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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변증학과 현대사상을 가르치고 있다. 3년 전까지 그리니치 한인교회에서 담임으로 17년 정도를 사역했다. 지금은 인디애나 주에 살고 있다. 그리니치 한인교회가 창립 19년을 맞았다. 약속을 해 놓았는데 가는 길에 초청하셔서 왔다. 한국 교회와 이민교회에 염려를 나누었다. 공감도 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었다. 생기를 넣었더니 생명체가 되었다. 하나를 더 만드셨다.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 베필은 짝이다. 똑같은 2개이다. 아담과 똑같은 사람을 하나 더 만드셔서 돕게 만드셨다. 아담을 만드실 때처럼 해도 되는데 에덴동산에 질 좋은 흙도 많은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아담이 잠들었을 때 갈빗대를 꺼내서 하나를 더 만드셨다. 처음 하나였으나 둘로 나누어졌다. 그래서 아담이 하와를 보았을 때 "이번에는 내 뼈에서 나온 뼈 내 살에서 나온 살이니 여자로 부르겠다."라고 하였다. 원래는 하나였다. 이게 바로 사람이다. 보통은 부부에 이야기만 하는데 그렇지 않다. 하나가 둘이 되었다가 둘이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이요 사람이다. 우리이다. 오늘 본문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이다. 예수님께 영생을 물었다. 사람은 누구나 영생에 관심을 갖고 있다. 다른 종교를 봐도 무언가 하라고 한다. 주님이 답을 주었다. 답을 질문 형태로 주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되어있으며 너는 어떻게 읽느냐?" 이미 답이 있다. 율법은 성경이다. 구약이다. 주님은 "영생의 길은 성경에 있지 않느냐?"라고 하셨다. "이것이 곧 나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명백한데 사람마다 다르게 본다. "너는 성경에 어떤 말씀이 영생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신다. 율법 교사는 "내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제법 잘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님은 더 말씀하시지 않고 그대로 행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살리라." 실천하면 영원히 산다는 말이다. 그런데 또 다른 질문을 한다.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정작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었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데 그 이웃이 누구인지 고민한 것이다. 실천하기도 전에 이론적으로 고민을 한 것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사람이다. 아파트로는 층, 열과 같은 것이다. 한인교회도 이웃이다. 유대인들도 똑같이 이웃을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고 정의하였다. 유대인이라는 한계를 넘지 못했다. 밖에 사는 사람은 이웃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절대 이웃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는데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사마리아는 원래 유대인이다. 외적 하고 통혼하고 우상 숭배해서 혼합이 된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은 경멸하였다. 왕래를 할 때도 돌아갔다. 보기 싫어서이다. 미워했다. 절대 사마리아 사람은 아닌 것이다.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이 말은 제한하는 것이다. 솔직히 바꾸면 "사마리아 사람은 설마 아니겠지요?"이다. 주님은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동안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이 폭행했는데 반죽음을 만들었다. 도망을 갔다. 한 제사장이 그 사람을 보고 지나가고 레위 사람도 보고 지나갔는데, 사마리아 사람이 출장 가다가 그 사람을 보았다. 일단 응급 처치하고 숙소에 가서 돌보아 주고 주막 주인에게 도움을 부탁하였다. 이것을 얘기하시고 "이 세 사람 중에 강도 만난 사람에 이웃이겠느냐? 물으셨다. 바꾸면 "누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이다. 차이는 그 사람이 나의 이웃이 아니고 내가 그의 이웃이 되는 것이다. 유대인의 관심은 범위가 어디까지 인가에 대해 물었지만 이웃의 정의를 하셨다. 내 사랑을 받을 누군가가 아니가 내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된다. 순서를 뒤집으셨다. 내 이웃이 먼저 있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내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핵심은 누가 누구인지 따지지 말라는 말이다. 가리지 말라는 것이다. 누가 우리 이웃인가요? 전부이다. 질문에 뜻을 묵상하자. 비유에도 비슷한 것이 있다. 질문이 "사마리아 사람은 사랑하지 않아도 되지요?"이다. 거꾸로 바꿔서 뒤집으셨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 교사처럼 같은 직종에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이 사람들의 행동은 하나님 사랑과 정반대이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도 잘 모르지만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킨 것처럼 주님께서 비유로 들려주신 것이다. 