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4장 1~5절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야고보서 3장 18절에서는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4장에서부터는 싸움과 다툼,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평화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온다. 전쟁은 땅에서부터 정욕에서부터 비롯된다. 특별히 외부적인 것보다 사람에 내면과 공동체 안에서 다툼과 싸움이 시작된다. 마치 몸의 구성요소인 손과 발이 싸우는 것처럼 말이다. 가족 간의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만 가족 안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화목한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데 교회 안에서도 일어난다. 결국 지체 안에서 서로 싸우는 것은 누가 이길 수 없으며 이겨도 지는 싸움이다. 아내와 싸워서 이겨봤자 지는 싸움이다. 그 아내가 집을 지옥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자식도 마찬가지다. 얘들이 상처 받아 기가 죽을 테니 말이다. 목사와 싸워도 지는 전쟁이다. 설교에 은혜를 받지 못함이다. 하나님과도 마찬가지다. 지옥에 가기 때문이다. 아무 필요 없는 싸움을 왜 하는가? 마음의 정욕과 욕심 때문이다. 모든 싸움과 불화의 원인이 마음속에 이기적인 욕심에서 비롯된다. 창세기를 보면 선악과를 보는 순간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웠다. 그 욕심으로 선악과를 따먹어 죄가 들어왔다. 자기 아내를 향하여 책임 전가를 하였다. 부부간의 다툼이 생겼다. 형제간에도 마찬가지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도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욕심이다. 동생과 비교하면서 그렇게 해서 정욕으로 동생을 죽인다. 바벨탑 사건도 더 상승하려는 인간의 욕심 때문에 인류가 흩어지고 마는 사건이다. 모든 죄 모든 분쟁, 다툼, 싸움, 전쟁의 뿌리는 정욕인 것이다. 이 정욕은 영적인 것이 아니다. 물질적인 것이며 육체적인 것이며 세상적이다. 여기서부터 죄와 싸움이 비롯된다. 평화는 하늘로부터 내리는 지혜로부터 오지만 전쟁은 세상에서부터 오는 열매이다. 마음의 정욕과 사탄을 통해 거대한 전쟁터로 만들었다. 신앙생활하면서도 욕망이 분쟁의 불씨를 지핀다. 이 욕망을 추구하는데 방해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 무기를 만들어 사람들을 해하면서 죽인다. 야고보서 4장 2절을 보자. 욕심을 내면서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살인까지 해서도 얻을 수 없다. 그렇게 애를 쓰고 피해를 주면서도 그 싸움은 헛된 것이며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제가 기독교 윤리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는데 세상도 추구하는 가치가 있다. 그것은 구체적이다. 소유 지향적이다. 소유하는 것에서부터 힘이 나온다고 믿는다. 권력, 명예 같은 것들이다. 정욕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가치는 한정적이다. 가지려는 사람이 많으며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까 제로섬 게임이 되는 것이다. 레드오션이 된다. 기독교의 가치는 성경의 가치인데 궁극적인 가치를 가르친다. 평화, 자유 같은 고귀한 궁극적 가치이다. 무한한 가치이다. 독점할 수 없으며 나누면 나눌수록 커진다. 사랑이다. 구체적인 가치가 힘을 가지려면 궁극적인 것을 섬겨야 한다. 수단이 되어야 한다. 목적은 궁극적인 가치이다. 마태복음 6장 33절을 보자. 우리가 가진 권력, 재물이 나쁘지 않지만 바로 쓰이려면 궁극적인 것을 섬겨야 한다. 정의롭게 행사되어야 한다. 정의가 빠져버리면 이 세상의 힘으로 남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그렇게 되어 가치가 타락된다. 기독교 윤리의 가치는 사랑, 정의, 권력의 순서대로 나간다. 궁극적인 가치를 추구하면 세상이 아름답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책에 보면 '성공을 추구하느냐 순리를 추구하느냐'에 대해 나온다. 여기서 세일즈맨은 자살한다. 성공보다 순리가 더 중요함을 보여준다. 순리란 무엇인가? 인생의 순리는 어떤 직위를 갖느냐가 아니다. 인간의 온갖 귀한 것들은 획득되거나 소유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것이다. 거룩함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것을 사람에게 구하기 때문에 다툼과 싸움이 일어나며 그것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형제들이 가지려 할 때 형제끼리 다투지 말고 부모에게 구하면 또 생길지 모른다. 부모에게 구해서 얻는 것이 많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정당하게 얻는 방법은 서로 싸워서 얻는 것이 아니라 기도해서 얻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으로 기도를 얘기한다. 