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장 13~16절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말씀하신다. 수요일에 위로받기에는 조금 부담스럽다. 거룩하다는 말은 일상에서는 잘 쓰질 않는다. 교회 밖에서도 잘 들리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거룩은 잊힌 말이 되었다. 거북하다. 본문을 잘 살펴보게 되면 오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거룩에 관해 가지고 있었던 상식들을 뒤집는 선언을 3가지 보여준다. 첫째는 은혜를 바랄 때 거룩해진다라고 한다. 13절을 보자. 흔히 거룩은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13절의 근간이 되는 주동사는 바라라는 동사이다. 그 외 동이라, 근신하라는 분사로 되어있다. 제대로 된 번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되 마음에 허리를 동임으로써 근신함으로써 그리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바라라이다. 은혜를 바라라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12절에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은혜를 봄으로서 믿음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은혜를 받았다고 소개한다. 그러므로 죄와 율법과 마귀에 품 안에서 유혹하는 세상과 그것을 조종하는 사탄이 남아있는 한 맹공을 퍼붓는 것이다. 크신 은혜를 받고 살아갈 수 없도록 한다. 그러나 늘 그러진 않는다. 예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실 것이다. 정말 예수님 같은 높은 경지에 삶을 곧 살게 될 것이다. 오해하지는 말자. 이런 은혜가 그날에 오실 것이므로 근근이 죽지 못해 살다가 그 날에 절정에 구원을 누릴 것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늘 우리에게 계속 주시는 것이다. 어제도 내일도 주신다. 다만 이것이 그날에 절정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산 정상에는 누가 올라가는가? 산 밑에서 김밥 먹는 사람이 먼저 올라가는가? 아니면 끙끙거리며 올라가는 사람이 먼저인가? 당연히 뒤에 사람이다. 예수님 오시면 뛰어나가는 것이 아니고 계속 오르는 것이 수반되어야 한다. 허리를 동인다는 말과 근신하라는 말도 조심하라는 소극적인 뜻이 아니다. 허리를 동인다는 말은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리를 듣고 출애굽 때 허리를 동이고 유월절 때 음식을 먹은 것이다. 곧 행동할 채비를 하라는 것이다. 은혜를 몸으로 만들라는 뜻이다. 근신하다는 말은 술에 취하지 않고 맨 정신으로 또렷하다는 것이다. 단지 술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에서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지 맑은 정신으로 분별하라는 것이다. 알라는 것이다. 풍성히 은혜에 거하게 하심을 분별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거룩해지는가? 허리를 동이고 근신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모든 자리에서 은혜를 마음 다해 바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때 거룩해지는 것이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순종하는 자녀 된 것을 알 때 거룩해진다고 하였다. 14절을 보자.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당신은 순종하는 자녀인가? 언제 무슨 순종을 많이 하셨나? 저는 순종하는 자식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순종하는 자녀들이다. 우리가 한 순종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순종을 우리가 하신 순종이라고 여겨주신다. 드디어 우리가 순종하는 자식이 된 것이다. 순종하지 않을 때 사욕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가 많다. 사욕은 과욕이다. 사욕이라는 게 이 욕망.. 음침함과 음란함을 가져서 사욕이 된 것이 아니라 좋은 것, 필요한 것 과도하게 욕망에 사로잡혀 그 욕망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을 때이다. 어떤 욕망도 어떤 욕구도 사사로운 것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을 때 다 우상이 되는 것이다. 사욕이 본받지 말라는 것은 붕어빵 틀같이 닫혀 버리는 것이다. 별 모양에 아무리 바라봐야 별 모양만 나온다. 그곳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제 지인의 아들이 더블백에 자기 몸무게만큼의 마약과 권총을 넣고 팔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보석이나 사면이 없는 종신형을 받았다. 젊은이가 말이다. 그런데 8년 만에 최우수 모범수가 되어 가석방되어 잘 살고 있다. 이런 아들을 둔 지인과 얘기하다 대뜸 "성경에 누구를 존경하는가?"