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야고보서 1장 1~12절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1절을 보자. 편지 형식의 글이다. 편지를 쓰는 저자 이름 야고보를 밝히고 있다. 편지를 받을 사람들과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를 말하며 이 뿐 아니라 흩어져 있는 신자들도 포함한다. 야고보라는 이름은 흔하여서 논란이 많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는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예수님을 경험한 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올려놓는다. 형제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고 나는 그의 종 야고보라고 얘기하고 있다. 1절은 신앙고백이 들어가 있으며 흩어진 신자들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공동서신으로 기록한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읽게 하는 것이다. 어려움 중에 신앙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로와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가 바울의 서신에 비해서는 각광을 받지 못하게 된 역사가 있는데 루터는 야고보서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야고보서는 다른 책들과 비교해볼 때 의로운 지푸라기 서신에 지나지 않는다. 야고보서는 복음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얘기한다. 저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 웨슬레는 이렇게 얘기하였다. 루터는 구원에서 행위를 지나치게 강조했던 중세 가톨릭과 맞서야 하기 때문에 바울의 저작에 초점을 두고 그렇게 얘기하였지만, 시대가 지나서 행함이 없는 신자를 보면서 복음에 무관심한 교회에게 야고보서를 더 강조해서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실제로 바울과 야고보가 성경에 기록한 것을 보면 둘이 네 차례나 만났는데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둘 다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의 감독 지도자였는데 바울에게 어려움을 얘기할 때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둘 다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그동안 지켜오던 것들을 이방인에게 강요하지 말고 하나님의 복음과 은혜를 강조하라고 하였다. 심지어 야고보서가 야고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은 이방인에게 전하며 야고보가 얘기할 때의 내용과 야고보의 인사말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야고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서신에서는 칭의의 원인을 지칭한다면 야고보서는 칭의의 결과를 얘기한다. 바울이 말하는 것이나 야고보가 말하는 것이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야고보서는 바울이 얘기한 것을 오해하는 사람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책인 것이다. 바울의 얘기가 행함과 분리된 것이 아님을 가르쳐준다. 야고보서 2장 14절을 보자. 2장 22절을 보자. 바울만큼이나 야고보도 믿음을 강조하는데 행함의 믿음인 것이다. 살아서 역사하시는 믿음인 것이다. 제가 신앙생활하며 근래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였는데 과거 신학교 생활할 때 아파트 조사를 하였다. 거기서 질문하고 결과를 쓴다. 신자도 두 분류인데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었다. 78년도쯤 조사를 보면 신앙생활하면서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만약 비신자이면 전도를 하고 기존 신자라면 그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도록 설명하였다. 그런데 지금 통계를 보면 교회 나오는 신자뿐 아니라 교회에 나오지 않는 신자들까지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교회에 안 나오면서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계시더라. 그런데 문제는 왜 그렇게 삶이 안 따르는가? 왜 교회가 그 모양인가? 그래서 근래에 이르러서는 과거에 비해 상당한 비율의 신자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신앙의 열정이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방향은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 저의 시각이다. 신앙의 의식화는 되어있지만 신앙의 생활화가 안 따라주는 것이다. 이럴 때는 야고보서를 전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얘기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값싼 구원과 은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값진 구원과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신자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선 이 야고보서를 봐도 여러 가지 주제가 튀어나온다. 대체로 살펴보면 야고보서에는 13가지 주제가 있다. 오늘 본문에서도 시험이 나오고 지혜가 나오고 빈부 격차에 대한 주제가 나온다. 오늘은 이 시험을 붙들었다. 야고보서 1장 2절을 보자. 신자가 되어도 시험에서 면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러 가지 시험이 오는 것이다. 새해에 들어서 첫 주 예배인데 시험 얘기를 꺼내서 죄송한데 야고보서를 얘기하며 시험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에게 여러 시험이 다가온다. 복을 빌어주고 평탄하기를 바라지만 2019년에도 시험이 예상되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얘기하는 시험은 다음 주 얘기할 13절 대목이지만 유혹의 개념에 가깝다. 오늘 얘기하는 시험은 우리의 삶을 좀 더 온전하게 만들기 위한 시험인데 이것을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탄탄한 길만 있지 않으며 시련이 도사리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찾아온 고난이 시험인데 우리의 잘못된 것을 교정해주기 위해 오기도 하며 불완전한 나를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 찾아온다. 여러 가지 시험이 오는 것이다. 건강, 물질, 자녀, 직장, 사업, 나라와 같은 문제인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이다. 놀라지 말고 당연하게 여기며 기쁘게 여기라는 것이다. 여긴다는 것은 미리 생각하라는 것이다. 앞서서 이런 생각을 하며 기쁘게 여기는 것이다. 아니 어떤 고난이 오는데 놀라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가? 이것을 기쁘게 여기라고 하는가? 사실 성경에 욥 같은 사람도 있다. 고난이 왔음에도 앞서서 생각한다. 내가 가는 길을 하나님이 아시니 내가 단련되어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하였다. 연단을 기쁨으로 받은 것이다. 