대인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아야 한다. 인간에게 오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부터 오는 것이다. 제가 113년 차 총회에 출마하기에 온갖 운동을 한다. 유익한 운동이 많다. 종합검진도 했다. 몸이 좋아야 교단 일을 할 수 있다. "목사님 3년 전보다 더 건강해지셨네요. 무슨 운동하세요?"라고 장로가 물었다. 저는 "선거 운동합니다."라고 답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운동, 하나님을 아는 운동을 해야 한다. 기도하는 릴레이 운동이 그것이다. 하나님 편에 서게 해달라고 기도해달라. 하나님 원하는 일이 교회에 이 땅에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여러분 자신을 위해 기도하자.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기도하자. 장로님들도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다. 지방 목사님들과 장로님들도 한 끼씩 줄이며 기도하고 있다. 회개와 자성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께 얻어 낼 수 있는 것을 사람에게 구하면 다툼이 일어난다. 엘리야는 연단을 많이 받았다. 흉년에 물도 말라가는데 시냇가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이 먹을 것을 공수해주신다. 까마귀를 통해 아침저녁으로 낙하시킨다. 까마귀를 섬길 수 있는가? 까마귀는 통로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까마귀지만 그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공급하는 통로는 바뀐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공급해주신다. 까마귀는 공급자가 아니며 통로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통로만 바라보고 통로를 믿고 구하니까 싸움이 일어난다. 공급자가 뒤에 계셔서 여러 사람과 사건을 통해 공급하신다. 누굴 믿는가?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에 본질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 뜻과 다를지라도 받아들이는 것이 응답이다. 마태복음 7장 7절을 보자. 기도했는데도 얻지 못하였는가? 동기와 내용을 살펴보자.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기도에 내용과 동기를 살펴보자. 하나님 마음에 들어야 하는 것이다. 솔로몬도 일천번제로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 마음에 든 것이다. 기도한 내용뿐 아니라 기도하지 않은 것도 챙겨주신다. 그 기도를 살펴보면 감사하는 기도이다. 내가 부족한 것과 자격 없음을 고백하였다. 그 기도는 겸손한 기도이다. 저는 어린아이인데 백성들은 너무 위대합니다. 제가 어떻게 섬기겠습니까? 재판하겠습니까? 그 기도의 내용이 달라야 한다. 성숙해져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 필요를 채워주시지만 욕심을 채워주시지는 않는다. 하나님도 채워주지 못한다. 정욕으로 쓸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기도를 낭비하는 것이다. 기도의 자리까지 나와서 손실을 보는 것이다. 기도조차 세상에 오염되었다면 어떻게 우리를 거두겠는가? 세상의 가치로 뭉쳐있다면 내가 변화하겠는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겠는가? 기도를 낭비하는 것이다. 기도가 오염된 것이다. 응답이 없는 것이다. 내가 기도한 데로만 움직이시지 않는다. 기도한 것보다 더 좋게 응답하신다. 마태복음 7장 11절을 보자.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따라서만 응답해주시지 않으시며 더 좋게 응답하신다. 야고보서 4장 4절을 보자. 세상에 벗이 될래? 하나님의 벗이 될래? 묻는 것이다. 양쪽을 같이 취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이다. 만약에 하나님 자녀이면서 이 세상과 벗한다면 영적으로 간음하는 것이다. 소유 지향적인 삶을 살라고 세상은 얘기한다. 예수님에 시험도 세상의 시험이었다. 우리 믿는 사람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4장 5절을 보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면서 감동시킨다. 만약 다른 것을 사랑하면 탄식하신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시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살면서 성령이 답답해함을 느끼는가? 책망하는 것을 느끼는가? 말씀하시는 것이 들리는가?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살아가야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며 복을 받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평화와 인생의 복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은혜와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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