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1장 14~25절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막막한 때는 광야 생활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소망과 길이 없는 곳이었다. 부재의 땅, 결핍의 땅일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시대도 광야 생활을 했던 때이다. 안식일 전날에 매일 5톤 트럭으로 2000대 분량의 만나가 내려졌다. 그들은 생생하게 만나를 따라가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의 빛이 되심을 경험하였다. 결핍과 부재의 땅이었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풍성하였다. 혹시 이 중에 광야와 같은 생활을 경험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가 되어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한 시간은 언제일까? 역설적이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이다. 사사시대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왕이다.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시대이다. 환경적인 어려움이 영적인 기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기도하지 않아서 그래."라고도 얘기한다. 그렇지 않다. 꼭 영적인 기근이 물리적인 기근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여호야긴 왕이 유다의 왕일 때 바벨론은 유다의 여호야긴 왕을 포로로 데리고 간다. 왕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유력한 자들 1만 명을 포로로 데리고 갔다. 에스겔과 친족들도 끌려갔다. 바벨론은 시드기야를 유다의 왕으로 세웠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꼭두각시였다. 15절을 보자.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르고 계신다. 유대민족들이 바벨론에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징계라고 얘기하지만 사실 본문을 살펴보면 "너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리 떨어져 있다."라고 얘기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이렇다. 16절을 보자. "그들이 도달한 장소에서 내가 잠깐 그들의 성소가 되리라."라고 하셨다. 잠깐 그들을 만나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잠깐은 놀라운 약속이다. 잠깐 만나주시는 것이 아니다. 17절을 보자. "너희를 흩은 여러 나라 가운데 모아내고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리다." 예배를 회복하고 예루살렘이 다시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환경은 하나님이 치신 것 같지만 예루살렘에 남겨진 이들보다 더 놀라운 임재를 경험할 것임을 예고하시는 것이다. 그곳에서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전부가 되신 것이다. 혹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분들이 있다면 그분에게는 하나님만 남아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전부가 되어 주실 것이다. 광야로 부르실 때는 무언가 하실 것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가증과 미움을 제거하시는 것이다. 하나님밖에 없으심을 인정하게 하시고 돌과 같은 마음을 살 같이 변하게 바꾸어주시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고난의 시기에 길이 되시고 전부가 되어주셨다. 21절을 보자.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따르는 자들이었다."라고 되어있다. 이스라엘에 남은 자들은 이것을 따랐다는 것이다. 10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 고난도 없이 내가 받은 복으로 풍성한 생활을 누리는 것이 남은 백성일까? 아무것도 없이 오직 하나님밖에 남지 않은 백성이 하나님에게 있어 남은 백성일까? 꼭 광야생활을 거쳐야 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저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전부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백성을 가리킨다. 모두가 기도에 자리에서 떠나가는 이 시대에 기도하는 이 시간 하나님은 여러분을 만나주신다. 하루하루 기가 막힌 삶 속에 "하나님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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