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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야 삽니다."
누가복음 10장 25~37절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물었다.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 율법 교사의 의도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대답해 주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은 구약성경이다. 영생의 길은 성경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5장 39절을 보자. 우리는 이 말씀대로 영생을 얻어 이 자리에 나와있다. 성경에는 명백하게 나와있다. 율법 교사가 대답을 잘했다.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 성경에 핵심이라고 얘기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렇게 행하라고 얘기하셨다. 율법 교사는 또 질문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자기들은 모든 것을 다해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이웃이 누구인지 몰랐다. 이웃의 범위가 동족인 유대인을 넘어서지 못했다. 사마리아 사람은 제외했다. 원래는 같은 유대인이지만 이방 민족이 이들과 통혼을 했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경멸했다. 그래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은 제한을 하는 질문인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내 이웃이 아니겠지요?" 이 말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났다. 반 죽음을 만들고 도망갔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보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출장 왔다가 그 사람을 응급 처치하고 돌보아주고 숙소 주인에게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고 비용도 내주었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물으셨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 사람이 내 이웃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의 이웃이라고 얘기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특기인 뒤집기로 정의 내리신 것이다. 중심이 내가 아니라 이웃인 것이다. 중심축만 뒤집힌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사랑함으로 그 사람이 이웃이 되는 것이다. 그냥 가리지 말고 나누지 말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씀이시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 선생님이다.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인 것이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을 배척한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이웃을 불쌍히 여겼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을 몰랐지만 실천했다. 주님은 "사마리아 사람이 너희와 다르게 율법을 지켰다."라고 지적하셨다. 성경 원문에는 반 죽음이라고 나온다. 반 죽었다는 말은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상태를 말한다. 사마리아 사람의 자비는 죽음에서 살린 자비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면 살 수 있다고 하신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그 사람을 살리라는 얘기이다. 죽어가던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 사랑을 실천하면 너도 산다는 것이다. 행하지 않으면 못 사는 것이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도 반죽음 상태임을 얘기하시는 것이다. 그 사람도 우리도 죽음으로 갈 수도 삶으로 갈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살리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이다. 살리라는 것이다. 안 살리면 우리도 못 사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신 것과 우리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공로 주의에도 빠지면 안 된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작용해서 행동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구원은 내 공로가 아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순종의 열매가 없으면 거짓이기 때문에 살려야 하는 것이다. 오직 산 사람만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 자비를 행하면 살고 행하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사랑의 교회 회복을 위한 기도가 7년째이다. 어쩌면 한 사람, 아니면 수천 명, 아니면 전체를 위한 일이다. 우리는 내가 죽지 않으려고 이 일을 하고 있다. 발버둥 치지 않으면 우리가 죽고 교회가 죽는다. 나부터 살려는 몸부림이다. 