핵심은 마음이다. 불쌍히 여겼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사마리아 사람은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인간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인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무시했다. 종교적으로는 거룩한 모습을 가졌을지언정 인간 이하가 된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의 문자는 몰랐지만 율법의 정신은 가지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실천했다. 정성을 다해 도왔다. 우리가 제사장과 레위인 사마리아 사람을 비교했을 때 종교적 행동과 일상의 행동의 괴리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 생활하며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알고 교회 봉사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고 이런 것이 중요하지만 인간다움이 없다면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알 것이다. 사랑, 희락, 자비.. 정말 멋진 인간이 되는 것이다. 사람다움을 갖게 된다. 주님의 비유 가운데 중요한 단어는 반죽음이다. 그런데 한국 개역성경만 빠져있다. 생사에 기로에 있다는 것이다. 그 말 듣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반 살았다. 가능성은 2가지이다. 그대로 죽을 수도 있고, 삶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이 삶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이 자비는 죽음에서 건져준 자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산다고 하였다. 방법을 물어보았기 때문에 이 비유를 던지신 것이다.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다. 그 뜻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자비를 베풀어서 삶으로 불러들여 살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라 뒤에 하나 더 필요한데 그 말씀은 안 하셨다. "너 역시 살리라. 영생을 얻을 것이다." 이것을 뒤집으면 이웃을 살리지 않으면 너도 못 산다는 것이다. 이웃을 살리는 것이 내 목숨과도 연결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이며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로 연합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사실 깨어져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도 깨진다. 아담과 하와 사이를 보자. 돕는 짝으로 만드셨는데 싸우고 경쟁한다. 남녀불평등이다. 남자와 여자만이 아니다. 부모와 자녀도 마찬가지다. "네가 애를 낳을 때 고통할 것이다." 부모 자녀가 갈라진다. 창세기 4장에서는 가인이 아벨을 쳐 죽였다. 죄가 갈랐다. 모든 사람이 갈라져서 싸운다. 남을 짓밟는다. 주님은 "네가 다른 사람을 못 살리면 너도 죽는다."라고 말하신다. 이웃은 나와 가까이 사는 사람이 아니다. 이웃은 사람이다. 사람은 모두 이웃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는 우리가 반죽음 상태이다. 생사에 기로이다. 이웃을 살리느냐 살리지 않느냐에 따라 삶이 결정된다. 우리의 이웃은 육신이다. 주님만이 영적으로 살릴 수 있다. 영생은 영원의 목숨이다. 질적인 차이를 알자. 공로 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 재물로 시간으로 사랑을 베푼다. 그런데 이것이 뭐가 대단한가? 영생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왜 주실까? 우리 주님이 먼저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이 왜 행해야 한다고 하시는가? 우리 삶에 열매가 없다면 가짜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주님 사랑해요라고 하면 가짜라는 것이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로 접붙임 된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해야 된다. 사람답게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자. 제가 미국에서 27년을 살다가 학기마다 한국에서 가르친다. 학교 친구들은 지금 완정 경쟁뿐이다. 저 사람을 제거해야 내가 산다고 퍼져있다. 이런 마인드가 퍼져있다. 사회 모든 면에서 같이 죽어간다. 핵심은 돈이다. 경제적 문제이다. 빈부격차이며 돈 독에 올랐다. 이 주범이 교회이다. 돈 독에 든 인간들 사이에서 독을 빼야 하는데 번영 복음이라는 가짜 복음이 들어섰다. 번영은 "돈은 하나님의 축복이다."라고 뒤집었다. 교회가 타락하고 세상이 타락하였다. 지식이라든지 지위라든지 권력이라든지 자동차라든지 같은 것이다. 차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조국에도 다른 인종이 많이 들어온다. 어떤 사람은 멸시하고 어떤 사람은 도와준다. 이럴 때 우리가 성경적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난민 이슈도 심각하다. 세계를 떠도는 이민이 많다. 크리스천은 배척하지 말아야 한다. 이슬람 사역하시는 분도 많다. 우리는 말씀에 원리로 나가야 한다. 한인은 정착을 잘한다. 고생하는 다른 이민자도 많다. 우리 조국을 위해 기도하자. 남북이 가까워지고 있다. 한국은 뒤집어지고 있다. 조국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 통일은 천천히 되어도 된다. 그러나 평화는 아니다. 이 모든 기도할 때 원리를 알아야 한다. 남쪽이 서로 갈라져 있다. 