있는 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모른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라고 명하신다. 우리가 잠시 하나님 노릇을 쉬면 그러면 친히 하나님 되시겠다는 것이다. 그분으로 하여금 모든 일을 맡기라고 하신다. 비로소 그때 하나님은 명확하게 모습을 드러내시며 일하실 것이다. 백성들에게 여리고성 앞에서 돌라고 하셨다. 또 여리고성을 돌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전에 광야에서 출애굽 1세대처럼 하나님을 원망할까 봐 그랬던 것이다. 불신에 자리에 설까 봐 그러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하나님에게 주권을 양도할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이것은 위선인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골방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 가면을 벗게 된다. 진실한 내 모습을 하나님 앞에 내 보이게 된다. 그때야말로 내 기도 앞에 참 믿음과 영성이 드러난다. 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받는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받으셨다. 아무도 없는 그곳이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음을 선포하셨다. 사명을 드러내셨다. 우리도 혼자 있을 때 믿음은 드러난다. 기도원에 가서 영성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아주 성령 충만해 보인다. 사실 일이 꼬이고, 관계가 깨지고, 돈이 떨어지고, 몸이 아프고 애들이 속 썩 일 때가 기도할 때인 것이다. 여러분들은 기도하고 있는가? 많은 사람이 몸이 아플 때 기도할 것 같지만 사실 원망한다. 하나님은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고도 하신다. 마태복음 6장 7절을 보자. 왜 같은 말을 반복하는가? 반복 기도가 기도를 효염 있게 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방법을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기도가 말을 많이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사정을 모르실 것이라는 불안이다. 사실 이것도 자신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자의 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기도는 관계이다. 그 기도를 누가 듣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나의 노력과 방법, 태도에 달려있다고 그동안 생각했던 것이 중언부언이다. 우리의 완벽한 기도 모델이 예수님이다. 예수님도 반복해서 기도하셨다. 우리보다 더 힘쓰고 애쓰셨다. 십자가를 감당하기가 힘들어 제자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하셨다. 졸고 있는 제자들 옆에서도 반복해서 기도하셨다. 사도바울도 육체의 고통을 제하여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하였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 기도하였는데도 하나님에게 응답받지는 못하였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원망과 좌절하지 않았다. 그의 약함을 통하여 주님을 더 알아가고 닮아갔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마음이신지 받아들이는 믿음이다. 수용하는 믿음이다. 기도해야 한다.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더 그렇다. 빈 말의 반복은 잘못된 것이다. 금식기도이든 철야기도이든 다 마찬가지다. 기도의 효염을 본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우리도 일 년에 네 차례 산상기도회를 가지려 한다. 모든 목장이 연합하여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경험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산이면 어떠한가? 여기서 응답 못 받는 기도가 산에서 응답받는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삼시세끼 잘 먹고 응답 못 받던 기도가 금식했다고 응답받는다면 그것도 기도가 아니다. 그럼에도 왜 금식하는가? 저도 산꼭대기에서 기도한 적이 있다. 많이 갈급하기는 하였다. 사실 절박했다. 그때는 그것이 산에 올라가는 영성이었다. 그렇다고 응답 안될 것이 응답되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 갈급함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인격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기도할 때 기도자의 상황과 환경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기도자 그 자신이 바뀌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것이 너의 힘이라고 하신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무엇인가 내걸지 않으면 하나님의 관심을 얻을 수 없다고 착각한다. 예수님은 이것을 헛되다고 하셨다. 아니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전부터 하늘 아버지는 돌보고 계셨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삶 깊이 관여하고 계시다. 기도는 하나님께 새로운 정보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요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이미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심을 고백하는 것이 더 좋은 기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기도 중에 하나님을 가르치려 드는 사람도 있다. "이러시면 안 되죠." 하며 추궁하고 독촉한다. 교육하려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잊은 이방인의 기도이다. 이것들이 있어야 하시는 줄 아시는 아버지이시다. 미사여구가 아니다. 감동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으로 우리를 지으신 것이다. 기도하기 전에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아시는 것이다. 그런데 왜 두드리라고 명하시는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신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자만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을 게을리하면 교만하게 되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말씀하신 것도 그것이다. 바울을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육체의 가시도 허락하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이루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필립 얀의 "기도"라는 책이 있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관계에서 기도가 무엇인지 알게 한다. 이 책 부제를 보면 "하나님께 가는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길 기도"라고 되어있다. 가장 쉬운 것은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믿음과 담대함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쉬운 것이다. 가장 어려운 것이 하지 말라고 얘기하신 반복된 중언부언의 기도이다. 이는 바리새인과 이방인의 기도이다. 조애너는 남아공에 험악한 교도소를 찾아가 훈육하던 자녀이다. 교도소는 열악하였다. 조애너는 너무 보람 있었고 차차 교도소의 폭력적인 태도가 가라앉았다고 하였다. BBC에서 방송을 내보내기도 하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녀는 "당연한 얘기지만 이미 하나님이 거기 계시더라. 난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내 삶에 들어와 계신다. 한시도 빠짐없이 말이다. 기도는 그 부르심에 반응하는 통로일 뿐이다.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에 임재 앞에 나아가 반응하는 기도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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