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7 중앙성결교회 주일 3부예배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한기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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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부터 온 지혜

야고보서 3장 13~18절

 

어떤 멋있는 여자분이 맨해튼 은행에 들어와서는 오천 달러를 빌려달라고 하였다.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담보로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2주 동안만 빌려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은행에서 신용조회 후 빌려주었다. 2주 후 여자가 나타나 오천 달러를 갚고 이자도 갚았다. 그런데 한 직원이 "이렇게 대단한 부자가 왜 오천 달러가 없어서 은행에 빌리는가?"라고 생각해서 그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의 대답이 기가 막혔다.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주차할 데가 여기만큼 싼 데가 어디 있나요?"라고 대답하였다. 야고보서는 신약의 지혜서이다. 구약에서는 잠언이 그렇다. 야고보서는 지혜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지혜에 대한 단어는 4번 나온다. 세 번이 오늘 본문에 나온다. 야고보서 1장 5절에 하나가 더 나온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세상에서 지혜롭다는 사람들에게 얻는 지혜가 어떤 게 틀린가? 고대에서는 대단한 철학가가 많았다. 쾌락주의와 허무주의, 무신론 철학 같은 것들이다. 웅변가들도 많았다. 참된 지혜가 무엇이며 거짓 지혜가 무엇인지 야고보는 얘기한다. 믿음과 지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그래서 행함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 3장 13절을 보자. 지혜와 총명은 행함을 통해 나타나는데 참 지혜는 선행으로만 나타나며 겸손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선 지혜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을 얘기해주는 것이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선한 사람, 온유한 사람이며 겸손한 생활을 통해 드러난다. 아무리 지혜롭다고 해도 말 만 가지고는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오늘은 두 종류의 지혜가 나타난다. 세상으로부터의 지혜와 하늘로부터 온 지혜가 있는 것이다. 땅과 하늘로부터 온 지혜이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2장에 얘기한 적이 있다. 지혜의 근원과 지혜의 특징이 나온다. 땅에서 온 지혜의 모습이 다르고 하늘로부터 온 지혜의 특징이 다른 것이다. 열매도 다르다. 결과 말이다. 야고보서 3장 14~15절을 보자. 이 세상으로부터 온 지혜는 그런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시기심을 조장하고 다툼을 일으키고 분열을 일으키고 교만하며 진리를 거슬러 대적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세상에서 온 지혜이다. 거짓 지혜인 것이다. 그 당시 헬라 문화권에 사람들은 선생님으로부터 교육받아 권력을 얻어 웅변술을 부렸다. 이런 것들이 다 세상에서 온 것이요 정욕에서부터 온 것이며 귀신에서 온 것이다. 세상적이고 감각적이고 사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르치는 학문이 우리를 어떤 사람을 만들며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이런 타이틀의 글이 있었다. "한국 엘리트는 상한 나무에 썩은 열매다."라고 하였다. 모든 범죄와 사건의 중심에는 소위 엘리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그 중심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땅에서부터 온 것이고 귀신에서 온 것이며 육신적이며 사탄에게 속한 것이다. 3장 16절을 보자. 시기와 다툼, 혼란과 악한 일들이 벌어진다. 시기하게 만든다. 시기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불쾌하게 여기는 것이다. 누구에게 칭찬함을 들으면 시기해버린다. 그렇게 좋은 머리와 좋은 문장실력으로 남을 깎아내리는가? 그것은 마귀적인 지혜이다. 다툼과 야망으로 서로 경쟁하며 파벌을 형성하여 당을 나눈다. 다른 사람을 짓밟는다. 파벌주의와 엘리트주의를 발생시키고 악한 일들이 발생한다. 이것은 지혜롭다고 불리지만 참 지혜가 아니다. 진리를 거스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거짓말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지혜이다. 이런 지혜는 세상을 혼란하게 하며 파괴시키는 것들이다. 땅에 관련되어있고 정욕과 이기심, 심지어 마귀에게 영감을 받아 수행하는 육체인 것이다. 이런 지혜는 땅에서부터 나와 공중에 있는 마귀에게 올라간다. 바벨탑을 쌓는 지혜이다. 바벨 철학이다. 3장 17절을 보자. 제 삶의 모토가 히브리서 12장 14절이다. 화평함과 거룩함을 쫓는 것이다.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다. 거룩이 먼저이다. 거룩이 없는 평화는 거짓이다. 정의가 없는 평화가 거짓인 것처럼 말이다. 본인이 성결하고 자신의 죄를 깨끗이 하여 다른 사람도 깨끗이 하는 것이다. 거룩이 지혜의 특징이다. 마음과 의도가 깨끗하고 거기서부터 나오는 행동이라야 한다.