앞으로 될 일들을 예상하고 생각하면 귀한 것이 예상되니 현재가 힘들어도 기쁘게 감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성도들이 위대하다는 것인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현재의 고난을 기쁨으로 받는 것이다. 그 믿음 때문에 그 시험이 귀한 것으로 승화된다. 욥만 그런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을 보자.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잡았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 결국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이다. 결국 믿는 자들의 결과는 해피엔딩이다. 그것을 생각하며 오늘의 시련을 인내하라는 것이다. 야고보서 1장 3절을 보자. 이 시련은 다 목적이 있는데 시련이라는 것은 깨끗하게 해주는 것이다. 용광로에 철을 넣어 열을 가하면 불순물이 제거된다. 그것이 시련인 것이다. 고난의 시련은 믿음이 정금처럼 되는 것인데 거기서 인내가 나온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시험에서 시련으로 인내에서 온전함으로 나가는 것이다. 인내하여 온전을 이루라. 만약 중간에 포기하면 미완성이다. 도자기를 중간에 꺼내면 미완성이다. 끝까지 잘 마치라는 것이다. 인내가 없이는 온전한 사역을 이룰 수 없다. 인내에서 온전한 사역이 나온다. 온전함은 인내의 열매이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 세 가지가 같은 뜻이다. 온전해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내를 보면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응답으로 여러 가지 복을 경험하며 지위를 누리겠지만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성품의 온전함이 남는다. 결국 온전해지는 것을 경험하고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부족한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고귀한 성품이 되어서 온전하게 되는데 레위기에서 말하는 흠 없는 제물처럼 온전해지는 것이다. 사역을 온전히 이뤄가는 것이다. 야고보서 5장 11절을 보자. 인내하는 자가 복인 것이다. 인내하는 자가 복되도다. 그래서 욥의 인내를 예로 들면서 비유적으로 농부의 인내와 선지자의 인내를 같이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련의 얘기를 하고 그다음 1장 5절에서 지혜를 얘기한다. 야고보서가 지혜서라고 하더니 사실 완벽한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맥락에서 시련과 지혜와 기도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보자. 사실 시련을 통해서 지혜를 얻는다. 그냥 얻는 것은 아니고 시련의 과정 속에서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위로부터 지혜를 주신다. 그래서 시련, 지혜, 기도가 같이 어우러짐이다. 우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지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련 때문에 더 큰 지혜와 믿음을 얻는다. 시련을 통해 기도하게 만들며 매달리게 만든다.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기도하고 삶의 지혜를 얻는다. 여기서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보다는 경건하고 의롭게 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시험과 시련을 일부러 당할 필요는 없지만 이를 기쁘게 받는 것이다. 기도하다가 응답을 얻고 지혜를 얻으며 더 온전해진다. 담대하게 나아가야 한다. 믿음으로 구하며 조금도 의심하지 말자. 그 자체가 확신이기에 만약 확신 못하면 의심이 들며 흔들린다. 은유적으로 비유하고 있는데 바다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 되어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에 닻을 내린 사람과 같이 요동하지 않는다. 견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의 닻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9~11절은 물질과 지혜의 대한 얘기가 믹서 되어 있다. 그 당시에 지혜 있는 사람은 물질도 있었나 보다. 물질로 인해 시험이 오는 것이다. 지위의 높고 낮음을 통해서도 온다. 금년이 황금돼지의 해인데 어디서나 황금 돼지의 해가 되기를 부채질한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것을 원한다. 부자는 복을 가난한 자는 저주를 받았다고 여기며 높은 지위와 낮은 지위를 비교한다. 1장 9~10절을 보자. 이것은 세상이 말하는 것과 다르다. 믿음의 태도인 것이다. 어떻게 낮은 형제가 비굴하거나 부끄러움 없이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는가? 이것이 질문이다. 이번 주도 많은 은혜를 받았지만 오신 강사님 말씀 속에 남는 것이 "기채야 사랑한다."라는 것이었다. 자기 이름을 넣어서 불러보자. 제가 이 얘기를 스스로 해보니 가슴이 뭉클하더라. 나를 사랑하는 분이 계시는 것이다. 내가 어떤 형태이든지 상관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높은 자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 정체성이다.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도우시는 사람인 것이다. 우리가 뭐가 아쉬운가? 내가 사람들의 칭찬에 흔들리면 안 된다. 늘 자신 없게 된다. "내가 지혜로워야 학위를 가져야"라고 생각하면 늘 자신 없다. 세상 사람들이 더 나아 보인다. 그러나 절대 기준은 하나님이시다. 나를 지켜주고 계시며 사랑하신다. 그것이 우리의 높음인 것이다. 그러면 부유한 자들은? 부유한 자들도 돈 자랑하지 말고 교만하지 않아야 한다. 낮아짐을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겸손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위대해 보인다. 그것이 낮아짐이다. 예수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오시는 모습과 비슷하다. 진짜 믿음 생활 잘하는 사람은 낮아짐과 높아짐에 상관없이 감사하는 사람이다. 물질이 있어도 시험이 찾아오고 물질이 없어도 시험이 찾아온다. 가나안과 광야의 차이인 것이다. 물질이 있게 되어서 주님을 떠난 사람이 많다. 이것은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비굴함과 교만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물질이 있어도 교만하지 않게 다른 사람을 섬기며 하나님 영광을 받들어 살아야 하는 것이다. 풀에 꽃과 같은 것이다. 야고보서 1장 11절을 보자. 세상에 아름다움만 자랑하는 것이 사라지는 것이다. 땅에 관점이 아니라 하늘에 관점이다. 12절을 보자. 그러므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방법인 것이다. 믿음으로 담대히 나가자. 그 시련을 통해서 더 성숙하고 위대한 사람이 되자.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 > 한기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01/20 중앙성결교회 주일 3부예배 (0) | 2019.10.08 |
---|---|
2019/01/13 중앙성결교회 주일 3부예배 (0) | 2019.10.07 |
2019/07/07 중앙성결교회 주일예배 (0) | 2019.09.28 |
2019/06/23 중앙성결교회 주일예배 (0) | 2019.09.26 |
2019/01/27 중앙성결교회 주일 4부예배 (0) | 2019.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