남쪽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든지 성경의 가르침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안보이신다. 이웃만 보인다. 이웃을 살리자. 그 일을 할 때 가장 기억할 것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자. 은혜가 원동력이다. 누가 죽어가는 그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 그래도 율법 교사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하지 않고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우리 이야기다. 말씀을 거듭 듣고도 도망하는 우리 마음을 꿰뚫어 본 것이다. 우리하고 생각이 다르면 사마리아 취급해버린다. 우리끼리만 살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도 죽는다. 무지이다. 사람은 사랑이다. 하나이다. 함께라야 한다. 살아있는 것이 사람이다. 먼저 우리를 살려 주셨기에 영생의 길을 알고 그 길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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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롭다 하심을 받은 복
로마서 5장 1~11절
감사함으로 찬양 329 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도다
감사함으로 찬양 327 주님 큰 영광 받으소서
감사함으로 찬양 226 그 사랑
감사함으로 찬양 203 그 사랑 얼마나
감사함으로 찬양 415 나는 믿네
감사함으로 찬양 424 주의 나라가 임할 때
감사함으로 찬양 303 그리스도의 계절
감사함으로 찬양 318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감사함으로 찬양 30 한라에서 백두까지 백두에서 땅끝까지
감사함으로 찬양 311 예수 우리 왕이여
감사함으로 찬양 381 세상이 당신을 모른다 하여도
감사함으로 찬양 246 주님과 같이
감사함으로 찬양 409 주 은혜임을
감사함으로 찬양 319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감사함으로 찬양 423 영광의 이름 예수
감사함으로 찬양 5 불을 내려주소서
로마서는 복음을 알기 가장 좋은 서신이다. 로마서를 통해 복음의 비밀을 깨닫고 약속한 은혜로 나아가자. 로마서 5장 1절을 보자. 앞에서 "로마서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아무도 그것을 피해 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자신이 처한 공경과 처지를 알지 못하면 복음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2가지 방식이 있다. 전도지로 전하는 것이다. 유익을 얘기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더 많은 것을 얻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로마서 방식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있는 처지에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로마서 3장 20절까지는 구원받을 수 없는 전무 한자라고 소개한다. 로마서 3장 21절부터는 새로운 하나님의 의를 소개한다. 예수 그리스도이다. 믿음으로 그가 내 밖에서 모든 죄를 대속하여 죽음으로 모든 죄를 해결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21절 영어성경에는 '그러나' 접속사가 들어가면서 소망이 전무한데 새로운 길이 열렸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4장 17절에 있다. 아브라함의 고백이다. 자신이 100세가 되어도 몸이 죽은 나무토막 같아도 상황이 좋지 않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믿음이 더 견고해진다. 그것이 바로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 것이다. 드디어 5장에 와서는 그것이 어떤 복인지 설명한다. 로마서 5장 1~2절을 보자. 세 가지 복이 나온다. 첫째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기 전에는 하나님에게 떠나 죽은 자였다. 적대적 관계였다. 모든 불신자들은 진노 가운데 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가운데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진정한 복이 화평이다. 나아갈 때 기뻐 받아 주신다. 자유와 해방이다. 어떤 상황일지라도 우리는 늘 화평한 관계로 나아와야 한다. 지은 죄가 많아도 나아와야 한다. 사탄의 정죄에 넘어가지 말자. 갈라디아서 3장 26~27절을 보자.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전부 갈아입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보이는 것이다. 복음이다. 개별적인 죄를 직접 보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통과하여 보신다. 날마다 의로운 자로 화평 안에 있는 자로 보신다. 누군가 횡당보도를 지나다가 "당신은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라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하여야 할까? 그분이다. "의인입니다."라고 얘기하여야 한다. 이러면 그분이 "최근에 죄를 지은 적이 있냐?"라고 물어보면 "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죄인이네요."라고 얘기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 교회에 가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속일 것이다. 