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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6일
교회 안에서(교회 밖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별다른 생각 없이 아주 많은 말을 합니다. 예를 들면, 사도신경을 통해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저는 이 문구를 몇 년 동안이나 되풀이하다가 이것이 왜 사도신경에 있는지 자문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 문구는 사도신경에 들어갈 가치가 없는 듯 보였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당연히 믿지, 말할 것도 없잖아.” 그러나 사도신경을 작성했던 사람들은 이것이 우리가 교회에 갈 때마다 상기해야 하는 신앙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제 경우에는 그들이 옳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죄 용서를 믿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나마도 계속 상기하지 않으면 아주 쉽게 잊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고 믿지만, 우리에게 죄지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고도 믿습니다. 이 두 번째 부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기도문에 있고, 우리 주님이 강조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 중 이만큼 분명한 부분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없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의 죄가 그리 끔찍하지 않거나, 정상 참작이 되는 경우에만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게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야 하고, 그것이 아무리 끔찍하고 비열하고 자주 되풀이되더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 역시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영광의 무게>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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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5일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죄를 회개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가끔 가상의 죄라도 회개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죄를 회개하는 젊은이들에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이보다 다소 복잡합니다. 잉글랜드는 하나의 자연적인 주체가 아니라 시민 사회입니다. 따라서 잉글랜드의 행위라고 하는 것은 실상 영국 정부의 행위를 말합니다. 젊은이에게 잉글랜드의 외교 정책을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이웃의 행위를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외교부 장관이나 각료 장관은 이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정죄를 전제로 합니다. 그러므로 국가적 회개의 으뜸가고 치명적인 매력은 우리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괴로운 일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슬퍼하는-그러나 우선 비난하는-신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자신이 하는 일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젊은이들이 분명히 알게 된다면, 그는 분명 사랑의 원리(law of charity)를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불행히도 국가의 죄를 회개할 때 쓰는 표현이 그 진정한 본질을 감추고 있습니다.
참회자는 위험한 수사적 표현을 사용하여 정부를 ‘그들’이 아니라 ‘우리’라고 부릅니다.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말고 자신에게는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해서는 안 되는 입장이므로, ‘우리’라고 불리는 정부는 ‘사실상(ipso fac-to) 사랑의 영역은 물론, 정의의 영역에도 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참회자는 정부에 대해 무슨 말이건 하고 싶은 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거침없는 비난이라는 널리 퍼진 악을 마음껏 저지르면서도 줄곧 자신이 참회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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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2일
만약 예수가 인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라면 그의 고통과 죽음은 “그에게 지극히 쉬운 일이었을 것이므로” 아무 가치가 없지 않으냐고 불평하는 이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반발을 배은망덕하고 무례하다며 나무라는 사람도 있겠지요(이런 나무람은 아주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선뜻 그렇게 못하는 것은 그들이 무언가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 이 말에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주장은 옳습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생각보다 더 옳은 주장일 수도 있습니다. 완전한 순종, 완전한 고난, 완전한 죽음은 예수가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더 쉬운 일이었을 뿐 아니라, 오직 그가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유 삼아 그의 순종과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 같지 않습니까? 선생님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글씨를 써 주는 것은 그가 어른으로서 글씨 쓰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생님은 아이보다 더 쉽게 글씨를 쓸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이를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글씨 쓰는 것은 어른에게 쉬운 일’이라는 이유로 선생님의 도움을 거절하고 글씨 쓸 줄 모르는(따라서 ‘불공평한’ 이점을 갖고 있지 않은) 다른 아이에게 배우겠다고 우긴다면, 글씨 배우는 일은 아주 지지부진해지고 말 것입니다.
제가 급류에 빠졌는데, 강둑에 한 발을 딛고 있는 어떤 사람이 저의 목숨을 구해 주기 위해 팔을 뻗었다고 합시다, 그 때 제가 “아니, 이건 불공평해! 당신은 지금 유리한 위치에 있잖아! 강둑에 한 발을 디디고 있으니까”하고 (물에 빠져 숨을 헐떡거리면서) 소리쳐야 마땅하겠습니까? 그가 가진 이점-여러분이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는-이야말로 그가 저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자기보다 강한 존재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순전한 기독교> 2장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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