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된다. 세속적인 지혜는 파벌과 분쟁을 만들어 싸움을 일으키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화목하게 한다. 마음과 자신을 평화롭게 하여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평화롭게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이다. 관용하고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며 다른 것도 받아들이는 여유가 있다. 신사적인 것이다. 내 생각대로 안된다고 고집 피우고 그리고 독선적이고, 이것은 지혜가 아니다. 양순하다는 것은 순종의 의미가 들어있다. 긍휼이라는 것은 벌을 받아야 마땅한 것도 용서하는 것이다. 이런 선한 열매가 있는 지혜는 열린다는 것이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마찬가지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임해서 성품을 변화시켜 열매 맺히는 것이다. 이것이 참 지혜인 것이다. 정말 자신이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은 이런 것을 점검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지혜를 구해야 한다. 이 지혜는 생산력이 있는 것이다. 화평과 관용, 양선, 긍휼 같은 신선한 열매를 만든다. 편견과 거짓이 없는 것이다. 편견이라는 것은 부분만 알면서 다 아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 지혜이다. 세상 박사는 한 가지만 아는 것이다. 물론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될 수 있지만 세상은 훨씬 더 넓은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도 볼 수 있어야 한다. 편견이 있는 사람은 자기 생각에 빠져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혜가 아니다. 편애도 있다. 한쪽 편만 드는 것이다. 자기 좋아하는 것만 취하는 것이다. 세상 지혜는 편견과 거짓이지만 참 지혜는 위선이 없으며 진실한 것이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보았다. 왜 이렇게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의 결과가 다른가? 이것은 세계관이 달라서 일어나는 것이다. 세상의 지혜는 세상의 세계관에서 온 것이다. 향락 돈, 쾌락이 가치인 것이다.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시기와 파당과 싸움이 만연하다.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세계관은 하나님의 지혜이다. 여기에서의 가치는 성결, 평화, 관용하는 삶인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세계관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며 살면서 세상의 가치를 따른다면 우리는 위선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지 않고 세상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잘못 배운 것이다. 만약 선생이 되어 이렇게 가르친다면 그것은 되지 않은 것만 못한 것이다. 그래서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말로는 지혜를 말한다고 하면서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치지도 않으며 살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면 선생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참된 지혜의 스승이 되려면 그 말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보이고 어떻게 하나님의 지혜가 보일 수 있는지 아는 사람만 선생 노릇을 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위선자가 되는 것이다. 야고보서 3장 18절을 보자.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화평의 열매를 맺었다면 의의 나무이다. 하나님의 지혜로 살고 있는 것이다. 성결한 삶을 산다면 하나님의 지혜를 얻은 것이다. 세상 공부를 많이 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구하는 기도를 통해 얻는 것이다. 위로부터 오는 것들이다.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자. 하나님 앞에 구할 때 영감을 주시는데 특별히 말씀으로 주신다. 설교를 들으며 떠오르는 생각이 지혜이다. 실천해야 한다. 사업하는 분들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고 한다. 많은 사람에게 그런 간증을 듣는다. 어떤 분들에게는 기도할 때 이런 지혜를 주셨고 실천했더니 성공했다고 하였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감과 지혜를 받자. 소위 지혜 있다는 사람들이 다툼과 시기와 분쟁을 일으키는데 그것은 참된 것이 아니다. 성결하고 화평, 관용, 양선, 베푸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세상 지혜는 자신을 드러내고 교만하고 분열을 일으키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겸손함의 지혜이기에 의의 열매와 성령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다. 하늘의 지혜를 소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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