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21장 18~23절
우리가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책망을 여러 번 하셨다. 믿음이 작은 것에 대해 책망하셨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왜 염려하느냐." 제자들이 믿음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후에 다 도망하였다. 베드로 같은 수제자도 주님을 모른다고 하였고 저주까지 하였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들었을 때도 미지근하게 반응하였다. 그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예수님이 직접 찾아가셨을 때도 미지근하였다. 주님이 살아서 오셨는데도 가만히 있겠는가? 그런데 제자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심판의 부활과 생명의 부활이 있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제자들에게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임을 여러 번 얘기하셨었다. 제자들은 기뻐하지도 감동하지도 않았다. 그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물고기 잡으러 떠났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들의 사명을 다시 확인시켜주셨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네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6장 38~39절을 보자. 반드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양인 것이다. 이것이 제자들의 사명인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는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리가 직장에서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고, 살림하다가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일 복된 사람은 주님의 일에 충성하다가 맞이하는 자인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44~46절을 보자.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람들에게 신령한 말씀을 가르치고 같이 은혜받으면서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이 제일 복 있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주님의 사명을 열심히 하다가 보면 자신의 신앙이 건강해진다. 장차 받을 상급도 크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결심을 하여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양들을 인도해야 한다. 로마서 8장 17~18절을 보자.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은 머리로는 잘 안다. 실제로는 복음을 위해 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첫째로는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과거에 집착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내가 뭘 그런 것을 하노?"라고 생각한다.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물고기나 잡을 생각만 하였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나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 주님을 위해 나설 용기가 사라진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해방돼야 한다. 하나님은 과거를 보지 않으시고 현재를 보시기 때문이다. 왜 자신의 과거에 집착하는가? 매이지 말아야 한다. 에스겔 18장 21~23절을 보자. 아무리 죄를 범한 악한 인간이라도 돌이키면 그 사람의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얼마나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 축복과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른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들이 죽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돌이키시는 것을 좋아하신다. 누가복은 15장 11~24절을 보자. 우리가 돌이켜서 주님 앞에 나올 때 과거를 보지 않으시는 것이다. 돌이키는 그 모습만 보시는 것이다. 아무리 큰 죄인도 돌이키면 산다. 누가복음 15장 7절을 보자.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과거에 절대 매이지 말자.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어제에 우리도 보고 있지 않으시다. 지금에 나를 보고 계신다. 믿음으로 사는 것 같은데 주님의 복음을 위해 나서지 못한다. 성령의 충만함이 없어서 그렇다.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는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까지 기도하지 못해서 그렇다. 많은 박사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불을 받을 때까지 기도하지 않는다. 확실하게 기도하지 못한다. 성령의 불을 받을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로 있을 때 "나는 이렇게는 못살아."라고 하면서 불광동 산에 올랐다. 아예 벼량 끝에 앉아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틀이 지났다. 억울해서 못 내려갔다. 화요일 밤에는 절벽 끝에서 "오늘 밤에 끝장낸다. 떨어져 죽든지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불은 안 주시고 물벼락을 주셨다. 소나기가 억수같이 내렸다. 완전히 내복까지 다 젖었다. 기도하다가 화가 났다. 달라는 성령의 불은 안 주고 물벼락을 주셨다. 저는 있는 힘을 다해서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였다. 부르짖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이 임했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해가 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많이 지났는지 계산하기 어려웠다. 목도 완전히 쉬었다. 수요일 집회 때 성도들이 알아보았다. 성도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 일생이 완전히 달라졌다. 평생 복을 많이 받았다. 우리에게도 큰 문제가 있는데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미지근하게 평생 살 것인가?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해보자. 어떤 문제이든지 기도하다가 은혜받은 간증과 주님 만난 간증과 인생이 완전히 바뀐 간증이 있어야 한다. 왜 간증 거리가 없는가?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까지 기도하지 않는다. 휴대폰과 시계도 보지 말자. 금식하며 기도해보자. "이번에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라는 각오로 기도하자.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 성령의 권능을 받는다.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21장 18~19절을 보자. 베드로가 죽음으로써 영광 돌리게 됨을 말씀하신다. 더 이상 한 눈 팔지 말고 목숨 걸고 충성하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처럼 충성하라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그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 가장 강해지는가? 목숨을 걸 때이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을 보자.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이다.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큰 일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공군 군목으로 있을 때 부대를 섬겼다. 전 장병을 믿게 만드리라는 뜻을 품었다. 매일 기도하였다. "내가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밝혀 죽었는데 네가 전 장병을 믿게 하려면 얼마나 희생하여야 하는 줄 아느냐?"라고 물으셨다. 막상 죽음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주님 죽어도 좋습니다. 전 장병 예수 믿게 해 주세요."라고 대답하였다. 퇴근한 후 사모에게 "여보 미안하지만 친정에 가서 얻어먹고살아. 월급 받아 전도하는데 다 사용해야 하겠어."라고 하였다. 밤 1시에 커피 끓여 과자봉지와 함께 보초들부터 전도하였다. 그들은 얻어먹었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그들을 붙잡고 기도하였다. "아버지 군대에 와서 고생하는데 건강한 몸으로 제대하게 해 주세요. 이 아들이 성공을 해서 이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였다. 그 얘기를 들은 부대장이 감동받아 주일에 나왔다. "왜 왔어요?" 물었더니 예배드리러 왔다고 하였다. 사무실에 가더니 전 장병을 나오라고 하였다. 장교고 사병이고 다 나왔다. 교회는 어느새 꽉 찼다. 교회 바깥에도 서 있었다. 연말이 되니 부대장이 전 장병을 신자화 하겠다고 하였다. 자신은 예수 믿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선언하였다. 십계명과 주기도문, 사도신경을 외우게 하였다. 그래서 전 장병이 세례 받는 기적이 일어났다. 3년간 일어난 일이었다. 장교 부부가 성가대를 하였고 전 장병이 예배를 드렸다. 목숨을 걸고 목회하였다. 얼마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는지 모른다. 사도바울도 가는 곳마다 제자가 일어났다. 목숨을 걸로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마지막을 말씀하신 것은 새로운 각오와 결단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저는 늘 기도하는 게 있는데 "끝까지 복음 전하다가 순교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한다. 전 세계 각 나라를 다니며 집회를 한다. 여러분에게도 소원이 무엇인가? 첫째로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해 주세요. 둘째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한다. 다른 복이 다 따라온다. 그런데 요한복음 21장 20~22절을 보자.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는 사도 요한이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만찬 때 주님의 품에서 물었다.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가롯 유다임을 말하셨다. 요한복음 21장 22~23절을 보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지막에 대해 알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 유익이 되는가? 그 사람의 마지막을 안다고 하면 자신이 선지자인 것처럼 교만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미래를 아는 것이 교만하게 하며 하나님 일을 하다가 망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볼 때도 그 사람의 마지막에 대해 추측을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사람도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 그가 오늘 밤에도 변화할 수 있기에 판단하면 안 된다.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에게서 본받아야 할 것을 생각하고 조금 못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잘 되기를 축복하고 안아줄 마음으로 도울 생각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다. 주님은 항상"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너는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얘기하신다. 우리도 끝까지 다른 생각 말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마가복음 10장 28~30절을 보자. 부자는 천국에 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든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면 주님의 말씀대로 되는 것이다. 고난과 박해가 있을 지라도 백배에 복을 받는 것이다. 장차 받을 상급과 영광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 갖지 말고 주님만 따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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