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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6일
사람들은 “교회가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고들 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으로 말했느냐에 따라 옳은 말이 될 수도 있고 그른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옳은 말이 되려면 그들이 말하는 바 ‘교회’는 곧 실천적인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켜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을 이끈다’는 말은 어떤 그리스도인들(경제나 정치에 적합한 재능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경제학자나 정치가가 되어야 하며, 모든 경제학자와 정치가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하고, 그들은 정치 경제 분야에서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원칙을 실천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다른 이들이 그런 일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상당히 빠른 시간 안에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풀어낼 기독교적 해결책을 갖게 되겠지요.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이 교회에게 세상을 이끌리는 것은 대부분, 목회자들이 정치적 프로그램을 제시해 주길 바란다는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목회자는 ‘앞으로 영원히 살 피조물’로서의 인간에게 필요한 일들을 돌보기 위해 전체 교회 가운데 따로 구별되어 특별히 훈련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정치적 프로그램을 제시하라는 것은, 전혀 훈련받지 못한 생판 다른 영역의 일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일은 사실 우리 같은 평신도가 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노동조합이나 교육 분야에 기독교적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노동 조합원들과 그리스도인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이며, 기독교 문학은 그리스도인 소설가와 극작가가 해야 할 일(주교들에게 남는 시간에 모여 희곡이나 소설을 써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3장 그리스도인의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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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4일
종교는 사실에 관한 일련의 진술, 즉 참이거나 거짓일 수밖에 없는 진술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만약 그 진술들이 참이라면 인간이라는 선단의 바른 항해가 무엇이냐에 대해 일단의 결론이 나올 것입니다. 물론 그 진술들이 거짓이라면 아주 딴판의 결론이 나오겠지요.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일은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경우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그는 주변에 있는 다른 배에 손상을 입혀서는 안 된다는 점은 잘 이해하고 있지만, 자기 배는 자기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배가 그의 소유냐 아니냐에 따라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이를테면 내가 내 몸과 마음의 영주냐, 아니면 진짜 영주에게 그것들을 빌린 소작인에 불과하냐에 따라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만약 누군가 다른 존재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나를 만들었다면, 내가 단순히 내 것일 경우에는 부과되지 않았을 많은 의무를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게다가 기독교는 모든 인간은 영원히 산다고 주장하는데, 이것 역시 참 아니면 거짓입니다. 만약 우리가 영원히 사는 존재라면, 겨우 70년 정도 살다가 죽을 존재일 경우에는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는 아주 많은 것들을 놓고 고민해야 합니다. 예컨대 지금 나의 못된 성질과 시기심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고 합시다. 이것은 점차 진행되는 일이므로 70년이 지난다 한들 눈에 확 뜨일 정도로 심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100만 년 동안 계속된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지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기독교가 진짜 참이라면, ‘지옥(hell)’이야말로 이 상태를 정확하게 꼬집어 주는 용어라 할 것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3장 그리스도인의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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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문제에는 하나님의 죄 용서와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같은 부분은 용서가 양해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와 양해를 같은 것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자신들을 속이거나 괴롭힌 누군가를 용서하라는 말을 들으면 그들은 속임수나 괴롭힘 자체가 없었다고 설득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면 용서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그 사람은 가장 중요한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의 다음번 약속을 반드시 믿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마음에 남아 있는 원한과 상대에게 모욕과 상처를 주거나 앙갚음하고 싶은 욕망을 모두 없애 버리기 위해 정말 분투해야 합니다.)
이 상황과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상황과의 차이점은 이렇습니다. 우리 자신의 경우, 우리는 스스로의 구실을 너무나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구실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내 죄에 대해 늘어놓는 구실은 실제로 내 생각만큼 훌륭하지 않다고 봐도(확실한 정도는 아니라도) 무방할 것입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의 구실들은 내 생각보다 낫다고 봐도(확실한 정도는 아니라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의 잘못이 우리 생각만큼 크지 않음을 보여 주는 모든 것에 먼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죄가 전적으로, 철저하게 그의 잘못이라 해도 우리는 여전히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가 저지른 죄의 99퍼센트가 정말 타당한 구실들로 설명될 수 있다 해도, 용서는 남은 1퍼센트에서 시작됩니다. 양해할 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는 일을 양해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자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공정함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용서할 수 없는 부분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어렵습니다. 한 번의 큰 모욕을 용서하는 건 어쩌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일은 다릅니다. 들볶아 대는 시어머니, 윽박지르는 남편, 바가지 긁는 아내, 이기적인 말, 거짓말쟁이 아들을 계속해서 용서하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방법은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기억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매일 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할 때마다 진심으로 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는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비를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외가 있다는 암시는 전혀 없으며, 하나님은 결코 빈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영광의 무게>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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