이 기도모임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무리도 있다. 정죄하는 사람도 있다. 이제 그만하지.. 이제 그만 용서하지.. 그런 말도 한다. 우리가 여기서 그만둘 수 없는 이유는 살고 싶기 때문이다. 영생을 얻고 싶기 때문이다. 영생을 얻은 사람으로서 살리기 위함이다. 우리 눈 앞에 생사에 기로에 놓인 사람이 보인다. 죽어가고 있다. 교회를 사유화하고 도덕적으로 문제인 사람이 지도자가 되고 있고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냥 지나간다. 오직 회개만이 살길인데.. 잘못을 인정 않고 말하지도 않고 꾸짖지도 않고 충성한다. 그것은 그 사람과 교회가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다 죽자는 얘기이다. 우리도 그렇게 제사장처럼 레위인처럼 그냥 지나칠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알기 때문에 먼저 알기에 다른 사람을 살려야 한다. 한국 교회도 살려야 한다. 우리도 살고 싶다. 영생을 얻은 자답게 살 수 있는가? 이를 행하라. 가서 그와 같이 하라. 그러면 살리라.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그와 같이 하는 것이다. 남도 살리고 모두 살리는 이 귀한 일에 헌신하며 거짓 가르침에 속지 말기를 바란다.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마귀에 속삭임이다. 남을 죽이면 나도 죽는 것이다. 남을 살려야만 나도 사는 것이다. 우리도 사람이다. 부패한 본성을 가졌다. 미워하면 안 되는데 치밀어 오른다. 죽여서는 안 되는데 생각이 난다. 그런데 기억하자. 마귀에 속삭임이다. 동반자살의 유혹이다. 우리는 사랑의 교회이다. 살리는 것이다. 사랑이 아니면 헛일이다. 한국사회는 정말 안타까운 문제가 산적하다. 우리 코도 석자이다. 불신자들이 교회를 걱정하는 현실이다. 바닥에 떨어진 교회를 위해 기도하자. 긍휼을 입고 일어나서 북한, 일본, 중국을 위해 기도하자. 기도하는 우리가 생명의 길과 사람 살리는 길로 가자. 살려야 된다. 살리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적극적인 열심이다. 부지런한 행동이다. 사마리아 사람을 보자. 마음으로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로 그 상처를 싸매고 돌보아주기를 부탁하고 갚아주겠노라고 부탁도 한다. 자세히 설명하셨다. 불쌍히 여기는 것이 사랑이고 열심을 다해 살려야 나도 사는 것이다. 기어이 살리는 것이 사랑이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을 보자. 우리가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어이 살려야 한다. 가까이 다가가서 치료해주자. 생명을 회복하기까지 사랑으로 기도하고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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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이유와 방법
누가복음 18장 1~8절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로 사는 방법이 말씀과 기도이다. 우리가 24시간 쉬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종일 묵상해야 한다. 시편 119편 97편을 보자. 종일 묵상해야 한다. 종일의 뜻은 낮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시편 1장 2절을 보자. 주야로 묵상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묵상하라고 하며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다. 하나님께 부르짖는데 항상 해야 하는 것이다. 제가 미국에서 20년 이상 살았지만 영어에서는 24시간 일주일 내네라고 표현한다. 말씀과 기도생활이다. 도시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며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였다. 성을 쌓았다는 말은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부정을 의미한다. 도시에 재판장이 있었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과부도 있었는데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사람이었다. 수도 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힘이 없어 재판장을 찾았다. 재판장은 사회에 정의를 수호하고 재판을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재판장은 처음에 거절했다. 돈 있는 사람이 부탁했다면 들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부를 생각하게 되었다. 언제까지 찾아올까? 끝장을 볼 때까지 찾아올 것이다. 과부가 죽거나 자기가 죽거나 부탁을 들어줄 경우에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들어주기로 하였다. 가만 두면 끝도 없이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귀찮아서 들어준 것이다. 주님은 그 재판장을 불의한 재판장이라 지칭하였다. 불의한 것이다. 주님은 그 재판장을 하나님과 비교하신다.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라고 하셨다. 과부가 찾아간 것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같다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자. 주님은 하나님이 재판장과 비슷하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셨다. 왜냐하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께 우리는 기도한다.