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20 중앙성결교회 주일 3부예배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한기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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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행 일치

야고보서 1장 12~18절

 

야고보서의 전체 주제를 표현하는 말씀은 야고보서 1장 22절로 말할 수 있다. 듣는 말씀과 행함이 일치되어야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로마서 바울 말씀을 보면 신행일치를 주장하였다. 믿는 것과 사는 것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행 일치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청행 일치는 언행일치보다 힘들다. 내가 말한 대로 사는 것은 가능하지만 특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오늘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18절을 보자. 사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었던 지혜의 말씀이다. 대화에서는 듣는 것이 중요하다. 경청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제대로 들을 수 있는가? 마음을 다해서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청이라는 책을 보면 귀를 기울여 들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은 하나를 주고 귀를 두 개 주셨다. 우리는 대게 남이 말할 때 내가 말할 것을 생각하며 말하는 도중에도 끼어든다. 제대로 듣지 않아서 대화가 어렵다. 사랑의 첫 번째 의무가 듣는 것이다. 부부간에도 들어줘야 하는 것이다. 들어주지 않으니 답답해서 속병이 생긴다. 돈 주면서 들어달라고 상담한다. 그 남편이 들어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들어주지 않아 고함을 치며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헨리 나우웬은 "예수님은 온 몸이 귀였다"라고 얘기한다.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듣는 자가 복된 것이다. 사무엘도 사울한테 와서 경청하는 것이 낫다고 얘기하였다. 제대로 듣지 못하고 말하면 시험 들거나 유혹에 빠진다. 또한 알아듣지 못해 화를 내면 이것도 시험 들거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성내기를 더디 해야 한다. 잠언 29장 20절을 보자. 말이 조급한 자는 희망이 없는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말이 급하다. 행동보다 말을 많이 한다. 극단적인 말도 쏟아낸다. 분노조절장애가 문제이다. 들어보고 생각 좀 해봐야 한다. 화가 나면 하루정도 지나서 말해야 한다. 이것을 참지 못해 고초를 겪는다. 19절의 말씀은 18절과 연관된다. 진리의 말씀이 나온다. 진리의 말씀을 잘 알아들으라는 것이다.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말고 새겨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 진리의 말씀을 잘 들으면 믿음이 생긴다. 로마서 10장 17절을 보자. 그 진리의 말씀을 알아들을 때 믿음이 생긴다. 그것은 고백이며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기고 행위로 나타난다. 그래서 야고보는 근본적으로 얘기하고 있다. 바울은 믿음에서 행위를 말하였지만 야고보는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다. 진리의 말씀을 들었는데 믿음이 행함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것은 위선이다라고 하였다. 성령이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 단순히 오늘 듣는 말씀이 즐겁게 해 주기 위함이 아닌 것이다. 모름을 알게 해 주기 위함이 아니다. 어떤 세상의 정보만을 주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이 말씀이 나에게 적용되어 행위로 나타나지 않으면 마치 음식을 먹고 소화되어 건강과 활동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과 동일한 것이다.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는 결과를 일으킨다. 성을 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하나님의 의는 절대적이다. 말씀을 적용해야 의를 이룰 수 있다. 신앙생활을 생각해 보자. 성경의 말씀을 들을 때 적용하는가? 아니면 판단부터 하는가? 만약 판단부터 한다면 토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에 있어 갑자기 "내가 물을 내랴?"라고 하였다. 판단부터 한 것이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상관없이 행동한 것이다. 모세와 아론조차도 가나안을 밟지 못했다. 야고보서 1장 21절을 보자. 더러움이 있을 곳이 없어 나가는 것이다.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은유적 표현이 많이 나온다. 이것은 씨부리는 비유와 연결된다. 옥토에 씨가 뿌려지니 30, 60, 100배의 풍작이 있는 것이다. 줄기와 열매가 나오는 것이다. 온유한 마음이 순전한 마음이며 옥토이다. 그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구하며 생명을 준다. 1장 22절을 보자. 자기를 속이는 것이 기만이며 위선이다. 우리들처럼 좋은 말씀을 듣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매주일마다 듣는다. 좋은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착각하면 안된다. 설교하는 목사만큼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도취하는 것이고 기만하는 것이다. 들은 것을 내 삶에서 행동으로 옮길 때 그것이 진정한 믿음의 삶이다. 듣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전에 생각을 했다면, 말을 했다면, 잘 들었다면 잘 실천할 것만 남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의 적용 결과를 말하였다. 마태복음 7장 24~27절을 보자.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짓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모래위에 짓는 것이다. 비가 오고 태풍이 불면 이것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든든한 것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얘기하였는데 어떻게 적용하여야 할까? 듣고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듣는 것은 같지만 행함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이다. 듣는 우리에게도 이렇게 갈린다. 듣고 잃어버리는 자보다 듣고 실천하는 자가 복을 받는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다. 행복하면 대개 아래에 있는 행복을 말하지만 위에 있는 복을 얘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우리가 하는 일에 복을 주신다. 사업과 가정, 직장에 복을 주신다. 행한 대로 복을 주신다. 행복하시길 기대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복을 받는다. 그래서 이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복 받길 바라는가? 청행하는 사람에게 행복을 주시는 것이다. 왜 거울을 보는가? 이 시절에는 굉장히 귀한 것이었다. 자기 모습을 비추어보았다고 한다. 거울을 보고도 문제점이 있음에도 그냥 가면 안된다. 그것을 교정해야 말씀이 사는 것이다. 보고 잃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보고 고치고 행동하는 사람이어야 보람 있고 가치 있는 것이다. 나의 삶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설교가 넘쳐나고 종교의식과 행사하는 기관도 많지만 세상과 내 삶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1장 26~27절을 보자. 스스로 재갈 물지 않고 자기 의를 내보이면 헛것인 것이다. 보통 경건 생활이라 하면 새벽기도와 성경 읽기, 성경 묵상인 줄 알았지만 야고보는 다르다. 일단 첫 번째로 말이다. 말을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인데 어려운 삶이 있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다. 실력, 권력, 재물을 가진 사람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 최후의 심판을 얘기하셨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 어떻게 행동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와 풍조대로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대로 나아가면 그것은 경건한 생활이 아니다.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참된 경건을 얘기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성취해야 할 경건이다. 이런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이다. 남에게 요구할 사항은 아니다. 그래서 듣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들은 것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청행 일치를 통해 모든 일에 복을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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