그때는 "죄를 지은 의인이다."라고 얘기해야 한다. 루터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의인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로마서 1장 17절을 보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인이면 죽지 않아야 하는데 내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다. 우리는 한 번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선 적이 없다. 사탄의 정죄와 속임에 넘어가면 안 된다.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누리자. 우리가 믿음으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다시 태어난 것이다. 새로운 빛과 세상을 본 것이다. 그리고 자라게 하신다.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기도하고 부르짖는 것이다. 우리의 중심이 바뀌었다. 이것이 핵심이다. 죄는 몇 가지 짓는 죄도 죄이지만 이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이다.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나를 의뢰하라." 죄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다. 우리를 책임져주신다. 잠깐 근심할 수 있지만 돌아와야 한다. 요즘은 너무 덥고 습하다. 원망과 불평이 나온다. 염려한다. 근심한다. 더우면 에어컨과 선풍기를 켜라.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어라. 염려 오면 기도하자. 두려움 오면 기도하자. 기도하면서 염려하지 말자. 푸념과 원망하지 말자. 감사함으로 나아가자. 받아주시고 책임져주신다. 생각이 능력이다. 삶과 인생을 바꾼다. 기대할 때 모든 염려가 떠나간다. 절대 망하지 않는다. 못해도 천국이다. 해피엔딩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자. 필립스 브룩스 목사는 "당신에 힘에 맞는 일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라." 하나님의 원대한 비전과 꿈을 보자. 꿈과 비전을 구하자.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에서 끝내지 말고 기도할 때 눈을 열어주시고 보여주시고 능력을 보여주신다. 하나님께 마음껏 쓰임 받자. 죄를 이기고 변화시키자. 화평한 관계 가운데 쓰임 받자. 두 번째 복은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 믿음으로 은혜에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들어갔다는 단어는 영어로 들어감의 특권이다. 권세를 얻은 것이다. 들어가는 자리는 하나님의 임재이다. 원래는 못 들어갔다. 아담이 범죄 하여서이다. 아무도 나갈 수 없었다. 하나님을 보면 죽는 것이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옷자락을 보면서 "화로다. 나로 망하게 되었도다." 하였다. 요한계시록 1장에 "부활의 주님을 보자 해와 같이 빛나며 죽은 자 같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다 죽는 것이다. 지성소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죄가 해결 받는다. 은혜를 입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휘장을 갈랐다. 모든 사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특권. 주님은 우리 작은 기도에도 귀를 기울여 주신다. 구하면 들어주시고 응답하신다. 담대함과 확신을 갖자. 요한복음 1장 12절을 보자. 자녀 되는 권세를 주었다고 하셨다. 우리가 자녀이면 그분은 아버지이시다. 그래서 요한복음 16장 23절에 보면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에게 구하면 주시리라."라고 하였다. 구약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수 없었다. 예수님이 오시자 하나님을 향하여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늘 기도할 때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헬라어에는 아빠라는 단어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바 아버지"라고 하셨다. 아빠처럼 부르라는 것이다. 지금 성경은 아빠 아버지라고 되어있다. 번역해 버렸다. 미국에 장로님들은 기도하실 때 거룩하신 하나님을 높이며 존칭 하시지만 기본적으로 아빠 아버지이시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핵심은 '아빠'이다. 기도하라는 것이다. 밤늦게 딸이 들어오면 야단치지만 다음 날 아버지한테 "만원만.."이라고 하면 다 풀어지는 것이다. 우리를 아들 삼아 주신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구해야 한다. 이방인처럼 하면 안 된다. 다 들어주신다. 이 밤에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 기도가 안되는가? 기분 탓일 수는 있지만 다 듣고 계신다. 뜨겁게 기도하지 않고 차갑게 기도해도 들어주신다. 자녀가 학교 갔다 와서 뜨겁게 "밥 주세요." 하면 한 대 맞을 것이다. 그냥 구하면 되는 것이다. 구하면 안 들어주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크신 분임을 기억하자. 돈이 필요해서 돈을 달라고 하는데, 하나님 입장에서는 더디 주시거나 안 주시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기도는 타내는 것이 아니다. 신뢰하는 것이다. 형편을 잘 아신다. 신뢰를 키우자. 간구하자. 형식으로 배우지 말자. 금식하면 받는다? 이렇게 해서 받는다고 하면 속는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케 되자. 