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의 축복
창세기 5장 21~24절
찬송가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5장은 아담의 계보이다. 바로 앞에도 계보이다. 가인의 계보이다. 아담부터 노아까지 설명하는 것이다. 낳고 죽고 반복한다. 죽음의 역사가 설명되고 있다. 사실 흥미로운 주제는 아니다. 단지 몇 살에 낳고 죽는 얘기이다. 그런데 에녹에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아담의 7대 손이다. 마찬가지로 특별한 내용은 없다. 그런데 24절은 인상적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같이 느껴진다. 에녹에 대한 기록은 뭔가 부가적으로 붙은 설명이 있다. 이것이 특별하고 예외적이다. 출생신고가 있으면 반드시 사망신고서가 따라붙는다. 에녹은 출생증명서는 있지만 사망확인서가 없는 것이다. 창세기 5장 24절을 보자. 하나님이 그를 어디론가 데려가신 것이다. 핵심 메시지는 그가 죽음을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인류는 죄에 대가로 죽음이 찾아왔다. 우리에게 죽음은 저주인 것이다. 그런데 그를 죽음을 보지 않게 하시고 데려가신 것이다. 이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직접 당신의 나라로 데려가신 것이다. 그의 육체도 함께 데려가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부활하셨을 때 몸이 부활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셨다. 에녹도 특별한 것이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시적으로 보여준다. 히브리서 11장 5절을 보자.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실종이 아니다. 분명히 데리고 가신 것이다. 구약의 인물이지만 신약적 삶을 살았으며 부활을 보여준 것이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을 보자. 에녹이 어떻게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는가? 성경은 이것을 짧게 얘기한다. 그 답이 24절에 있다.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다. 인생의 비극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거부하는 것이다. 아담은 결국 하나님과 결별하였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거부한 것이다. 에녹의 삶에서 어떤 위대한 업적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딱 하나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던 노아. 창세기 6장 9절을 보자.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타락한 시대에 모든 이가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던 시대에서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동행인 것이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 것이다. 동행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이것을 생각해보자. 말할 테면 동행은 순종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간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마음과 뜻이 같아야 한다. 자기 원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다. 부부가 함께 살아도 정신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가정이 많다. 생각이 다르고 바라보는 게 다르면 동행이라 말하기 힘들다. 동행의 삶은 예수님의 삶으로 말할 수 있다. 십자가의 뜻은 아버지의 원함인 것이다. 이것은 즐거운 동행이다. 아모스 3장 3절을 보자. 뜻이 같지 않으면 동행은 불가능하다. 오랜 친구들은 서로 닮아있다. 고린도후서 6장 14절을 보자. 빛과 어둠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과 함께하기 어려운 것이다. 에녹은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다. 자기의 고집이 꺾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 것이다. 이것은 믿음이다. 고린도후서 5장 7절을 보자. 세상의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을 쫒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쫒는 것이다. 우리도 세상 친구들과 오랜 세월이 흘러 만났을 때 그 친구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서 거북함이 든다. 내가 다른 길을 걷는 것이다. 혹시 그 친구들과 마음이 맞는다면 이상한 것이다. 세상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 동행하는 삶인 것이다. 이것은 믿음이 필요하며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5절을 보자. 동행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쁘시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히브리서 11장 6절을 보자.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내 길을 고집하여 하나님을 바꾸려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나를 바꾸는 게 쉬운가? 하나님을 바꾸는 게 쉬운가? 내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일평생 우리의 초점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하게 맞춰져야 한다. 자기의 이기심을 내려놓고 고분고분 해져야 한다. 혹시 부부생활이 어려운가? 이것은 결혼을 했으면서도 자기의 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싱글로 살 때처럼 생활하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면 초점과 에너지를 상대에게 쏟아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아의 죽음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길 원하신다. 내 자아가 죽어야 한다. 마태복음 16장 24절을 보자.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따라야 한다. 내 자아를 부인해야 한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함은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자아가 죽는 것이다. 혈기가 왕성할 때는 동행할 수 없는 것이다. 에녹은 몇 년 동안 그렇게 하였나? 무려 300년 동안이다. 어쩌면 에녹은 더 죽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순간순간 꿈틀거리는 자아가 죽는 것이다. 부부도 한 사람이 완전히 죽으면 동행이 가능하다. 매 순간 나의 자아가 죽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은혜를 누리길 바란다. 자기의 고집이 죽어야 한다. 내 주장이 죽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원리는 죽음이다.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우리 삶의 비밀이다. 동행의 비밀이란 같이 걷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온전히 친밀해야 한다. 끓여 퍼진 라면이라도 좋은 사람과 먹으면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어떤 운동이라도 사이가 좋은 사람끼리 하면 좋은 것이다. 계속 함께 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친밀함이다. 이 모든 것의 있어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하는 것인가 이며 핵심은 친밀함인 것이다.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친밀한가 가 중요한 것이다. 우울증의 원인이 친밀한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친밀한 관계가 없다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수많은 관계가 있어도 진정한 관계가 아니다. 기계적이며 상업적인 관계일 뿐이다. 그 관계는 우리 삶의 깊은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에녹과 하나님과의 동행함이라는 것은 친밀함의 증거이다. 동행할수록 강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척도인 것이다.