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
야고보서 2장 14~26절
두 가지 질문으로 시작한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선 엄청난 유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믿음은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약속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만큼 귀한 것이 없으며 믿음 생활하는 것만큼 잘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이 주장이 참되게 하려면 행함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행함의 증거가 없다면 가짜 뉴스와 같이 거짓 믿음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봐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독립을 하였고 자유민주주의를 구가하였고 인권과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행태의 유익도 일구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까지 인도해준다. 그 믿음이 참되어야만 구원이 전제되는 것이다. 취미생활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으로 변화되어 가정과 직장을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 같지만 공적인 영역에서도 표현되어야만 한다. 선한 영향력을 미쳐야 하는 것이다. 어떤 영역에서든지 우리의 믿음이 영향을 미쳐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야고보서는 2장 15~16절에 재미난 얘기를 하고 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말로만 하고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유익하지 못함을 얘기하는 것이다. 살다 보면 덕담도 많이 한다. 그들의 필요를 살펴서 공급하지 못한다면 그 말이 유익하지 않다는 것이다. 걱정과 외로움으로 펼쳐져있는 사람에게 '샬롬' 하면서 보살핌이 결여된다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왜 굶어? 먹어?"라고 얘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유익이 없는 것이다. 저도 늘 설교할 때 "샬롬~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식사 거르지 마세요~"라고 얘기한다. 그런데 그 사람의 굶주림을 알지 못한다면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항상 듣기 좋은 말을 해준다.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껍데기뿐인 말은 유익이 없는 것이다. 차별하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사랑을 실천해야 진실로 유익을 주고 해결해주는 것이다. 야고보서 2장 17절을 보자. 씨앗이 생각난다. 씨앗은 생명력이 있다. 이것을 잘 심으면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살아있는 씨앗이다. 그런데 가꾸어주어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죽은 씨앗인 것이다. 우리도 믿음을 잘 알 수 없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볼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믿음이 싹을 피우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면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믿음 자체에 행함의 씨앗이 있고 그 생명력이 발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참된 믿음임을 알게 된다. 연속성이 내포되어 있다. 야고보서를 잘 읽어보면 행함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비교하지 않는다.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이다. 가짜 믿음과 진짜 믿음을 얘기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면 언어와 마음가짐으로 발현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알게 된다. 그러지 못한 것이라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며 가짜 믿음일 수 있는 것이다. 행함과 믿음은 절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 믿음을 내 행함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이전에 청행 일치라는 설교를 하였다. 오늘은 신행일치이다. 믿는 것과 행함이 일치됨이다. 야고보서 2장 19절을 보자.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분이심을 잘 알며 떨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니실 때 귀신 들린 자들이 알아본다. 마가복음 1장 24절을 보자. 귀신들의 믿음은 몸이 없는 지식적인 믿음이다. 그것이 귀신을 구원하겠는가? 그 귀신에게 유익하겠는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귀신들의 믿음과 같이 가짜 믿음이며 몸이 없는 믿음인 것이다. 2장 20절을 보자. 평생 믿었다고 하는데 헛것이면 어쩌겠는가? 무효화하는 얘기이며 효력이 없으며 거짓인 것이다. 오늘 말씀을 읽으며 어떤 분들은 "바울이 말한 이신칭의 와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과 일치되지 않고 있지 않은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헬라어는 명사적인 개념과 동사적 개념이 분리되어서 행함 하고 별도로 생각하기 쉽지만 히브리어는 명사 안에 동사가 들어간다. 경험적인 행위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 포함된다. 사랑에는 사랑의 행위도 내포하는 것이다. 믿음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내포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과 야고보나 다를 것이 없지만 시점이 다를 뿐이다. 야고보는 자라나서 되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구원받은 믿음이 진짜라면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본문에서만 10번 연결해서 언급하고 있다. 구약에서 유명한 예를 선택해 설명하고 있다. 믿음 하면 아브라함을 얘기한다. 유대인으로서 족장으로서 아브라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여리고성에 살고 있던 라합도 언급한다. 아브라함과 라합을 예화로 드는 것이다.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모리 야산에서 드렸던 것을 언급한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그 믿음이 참 믿음인지는 삶을 통해 드러나는데 모리야 사건이 그것인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믿을 수 있는가? 심지어 아들이 죽어도 살리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 그러나 실제로 아들을 바치지 못한다면 진짜 믿음이 아닌 것이다. 어떤 이들이 나이아가라 폭포에 줄을 매고 외줄 타기를 한다고 하자. 그 사람이 무사하게 건넜다. 그다음은 짐을 짊어지고 건너는 것이다. "제가 이번에는 사람을 업고도 건널 수 있을까요?", "그러면 한 사람 나와보세요?"라고 하면 아무도 안 나오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말씀을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라합은 여리고성에 살면서 온갖 죄악을 보았다. 죄악에 도성에서 벗어나길 갈망한 것이었다. 두 정탐꾼이 다가옴을 알고 신앙고백을 한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하늘과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런데 이제 결단을 해야 한다. 이 사람들을 숨겨줘야 하는 것이다. 믿기는 하지만 무서워서 숨겨줄 수 없다면 참된 믿음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여인은 행동에 옮겼다. 숨겨주었다. 그래서 유익을 얻고 구원을 얻은 것이며 아브라함과 라합이 인정받은 것이다. 이것이 진짜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결단과 희생을 통해 헌신을 통해 나타나야 진짜 믿음인지 드러나는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이 테스트하신다. 그때 믿음의 결단을 해야 역사와 유익이 일어나는 것이다. 야고보서 2장 22절을 보자. 우리의 연약한 믿음이 행함을 통해 온전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작은 믿음이 온전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도 씨앗으로 주어지지만 자라서 온전해지는 것이다. 그 믿음 안에 생명력이 발현되는 것이며 유익과 구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야고보서 2장 26절을 보자.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죽어서 시체가 되고 영혼이 떠나면 가까이 둘 수 없는 것이다. 멀리 하는 것이다. 본인이 아니다. 믿음이 아무리 귀하다 하여도 행함이 없다면 죽은 믿음이며 가짜 믿음이며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믿음 안에는 행함이 내포되는 것이다. 믿음은 행함을 통해 온전해지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좋은 말을 하는 것도 좋지만 믿음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그 아들을 바침으로써 온전해졌다. 그래야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다. 온갖 유익을 누리기 바란다. 그 믿음이 구원하는 참된 믿음이 될 것이다.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 > 한기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02/17 중앙성결교회 주일 3부예배 (0) | 2019.11.19 |
---|---|
2019/02/10 중앙성결교회 주일 3부예배 (0) | 2019.11.01 |
2019/01/27 중앙성결교회 주일 3부예배 (0) | 2019.10.19 |
2019/07/21 중앙성결교회 주일 4부예배 (0) | 2019.10.12 |
2019/07/14 중앙성결교회 주일예배 (0) | 2019.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