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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다시 쌓기의 중요성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故 옥한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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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헤미야의 관심사는 성벽을 다시 쌓는 일이었습니다. 첫 포로 귀환이 에스라와 함께 이루어진 이후에 10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성전은 재건되었지만, 성벽은 무너진 채 100여 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 성벽을 쌓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벽이 없으니까 다시 재건된 성전은 외부에 완전히 노출된 무방비 상태로 남아 있었고, 유대인들은 이 마을 저 마을에 이방인들과 섞여서 세상 사람과 똑같은 모양으로 사는 꼴이 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비하면 성벽을 쌓는 일은 별 볼 일 없는 사소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저도 한때는 느헤미야서를 읽으면서, ‘뭐 성전만 재건하면 되지, 성벽 쌓는 것이 뭐가 대단해서 느헤미야서가 꼭 성경에 들어 있어야 되는가?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지도자로서 탁월하다는 것이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하면, 남이 놓치고 넘어가기 쉬운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성벽을 다시 쌓는 것이 성전을 재건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것이 느헤미야의 탁월성입니다. 성전이 없었다면 성벽 쌓는 일이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재건된 마당에 성벽을 쌓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느헤미야의 시각이었습니다.

  벽이 없으면 성전이 보호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밤낮없이 위험과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이 있지만 성전을 보호할 성벽이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결국 이 마을 저 마을에 흩어져서 가나안 부족들과 함께 동화되는 생활을 했고, 그들의 잡된 종교와 문화에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젖어들었습니다. 서로 통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고 언어가 혼합되었으며, 신앙적인 면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차별성을 내보일 수 없을 만큼 혼탁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민으로서의 주체성을 지키지 못하는 어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벽이 꼭 있어야만 했습니다. 성벽은 적으로부터 성전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영향을 차단하기 때문에, 상징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이스라엘 민족의 보호망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벽의 의미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세속화, 이방화를 내버려둔다면 성전을 백 번 재건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또 흩어질 위험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성벽을 쌓아서 상징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인과 구별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는 것과, 또한 예배와 하나님의 말씀이 혼탁한 세상 물에 더럽혀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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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용서

Q.T/C.S.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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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6일

교회 안에서(교회 밖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별다른 생각 없이 아주 많은 말을 합니다. 예를 들면, 사도신경을 통해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저는 이 문구를 몇 년 동안이나 되풀이하다가 이것이 왜 사도신경에 있는지 자문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 문구는 사도신경에 들어갈 가치가 없는 듯 보였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당연히 믿지, 말할 것도 없잖아.” 그러나 사도신경을 작성했던 사람들은 이것이 우리가 교회에 갈 때마다 상기해야 하는 신앙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제 경우에는 그들이 옳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죄 용서를 믿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나마도 계속 상기하지 않으면 아주 쉽게 잊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고 믿지만, 우리에게 죄지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고도 믿습니다. 이 두 번째 부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기도문에 있고, 우리 주님이 강조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 중 이만큼 분명한 부분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없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의 죄가 그리 끔찍하지 않거나, 정상 참작이 되는 경우에만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게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야 하고, 그것이 아무리 끔찍하고 비열하고 자주 되풀이되더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 역시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영광의 무게>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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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죄를 회개하는 데 따르는 치명적 유혹

Q.T/C.S.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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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5일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죄를 회개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가끔 가상의 죄라도 회개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죄를 회개하는 젊은이들에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이보다 다소 복잡합니다. 잉글랜드는 하나의 자연적인 주체가 아니라 시민 사회입니다. 따라서 잉글랜드의 행위라고 하는 것은 실상 영국 정부의 행위를 말합니다. 젊은이에게 잉글랜드의 외교 정책을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이웃의 행위를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외교부 장관이나 각료 장관은 이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정죄를 전제로 합니다. 그러므로 국가적 회개의 으뜸가고 치명적인 매력은 우리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괴로운 일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슬퍼하는-그러나 우선 비난하는-신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자신이 하는 일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젊은이들이 분명히 알게 된다면, 그는 분명 사랑의 원리(law of charity)를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불행히도 국가의 죄를 회개할 때 쓰는 표현이 그 진정한 본질을 감추고 있습니다.

참회자는 위험한 수사적 표현을 사용하여 정부를 ‘그들’이 아니라 ‘우리’라고 부릅니다.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말고 자신에게는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해서는 안 되는 입장이므로, ‘우리’라고 불리는 정부는 ‘사실상(ipso fac-to) 사랑의 영역은 물론, 정의의 영역에도 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참회자는 정부에 대해 무슨 말이건 하고 싶은 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거침없는 비난이라는 널리 퍼진 악을 마음껏 저지르면서도 줄곧 자신이 참회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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