상황은 어렵고 부재하신 것 같지만 그분의 평강 안으로 들어가자. 세 번째 복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나아가면 다 받아주시고 자녀의 목소리를 다 들어주시지만 더 즐거워하는 것이다. 마지막 때의 영광을 소망하는 것이다. 그 영광을 경험한 자는 생명을 드리는 것이다. 순교하는 것이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남의 일이라고 감흥이 없지만, 죽을 때까지 맞는 것이다. 돌이 산이 되도록..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을." 그 고통이 고통이 아닌 것이다. 로마서 8장 18절을 보자. 그 영광을 보자. 더 나아가면 갈수록 사모하자. 이 땅에 반짝이는 보석이 빛을 잃을 만큼이다. 마라나타를 늘 부르자. 신랑 되신 주님이 오실 때 그 환희와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말씀을 느낌으로 받지 말자. 다 날아간다. 말씀은 능력이다. 수많은 일들이 있을 때 붙들자. 의심과 염려가 닥쳐오지만 되네이자. 이 말씀을 믿자. 이 땅에 마음을 두지 말자. 성령의 검이 되어 사탄을 무찌를 것이다. 3가지 복을 생각만 해도 너무 좋지만 삶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환란과 시험이다. 로마서 5장 3~4절을 보자. 우리는 환란 속에서도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환란은 이 땅을 살기 때문에 겪는 것이다. 시험과 조롱과 멸시가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도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환란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만들어 낸다. 검증단 신앙인격을 연단이라고 한다. 시험을 통과하면 검증된 신앙인격이 나오는 것이다. 토기를 200도로 구우면 옹기가 된다. 이것은 쉽게 깨진다. 유약을 바르고 500도부터 1200도까지 높이면 유액이 진흙과 연합하여 화학적 변화로 크리스털로 바뀐다. 단 하나의 틈새도 생기지 않는다. 백자가 된다. 청자가 된다. 연단하여 깨끗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우리를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피할 길을 내실 것이다. 환란이 안 계시는 분 있는가? 환란이 올 것이다. 더 큰 은혜가 있음을 믿자. 혹 내가 넘어지지 않을까 생각되면 5장 5절을 보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다 부어지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순간 다 부어진다. 언제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는가? 최악일 때, 나 만을 위하여 마음껏 살 때, 사방이 다 막혔을 때 우리를 위하여 부어주시는 것이다. 5장 8절을 읽어보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희생이다. 주님이 죽으신 것이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죄를 사하신 것이다. 어제 어떠한 상황이든지 그냥 받아 주실 것이다. 아버지 노릇해 주실 것이다. "나를 의지하라. 내가 책임져 주리라." 그 영광에 압도당하여 살게 될 것이다. 그 은혜를 향유하고 누리자. 기뻐하고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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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1~5절
4절 전반부 설명이다. 말씀이 곧 예수님이다. 말씀이라는 말을 예수로 바꿔서 읽어보자. 예수님은 과연 그가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기에 이렇게 많이 모여들게 하는 것일까? 2000년 동안 그의 이름을 많이 부르는 자들이 생겨날 수 있는가? 아무리 진리가 위대하여도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진 않는다. 없다. 예수. 그가 죽어서 무덤에 갇혀 있었다면 과연 이런 일이 있었을까? 저희 부모님은 이북에서부터 예수를 믿었다. 그래서 저는 행운아였다. 찬송가와 기도소리를 들었다. 환경이 기독교적이었다. 하루에 2번씩 가정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이성에 눈을 뜨고 성숙해졌을 때 질문이 던져졌다. 그분을 경험해 본 일이 없었다. 안 믿으면 집에 못 들어가서.. 교회는 너무 재미있었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과연 살아 계시는 것일까? 의심이 들었다. 3가지 질문이 있었다. 재수를 한 것도 축복이었다. 그것이 인생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했다. ccc라는 학생 수양회에 참여하였다. 겉으로는 예수를 잘 믿었던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님을 뚜렷하게 보았다. 회의와 갈등과 크리스천 가정에 있었지만 어느 날 새벽에 주님이 찾아오셨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격은 정말 생생했다. 무려 30년 전이지만 말이다. 피 묻은 손으로 와서는 "너를 2000년 동안 기다렸다. 너를 사랑했노라." 그 사건은 너무나 선명했다. 회개가 되었다. 주님 안에서 녹아졌다. 의심하는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셔서 축복해주길 바란다. 확실하게 믿게 된 계기였다. 두 번째 확실하게 만났던 기억은 대학 3학년 때이다. 예수에 미쳐 살았다. 낮이고 밤이고. 전도하는데 대학생활을 바쳤다. 밤늦게 전도하고 만원 버스 속에서도 만나기만 하면 사 역리에 대해 얘기하며 못살게 굴었다. 폐 병에 걸렸다. 한 학기 휴학했다. 치료를 받는 밤 1시에 성경을 아주 많이 읽었다. 인생에 있어서 집중적으로 읽는 때가 있다. 