라고 물었다. 요나를 제일 존경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왜 불순종의 요나를 존경하는가?"라고 물었다. 진짜 하나님 자녀가 되어야 하나님 얘기를 안 듣는다고 얘기하더라. 순간 나도 설득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제가 교회 사택에 사는데 제가 아는 목사들의 자녀들은 말을 잘 듣더라. 그런데 저희 집 자녀는 그렇지 않다. 말 잘 듣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옆집의 아들들은 우리말을 잘 들을까?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무나 못한다. 지옥 가고 싶지 않아 순종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다.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을 자유 속에 순종을 요구하시며 우리가 순종하면 복을 주니 벌을 내릴까 봐 무서워하라고 하시지 않는다. 이와 달리 너무 놀라워 마음을 나눠주시고 나를 성장시키시는 마음을 알려주시는 게 새롭고 고마워서 순종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지금 우리가 순종 못할 수 있지만 뒤뚱 거리고 어설프지만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놀랍고 감사할 것 밖에 없고 이 분과 동행하고 사는 것이 더 이상의 행복이 없다고 생각될수록 이것이 진짜 순종인 것이다. 우리가 이웃집 아저씨께 한 번 하는 순종하는 게 아니라 믿는 자녀 된 확신의 순종이다. 예수님의 공로를 알고 그런 순종의 마음을 붙드는 것이다. 점점 더 거룩해짐을 믿는다. 베드로는 세 번째로 종교의 영역뿐 아니라 모든 삶에 순간과 영역에서 거룩해질 수 있다고 말하신다. 15절을 보자.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하신다. 레위기 19장 2절을 인용한 말씀이다. 레위기는 잘 아시다시피 평신도와 제사장에게 어떻게 하면 거룩에 이르는가? 가르쳐주는 책이다. 모든 행실에서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하시면서도 레위기 전체에 걸친 율법과 말씀을 일체 하고 있지는 않다. 거룩이라는 것이 어떤 특정함 계명과 계율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마음 쓰고 행동하는 것 이상의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행실에서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다는 말씀은 무거운 계율을 지게 하시려고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알면 알수록 신나게 하신다. 우리 생활의 대부분은 거룩과 관련이 없다. 우리가 무언가 지고 나아가도 칭찬받기에는 부족하다. 거룩이 어떤 특정한 계명을 지킨다는 가정이라면 말이다. 모든 행실에서 거룩하다고 한다면 힘 솟을 일과 즐거운 일들이 넘칠 것이다. 상상만 해도 흥분된다.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어떤 욕망과 욕구와 필요도 같이 추구하면서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돈을 벌어도 거룩해질 수 있는 것이다. 공부를 해도 마찬가지다. 공부를 안 해도 거룩해질 수 있다. 물론 공부를 하는 편이 거룩해질 확률이 높다. 쉬어도 거룩해진다. 여행을 가도 거룩해질 수 있다. 등산을 가도 거룩해질 수 있다. 낚시도 거룩해질 수 있다. 정치를 해도 거룩해질 수 있다. 국악을 해도 거룩해질 수 있다. 개를 길러도 거룩해질 수 있다. 고양이를 길러도 거룩해질 수 있다. 결혼을 하거나 안 해도 거룩해질 수 있다. 종교 영역뿐만이 아니다. 우리 삶 전체를 거룩하게 하신다. 모든 행실이라는 말은 주일 10시, 12시 같이 어떤 특정한 시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다. 세워주는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느끼고 동행하고 임재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이다. 놀라운 말씀이다. 주일만이 아니라 모든 삶에서 거룩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존귀한 자인 것이다. 세상에 어떤 종교와 신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을 얘기하는 신이 없다. 모든 신이 내가 이러니 벌벌 떨라고 얘기한다. 자기를 떠나라고 얘기한다. 아버지 하나님 만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거룩해질 수 있다고 그것이 마땅하다고 힘주시고 격려하신다. 거룩하다고 하면 힘이 없거나 까칠하거나 날카롭거나 행동거지가 조심하게 되거나 단정하거나 엄숙하게 된다는 억측이나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은혜를 바라는 것이다. 순종하는 자녀라 여겨주심을 붙드는 것이다. 모든 삶에서 거룩에서 비켜간 것이 없는 것이다. 활짝 열어 놓으셨다. 내 본성. 가장 하나님 다운 것. 하나님 자녀를 세우시고 인생 한가운데로 걷게 하시는 이 시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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