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도 귀찮아서 들어주는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기도하고 기도하면 얼마나 잘 들어주시는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리라고 하셨다. "풀어주지 아니하겠느냐?"는 반드시 풀어주겠다는 것이다.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실 것이다"라고 재차 강조하셨다. 8절을 보자. 주님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뒤집기이다. 허를 찌르심이다. 갑자기 믿음 이야기를 하신다. 수사 의문문이다. 주님은 기도가 곧 믿음이라고 하였다. 기도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고 하였다. 낙심하거나 기도해야 할 일이 없는 삶을 살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둘 다 불안한 것이다. 기도할 이유와 방법을 3가지씩 가르쳐 주신다. 첫째는 억울한 일 때문이다. 도시가 바로 세상이고 현장이다. 불의와 부정, 거짓과 사기, 약탈이 일상처럼 일어나는 것이 도시이다. 여기서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과부의 일어난 일이 성도의 삶인 것이다. 우리는 택함을 받았고 제자들이기 때문에 천국의 원리대로 살아간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미워하게 되어있다. 참된 말과 진실된 삶을 살고자 몸부림친다. 주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우리를 세상이 미워하고 박해하고 조롱한다. 우리를 비난한다. 불의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약한 자를 돕는다고 조롱한다. 고통은 죄가 낳은 것이다. 우리도 병에 걸리며 사고를 당하여 죽기도 한다. 실적이 안 좋거나 사업이 망할 때도 있다. 믿는 자녀가 좋은데 취직하거나 좋은 대학에 가는 것도 아니다. 이 원한을 겪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께 간다. 답답한 마음으로 눈물로 부르짖고 하소연하고 매달리기도 하고 떼를 쓰기도 한다. 말이 소용없는 것이다. 그냥 "아버지"하고 앉아만 있어도 된다. 두 번째는 우리가 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아무 능력이 없다. 재판장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과부로 산다. 의지하고 기도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 나가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도 나름 중직을 맡고 일하고 있다. 권력과 권세도 따라온다. 사회, 가정, 교회에서 책임을 맡고 수행한다. 그러나 인생 전체를 볼 때, 영적 관점으로 볼 때는 아무 능력이 없는 존재이다. 이 땅을 살며 원한을 겪는다. 도저히 모른 척할 수도 없다. 풀지 않고는 할 수 없다. 그런 일이 내 힘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 과부와 같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보자. 영적 전투이다. 영적 싸움에서는 혈과 육의 무기는 소용이 없다. 패배하는 것이다. 영적 싸움에도 육신적인 힘이 작용할 때가 있다. 내가 가진 사회적 지위와 바치는 재물과 인지도를 사용해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지만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거대한 싸움은 어떻게 할 수 없다. 세상에 나가서 내가 고위 관직을 얻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거대한 싸움에서는 우리의 육신적인 것이 도움이 안 된다. 도움이 되어서도 안 된다. 힘없는 과부인 것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을 잊지 말자.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고는 이길 수 없다. 기도했다면 겉으로는 진 것 같아도 이긴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는가? 우리가 기도해야 할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다. 우리에게 기도 가능성을 주시는 것이다. 약속이란 응답해 주신다라고 하는 것이다. 배짱을 좀 갖자. 마치 욥처럼 말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힘 없이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결자해지 해야 한다.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해결도 해야 한다. 요한복음 15장 19절을 보자. 내가 너희를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였다. 기도만 해라. 반드시 들어주신다. 속히 응답해 주신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지금 이 시간도 일하신다. 공의에 하나님 이신다. 반드시 심판하신다. 지극히 작은 불의도 바로 잡으실 것이다. 우리를 자녀로 택하셨다.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셨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기도하면 된다. 이것이 세 번째 이유이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첫 번째는 항상 해야 하는 것이다. 기초가 중요하다. 목적이다. 항상 기도해야 하기에 가르쳐 주신 것이다. 밤낮 기도해야 한다. 왜 항상 해야 하는가? 항상 하지 않으면 낙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낙심은 포기하는 것이다. 