그런 때에는 미치도록 읽어야 한다. 어떤 때는 안 읽어지는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성경이 내 마음에 밤이 맞도록 읽을 때가 있다. 그때가 있기를 바란다. 한 문장 한 문장이 폭포수 같다. 밤 1시에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고. 비정상 같았다. 아주 뚜렷한 환상에서 문을 여시고 찾아오셨다. 문을 두드리셨다. 비 오는 날 두드리는 소리 때문에 나가서 모셨다.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이셨다. 푸른 초장으로 변하였다. 보따리에는 "내가 너를 사랑해."라고 적혀있었다. "네가 나를 위해 종이 되지 않을래?" 그래서 목사가 되었다. 어머니도 꿈을 꾸었는데 다짜고짜 와서는 "너 목사가 되어라."라고 하였다. 어느 날 군대에서 폐 병이 찾아왔다. 의병제대를 하였다. 나와서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생각했다. 제게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요즘은 주님이 직접 나타나지는 않으신다. 말씀으로 주신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날마다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은혜를 주시는 주님. 설교하는 중에도 역사하신다. 회복하시고 구원하시고 사람을 변화시키신다. 주님이 그때 거기를 지나갔구나. 거기를 지나갔구나. 깜짝깜짝 놀란다. 내가 만질 수 있는 주님보다 만지지 않아도 확실하신 주님. 온누리교회를 이 만큼 성장시키신 분은 주님이다. 곳곳에 계신다. 설교할 때마다 주님이 계신다. 저는 이 사실을 믿는다. 직접 목격했던 예수님. 격려해주신 예수님 보다도 확실하게 우리 가운데 계신다. 감당하는 많은 일을 겪을 때 거기 계셨다. 하나님은 부모와 같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습관적으로 믿었을 때는 관념적이었다. 모든 것은 형식과 전통이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난 건 아니었다. 내가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만난 것이다. 그분이 먼저 사랑하셨다. 그분은 실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다. 인간 예수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만 구원을 주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은 흠모할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 마태복음, 누가복음,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렇지 않다. 태초부터 시작한다. 예수의 기원을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시작한다. 그는 실로 하나님이셨다. 인간 예수이냐?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냐? 이 문제로 싸운다. 천국을 누가 아냐? 이렇게 자유주의는 얘기한다. 예수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남자의 씨로 예수님이 태어나지 않았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 몹쓸 인간들은 예수님이 사생아라고까지 말한다. 남자의 씨로 태어났다면 그도 죄인인 것이다. 그가 신성이기에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이시다. 말씀으로 존재하셨다. 밤새도록 감탄할 지경이다. 붙잡을 수 없다. 그 하나님이 어떻게 나와 같은 죄인 안에 들어올 수 있나?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예수님으로 보여주신다. 만질 수 있다. 선명하게 그릴 수 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다 보여주셨다. 그 하나님이 말씀으로 표현된 것이 기가 막힌다. 내 손에 잡힌다. 관념이나 이론이 아니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듯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이 실감 난다. 그는 나를 붙드신다. 내 잔을 넘치게 만드신다. 시편에 살아있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내 삶에 개입하신다. 설움과 한숨, 고통을 아시고 회복하신다. 인간적이며 실제적이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실체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실체이다. 33년 동안 역사적 시점에서 사셨다. 부활 승천 오셔서 우리에게 계신다. 지금 이 자리에 마음속에 내 기도 속에 찬양 속에 거하신다. 이것이 찬양이다. 예배이다. 기도이다. 우리의 신앙은 허구가 아니다. 그 어떤 분과 매일 함께 있는 줄 믿는다.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자. 성경 하나면 족한 것이다. 오늘 저녁에 읽자. 그러면 예수님이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과 말은 다른 것이다. 깊은 잠을 주신다. 우울한 나에게 기쁨을 주시고 복음으로 담대하게 하고 나를 내어 줄 수 있게 변하게 하신다. 설교를 계속 들으면 변한다. 듣고 또 들어라. 어린양 같이 순해진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능력 변화의 실체이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2~3절을 보자. 예수님의 본질은 인간 이상의 존재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예수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인간 이상의 존재이어야 한다.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천지 창조하셨다. 