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관계는 깊어지지 않는다. 일로 만난 관계는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일 속에서는 깊다고 느끼지만 끝나면 우울증이 오기도 한다. 진짜 친밀한 관계는 쉬운 게 아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으며 많은 대가가 필요하다. 부부관계도 친밀해지는 것이 쉽지 않다. 어마어마한 대가가 필요하다. 신앙과 종교의 구분이 필요하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종교생활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경험적 삶이 필요하다. 종교생활이 왜 문제인가? 종교적 수행만 하기 때문이다. 부부생활도 마찬가지다.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밥하고 세탁하고 돈 벌어주지만 거리가 멀어 서로 소원해지면 위험해지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경험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의 특권은 신약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친밀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표현이 존재한다. 우리가 열심을 치면 바리새인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오늘날 그들이 우리 교회에 온다면 그들은 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게 자기 열심히며 자기 과시이며 자기만족일 뿐이다. 비유하자면 탕자의 맏아들인 것이다. 둘째 아들보다 더 심각한 사람일 뿐이다. 아버지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냉혹한 인간상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다면 종교생활일 뿐이다. 해로 갈수록 힘들 뿐이다. 에녹은 300년 동안 신앙생활하며 더더욱 친밀해졌을 것이다. 하나님을 더 사모하고 닮아가는 여정인 것이다. 같이 운동하고 밥을 먹고 수 없이 배우며 아빠를 닮아가는 것이다. 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동행하는 과정 속에 교제인 것이다. 성품을 닮으며 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신앙의 핵심이다.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며 경험하는 것이다. 더 깊어지고 풍성해지며 친밀해지는 관계인 것이다. 혹시 갈수록 기쁨이 없는가? 예배 중에 가장 좋은 순간은 언제인가? 이것은 종교적 수행을 하기 때문인 것이다. 날씨가 너무 좋아 주일날은 어디 가고 싶은가? 그것도 일만 남은 것이다. 열심히 봉사만 한 것이다. 나중에 꼭 열 받게 되어있다. 어떤 분은 교회 다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 장담컨대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에녹처럼 300년간의 동행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요한복음 15장 14절을 보자. 종교의 생활에서는 얘기가 안 나오는 말인 것이다. 어떤 신이 자기를 친구로 내려서 표현하는가? 나의 친구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향하여 벗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종교적인 것을 깨트리는 것이다. 주일에 제물만 받는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매일 만나서 밥을 먹고 삶을 나누며 대화하는 것이다. 한 번 필요하면 주고받는 거래가 아닌 것이다. every time everywhere 인 것이다. 에녹을 통하여서 보여주는 것은 위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일 뿐이다. 그의 어마어마한 축복의 한 요인은 그저 동행한 것이다. 그 시대 가장 오래 산 사람은 그 아들 므드셀라이다. 969살을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 산다고 축복이 아닌 것이다. 에녹은 그저 369살을 살았다. 그야말로 요절의 삶이다. 우리 삶에서는 30살 정도일 뿐이다. 이 의미는 양이 아니고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삶의 질이 중요한 것이다. 어떤 이는 한 생을 지옥처럼 살았다고 표현한다. 내 삶의 질인 것이다. 퀄리티인 것이다. 에녹은 홍수 이전으로 보면 가장 짧게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길게 산 것이다. 에녹은 하나님이 데려가셔서 영원의 세계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영원한 삶인 것이다. 우리 성도들 중에서도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다른 세계의 관점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예수님도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주님은 완성적 삶을 사셨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이다.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셨다. 우리도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주제가 아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얼마를 살았는가가 중요하다. 우리도 돌아보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은 삶은 블랙인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은 어떤 것도 상관없이 복된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새롭게 재편되며 재해석된다. 시편 23편에 아름다운 구절이 많지만 그중에서 5절이 아름답다. 인생의 가장 어려운 순간에도 두렵지 않은 이유는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동행하시기 때문에 두렵지 않은 것이다. 에녹의 생애를 보면서 그가 대단한 업적은 없지만 딱 하나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우자. 저도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목회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어떤 인간적 삶도 필요 없다. 지금은 업적을 쌓아야 인정받는다고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과업중심적이며 투쟁적인 시대이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다. 내 열심되어 살고 싶어 하고 다른 성도와 싸우기도 한다. 미국이 특히 그렇다. 기도와 전도에 열심히지만 혈기가 왕성하다. 방언 있는 사람이 옆집사람과 매일 싸운다. 유명한 교회는 많지만 참 신도를 길러내지 못한다.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 가면 딱 하나만 남을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한 것뿐이다. 교회를 몇 년 다녔는가를 묻지 않으신다. 나와 몇 년을 동행하였는가 물으시는 것이다. 에녹의 생애는 단 한 줄이지만 가장 강력하다. 다시 창세기 5장 24절을 보자. 나는 하나님과 일평생 동행하였습니다. 이것이 가장 임팩트 있는 말이다. 우리도 비석에 이렇게 써야 한다. 찬송가 430장 1절을 보자.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너무 좋은 가사인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과 동행하던 에녹을 그냥 데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너 더 이상 죽을 필요 없어. 나와 함께 가자."라고 하였을 것이다. 축복 속에 축복인 것이다. 이 지상에 삶은 쉽지 않다. 도처에 사람들이 쓰러지고 고통스러워한다. 에녹의 주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지만 그는 동행하였다. 하나님은 언제나 도우시며 인도하신다. 때로는 우리가 그 손을 뿌리치고 나 홀로 선택할 때도 많다. 야곱의 생애를 봐도 그렇다. 독자적 행보를 걸어가고자 하였다. 동행할 그 순간까지는 질곡에 생애가 되는 것이다. 좋은 믿음의 친구가 있다는 것이 축복인 것이다. 배우자와 함께 걸어가는 것도 축복이다. 큰 힘과 위로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걷는 축복은 어떤가? 그는 전능자이시며 창조주이시며 생과 화복을 주관하시며 동행하시길 원하시는 것이다. 그 하나님과 함께 동행의 길을 선택하고 알아가길 원하며 그 안에 거하길 힘쓰며 함께 걸어가서 친밀함이 깊어질 때 그 안에 충만한 에너지와 만족과 기쁨이 흘러나와 매 순간 걸어갈 수 있는 기쁨이 흘러나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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