주저앉는 것이다. 백성과 제자로 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기도해야 한다. 왜 이런 말씀을 거듭하시는 것인가? 기도하다가 포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다 보면 6년이 지나간다.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포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야 한다. 어쩌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원한을 풀어달라고 매달릴 수 있는가? 항상 기도하고 밤낮 부르짖으라고 하신다. 끈기가 믿음이다. 두 번째는 부르짖는 기도라야 맞는 것이다. 묵상은 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우리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처럼 기도 많이 하는 나라도 없다. 그러나 도덕 수준도 낮다. 부르짖는 기도가 아니라 요구하는 기도가 많다. 좋은 대학, 승진, 월급 상승, 사업 대박을 기도한다. 기도가 맞지만 낭만적인 기도에 속한다. 들어주시면 좋지만 혹 안 들어주셔도 상관없는 것이다. 주님 표현에 의하면 이것은 이방인들이 드리는 기도이다. 그러나 이것도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부가 아니며 핵심이 돼서도 안 된다. 부르짖는 기도를 해야 한다. 억울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절박하고 처절한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런 것을 가지고 울부짖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말만으론 안 된다. 순조로운 인생 살면서는 나오지 않는다. 부르짖는 내용이 없다. 견딜 수 없는 억울함과 원한이 생겨야 되는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바르게 살지 않으면 바른 기도도 못함이다. 차분하게 앉아서 드리는 기도가 전부라면 다시 생각해 보자. 돌아보자. 내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고 있는가? 가정, 직장, 사회에서 천국 원리로 이 세상과 싸우며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을 보자. 기도에 첫 번째 방법이 끈기라면 두 번째는 처절함과 절박함이다. 나는 제자훈련 교회 다녀서 괜찮겠지? 이런 생각을 절대 하지 말자. 세 번째는 삶으로 기도하는 방법이다. 즉 선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 삶이 곧 기도이다. 기도는 믿음이다. 믿음은 순종이고 행함이고 삶이다. 기도도 역시 삶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이다"라고 하였다. 행함이 없는 기도 역시 거짓인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간구하는 내가 먼저 기도의 응답이 되어야 한다. 제자들을 보내시며 일꾼을 보내기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제자를 먼저 보내셨다. 우리가 먼저 순종해야 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께 거듭 찾아가는 믿음이고 찾아갈 수밖에 없도록 억울한 것을 당하는 것이고 억울함이 쌓이도록 선을 행하는 믿음이다. 주야로 부르짖는다고 하셨다. 묵상과 기도를 하는 것이고 순종하는 삶이다. 기도하는 일이 씨를 뿌리는 일이다. 눈물이 나는 일이다. 괴롭고 힘든 일이다. 열매는 멀었다. 선을 행하는 일도 어렵다. 데살로니가후서 13장 3절을 보자.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하였다. 기도는 믿음이다. 순종도 믿음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주님이 오실 것을 믿는 것이다. 끈기와 절박함과 행함이다. 제자로 살려고 하는 것을 믿는다. 억울한 일이 생겨 주님을 찾는다. 우리의 기도와 삶이다. 기쁘고 보람된 인생이다. 잊지 말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다. 주님도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성령께서도 함께 계시며 바른 기도와 삶으로 인도하신다. 포기하지 말자.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한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여럿이 함께 모여 기도하자. 기도할 거리가 자꾸 생기는 인생을 살자.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 끝장을 볼 때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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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자락에서 전해지는 사랑
오래전부터 날 누르는 내 안에 깊은 절망
아무 희망도 어떤 기대도 내겐 없는데
사람들의 외면과 날 거절하는 눈빛
아픈 상처로 짙은 어둠으로 깊이 빠져만 가는데
어디선가 내게 들리는 하나님 아들 주님 이야기
그분이라면 그의 옷자락이라도 내 마지막 소망이니
주님을 만났네 옷자락에서 전해지는 사랑
내게 임한 주님의 능력 날 누르는 아픔의 근원을 고치셨네
날 바라보시네 나의 연약함 주님은 아시네
깊은 절망에서 날 자유케 하신 사랑 나 찬양해
어디선가 내게 들리는 하나님 아들 주님 이야기
그분이라면 그의 옷자락이라도 내 마지막 소망이니
주님을 만났네 옷자락에서 전해지는 사랑
내게 임한 주님의 능력 날 누르는 아픔의 근원을 고치셨네
날 바라보시네 나의 연약함 주님은 아시네
깊은 절망에서 날 자유케 하신 사랑 나 찬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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