함께 하셨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진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은 없느니라. 골로새서 1장 15~17절을 보자. 놀라운 얘기다. 예수님이 천지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만드신 것이다. 지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잘 아신다. 체질 약점도 아신다. 그래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철저한 죄인임에도 교활함에도 나를 사랑하신다. 대부분 결혼도 모르고 한다. 어떤 사람은 50년 만에 깨닫는다. 다 숨겨놓는다. 그리고 늦게 아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정상적이다. 부부끼리 커튼 하나씩 끼고 산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다. 예수님께 가면 치유하신다. 왜냐하면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셨을까? 생명이다. 4절을 보자. 그 안에 생명이 있다. 이 생명이 인간을 만들고, 지구, 우주에 호흡을 불어넣었다. 창조는 생명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생명은 죽음의 반대이다. 죄를 지은 인간은 죽음 위에 백성이다. 그림자 속에 산다. 외로움, 갈등, 고독, 죽음이다. 태어나서 죽음으로 간다. 종착역인 죽음을 두려워한다. 갑자기 암 선고를 받고 눈물을 쏟는다. 죽음 이후가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은 영원을 여는 문이다. 보장되어 있지 않은 사람한테는 무섭고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창조의 능력은 생명이다. 생명이 있으면 죽은 것도 살아난다. 죽은 나무와 사람이 살아난다. 생명의 역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신 분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아가고 귀신이 떠나간다. 생명이시다. 하나님의 생명이다. 교회 오면 왜 예수를 믿으라 하는가?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태어나면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 생물학적인 생명만 가진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접붙임을 받아야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를 믿으라는 소리다. 예수 안에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 고리이다. 이 생명은 죽음을 깨친다. 절망 죄악을 깨친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으니..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요한일서 5장 11~12절을 보자. 요한복음 11장 25절을 보자.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 말은 부활의 핵심에는 생명이 있는 것이다. 죽어도 다시 사는 것이다. 안심하자. 천국 가며 영원한 생명이 얻어지는 것이다. 이 생명을 가지고 우리를 만드신 것이다. 우주가 하나의 생명체이다. 요한복음 10장 10절을 보자. 예수님이 온 것은 생명을 주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유정란은 어미 닭 속에 들어가 있으면 생명이 된다. 예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영원한 부활이 된다. 예수를 믿는 것은 생명이 잉태되는 것이다. 오늘 믿는다고 갑자기 변하지는 않는다.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면 말이 달라지고 습관이 달라진다. 생명의 특징은 자라는 것이다. 성장이다. 열매 맺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축복을 나누어 준다. 예수의 생명이 있기에.. 예수를 믿자. 가짜 생명은 떠나가고 진짜 생명이 잉태된다. 특징이 생기는데 교회와 하나님 얘기에 좋아하게 된다. 뭔가 좋아진다. 성경은 잘 모르지만 좋아진다. 변화이다. 당신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자라는 것이다. 영향력이 생긴다. 요한일서 1장 4절을 보자. 역사하실 것이다.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성령의 역사라 한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믿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두 번째는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다. 인치심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아버지에게 받기까지는 떠나지 말라. 성령을 받으리라."라고 하셨다. 성령이 없으면 이곳에 못 앉아 있는다. 졸게 되어 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계셔서 빨려 들어간다.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성령 충만이 다 이런 얘기다. 예수님을 영접하자. 믿겠다고 말하자. 진리는 간단하다. 복잡하지 않다. 그냥 믿자. 그 이상 해답이 없다. 믿어지는 게 내 이성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 부끄러워하지 말자. 성령님 나에게 오시 옵소서. 나를 충만하게 하옵소서. 어떤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말자. 열매 맺기 위해 가는 것은 우리 일이다. 뿌리내리는 것이다. 그런 축복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