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06 주일예배

Q.T/사랑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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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11장 21~27, 38~43절

 

사랑의 교회에 다시 오게 되어 영광이다. 남가주에 있는 바이올라 대학교에서 문안드린다. 바이올라 대학교는 여러 면에서 특별하지만 오정현 목사님이 탈봇신학교에서 공부하셨기에 더 그렇다. 그래서 더욱 가족 같은 느낌이다. 사랑의교회 찬양팀도 바이올라 대학교 합창단과 함께 협연 했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런데 이 사랑을 경험한 것은 2010년도이다. 로잔대회에 손경주라는 자매를 보았다. 북한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중국으로 탈북하였고 임신하였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북한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가 살해당하셨다. 그녀는 로잔대회에서 간증하였다. 그 간증을 마치고 손경주 자매와 오정현 목사와 셋이서 만났다. 그녀가 바이올라 대학교에 올 수 있도록 초청하였다. 그녀는 몇 년간 영어공부를 하며 지냈다. 바이올라에 합격하였고 4년 동안 공부하였다. 지난 12월에 졸업하였으며 남편도 얻었다. 폴장이라는 분이었다. 바이올라 대학교 학생 6,000명과 손경주 자매를 대표하여 사랑의 교회와 오정현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바이올라 대학교는 6,000명의 학생이 있다. 할리우드와 디즈니 사이에 있다. 학사부터 박사에 이르는 다양한 학위가 있다. 한국과도 100년간 교류하였고 선교사분들도 한국에 갔었다. 이제는 한국에 선교사를 모시고 있다. 저희 바이올라 대학교는 성경의 권위와 대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 성경말씀을 나누자. 그리스도인이 살아감에 있어 요한복음 11장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믿음의 두 가지 면모를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것이 사실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전해주신 그 말씀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믿음이 요한복음 11장에 중심이다. 나사로를 죽음에서 건지신 것이다. 요한복음 11장에는 믿는다는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요한복음에서는 믿는다는 표현이 어떤 것보다도 많다.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한다. 이 한 장에서는 그 어떤 장에서 보다 많이 등장한다.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려있다. 두 명의 여성도 있다. 마르다와 마리아이다. 오라버니가 죽게 되어 난처한 입장에 있다. 예수님에 귀에 나사로에 대한 얘기가 들려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4절을 보자. 나사로에 대한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할 것임을 얘기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굉장히 멀리 계셨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다니와 예루살렘에도 계시지 않았다. 요르단강으로부터 30km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보내야 하였다. 가령 주일 아침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이 메신저가 그것을 전해야 했을 것이며 월요일 아침에 출발해야 할 것이다. 또 저녁에나 도착할 것이며 이틀이나 더 걸릴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출발하지 않으셨다. 6절을 보자. 나사로에 대한 얘기를 듣고 거기에서 이틀을 더 거하신다. 나사로가 죽는데도 이틀이나 더 계시는 것이다. 나에 일정에 맞추지 않으시는 것이다. '내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예수님은 어디 계셨는가?' 우리는 절박한데 어디 계셨는가?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런 감정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사흘이 지난 다음에야 예수님이 등장함을 말하신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뛰어나가 맞이한다. 마르다가 말한다.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얘기한다. 나사로는 이미 동굴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 앞을 큰 돌로 막아서 있다. 소망이 없는 상태이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불평한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마르다야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질문하신다. 그리고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렇지만 마르다는 돌을 옮기고 싶지 않았다. "예수님, 지금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요한복음 11장에 핵심이다. 성경 가운데 가장 위대한 내용인 것이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얘기하실 때 어떤 의미로 말하는 것인가? 그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말씀은 두 가지를 마음이 담겨있다. 그 하나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내가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의 모습과 동일하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신 것이다. 마르다는 이것을 믿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의 면모는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것을 믿는 것이다. 사실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랑의 교회의 기초이다. 이 세상과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것을 기초로 여겨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며 사실이다. 이 말씀은 분명한 것이다. 제가 한국에 자주와 보니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목사님. 사모님. 김치."같은 것이다. 또 하나는 "확실과 확신"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며 분명하게 확실함을 믿는 것이다. 이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밑줄 긋고 암송합시다. 취하는 음식이 되게 하자. 처음부터 통독하며 계속해서 이어가자. 성경 한권을 묵상하고 읽어가자. 한 구절을 탐구하며 읽자. 이 교회에 함께하는 것이 좋은 것은 절대적으로 말씀 중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확실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함이다. 이것에 뿌리내리시길 바란다. 부활을 믿을 때 확실해진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일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마르다가 모든 정답을 얘기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믿지만 나사로는 누워있는 것이다. 신학적인 진리가 아니라 기적이 필요한 것이다. 마르다는 그 믿음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두 번째가 바로 이것이다. 확실하게 믿는 것뿐 아니라 확신하는 것이다. 예수님께 이루는 것에 대한 확신이다. 우리 삶의 불가능한 것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하여도 확신하는 것이다.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확신하는 것이다. 부족하거나 하지 않다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 무덤에 다다르셨다. 그곳에 서서 하신 말씀이 마르다의 인생을 바꾸었다. 저는 하나님 말씀을 많이 알며 많은 구절을 암송하고 있으며 구약과 신약도 모두 공부하였다. 그러나 저도 마르다와 같은 모습이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동정녀에게 나으심도 믿습니다. 그러나 정말 불가능한 상황이 내게 펼쳐질 때는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도하며 능력을 확신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여러분께도 기도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은 지금 어디인가? 관계나 가족, 도시와 교회 아니면 나라인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은 쉬울지 모르지만 우리 상황보다 그 능력이 더 크심을 믿어야 한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그것을 밝히며 사랑의 교회를 통하여 이 말씀을 믿는 것뿐 아니라 확신하여 그 능력을 보여주심도 믿자. 그 확신을 믿어야 한다. 생명이요 부활이심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죽어있는 상태에서도 생명을 주심을 믿어야 한다. 왜 그런가? 왜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가? 우리 기적을 자랑하기 위해서? 남에게 이것을 보라고 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가족과 교회에 집중되기 위함인가? 교단에서도? 그것이 아니다. 그 한 가지는 40절에 나온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시라는 이유는 사랑의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이다. 그러니 이렇게 믿으라는 것이다. 이 세상 가운데 박해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이것을 믿을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도 자존감을 위해서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믿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이다.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이다.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 전부를 위해서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초청하는 것이다. 1세기에 유대 문화에서는 시체라는 것을 규정할 때 공식적으로는 죽음의 상태는 아니었다. 둘째 날에도 마찬가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셋째 날에도 공포하지 않았다. 그러나 1세기 유대 문화에서는 사흘째에는 죽었다고 공포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넷째 날에 나타나셨다. 모두가 낙심할 때 나타나신 것이다. "이것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라고 하셨다. 돌을 옮기는 사람들이 보게 되는 것이다. 43절을 보자. "나사로여 나오라."하고 명하신다. 나사로가 일어나 걷는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라고 말하신다. 정말 놀라운 장면이다. 어렸을 때 한 목자가 말하였다. "예수님이 '나사로여 일어나라' 라고 부르지 않으셨다면 모든 시체가 일어났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는 이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하나님은 담대함으로 이끄신다.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에 이것에 이르는 것이다. 말씀을 확실하게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할 때에 신뢰할 때에 우리는 기적을 본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선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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