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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함 받은 자를 택함 받은 자녀로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故 옥한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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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함 받은 자를 택함 받은 자녀로

마태복음 22장 1~14절

 

지난 40년 동안 한국 경제의 성장을 주도하고 한국 교회에 고난 속에서도 강인한 모습으로 앞장섰던 교회가 여의도순복음 교회이다. 감사를 드린다. 오늘 저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길 바란다.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이 만든 전도 폭발 프로그램이 있다. 저는 집사람을 보고 알았다. 전도 폭발 프로그램을 받고 오더니 사람이 달라지더라. 전도할 사람이 있으면 뛰어나가고 기쁨이 충만하더라. 굉장히 얼굴에 기쁨이 충만한 것을 보았다. 저희 교회에도 도입했다. 저희 교회에는 수천 명이 전도에 열정을 가지고 뛰고 있다. 사랑의 교회는 공간이 워낙 좁기 때문에  전도한 만큼 받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열정은 살아 있는 것 같다. 그 프로그램에 질문 두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한 가지는 "형제여, 오늘 밤이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대부분의 사람이 대답을 못한다. 이번에 미국 무역센터에 911 테러가 일어났다. 여객기 자살사고였다. 그중 인상 깊었던 것은 90층에 사람이 창 밖으로 하얀 수건을 흔들며 살려달라고 하였다. 40분 후 빌딩은 붕괴되었다. 그 사람을 보며 예수를 믿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 순간에 예수님을 붙들었으면 하였다. 우리는 30, 40년 후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들에 꽃과 같다. 시간이 지나면 먼지 속에 묻히는 것이다. 역사에 뒤안길로 간다. 남은 것은 구원이다. 하나님이 나를 영접하실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아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목회하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구원의 확신을 물었을 때 10명 중에 4명이 안 나오더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냐고 진짜 믿습니까? 물으면 대답이 안 나온다. 로마 가톨릭은 선행을 강조하며 교인을 붙든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공로를 세우려 한다. 이런 경우에는 구원의 확신은 불가능하다. 그런 불안을 갖는다. 그러나 성경을 들여다보면 이것은 잘못된 교리이다. 과연 나를 받아들이실까? 하는 불안을 갖는다. 제자훈련을 하는 자리에서 육군 장성이 있더라. 한 분씩 돌아가며 물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천국 간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 육군 장성이 화를 냈다. "사회에 나가면 예수 믿는 사람답게 순종도 못하고 제대로 생활도 못하면서 믿냐고 하면 예라고 대답하고, 너무 기분 나쁘다. 모순이 있는 것 같다."라고 얘기하더라. 그다음부터 제자훈련에 나오지 않았다. 요즘은 믿음이 좋아져 있더라. 또 어떤 사람들은 몇 날 몇 시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저는 모태신앙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언제 중생받았는지 모른다. 성경을 달달 외우고 다녔고 성경 신구약을 통독했지만 언제 구원의 확신을 받았는지 시일을 얘기하라고 하면 한마디도 못한다. 그러면 "그게 무슨 신앙이요, 엉터리요." 사탄 같은 소리를 한다. 구원파 같은 곳이다. 구원의 확신도 위험한 사안도 있지만, 정상적인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구원의 확신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이 정상이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을 보자. "너희가 믿음이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고 검증해보라."라고 하신다. 확신이 없으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물이 새는 항아리이다. 시간이 갈수록 물이 줄어든다. 순복음교회는 대단한 믿음이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여기에 못질을 더 하자.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5가지 이유를 얘기하겠다. 왜 불안이 자주 생기는지 이유를 얘기하겠다. 만약 여기에 한 가지라도 저촉된다면 오늘 이 시간 해결함 받기를 바란다. 첫째는 하나님에 약속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을 보고 믿는다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신뢰하는 것과는 차이가 생길 수 있다. 예수님은 구원의 확신에 대해 확실하게 얘기하신다. 요한복음 5장 24절을 보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소유했다고 한다. 죄와 죽음에 권세에서 해방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인 자리로 옮겨졌으며 돌아갈 수 없다. 구원받은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다. 예를 들겠다. 부목사로 있는 교회에서 미국 가기 전에 사임하게 되었다. 대신 방을 제가 맡았다. 3개월이 걸리더라. 대신 방을 좋아하지 않는다. 길에서 시간낭비를 너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목회 방법이었다. 그런데 미국 가야 하니 60살이 넘는 분들에게 확신에 대해 물어볼 마음이 생겼다. 신방 다니며 권사님과 집사님께 질문드렸다. 한 30명 정도 물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제가 사역했던 교회는 소문난 교회였다. 제 질문에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분은 딱 두 사람이었다. 기가 막혔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여자일까? 남자일까? 여자였다. 두 분이었다. 나머지는 불안하다고 얘기하더라. 유명한 권사님인데 인물도 좋았다. 자식도 잘 되었다. 병상에 계시더라. "권사님. 제가 유학 떠나면 만나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물어봅니다. 만약 비행기가 폭격을 해서 다 죽는다면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죠?" 그런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겁이 나고 자신이 없어요." 기가 막혔다. 그런데 유학 갔다 와서도 안 돌아가셨다. 하나님이 구원의 확신이 안 생기면 안 데려가시는 것 같다. 또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시고 은퇴하신 분이 계셨다. 똑같이 물었다. 신약을 100번을 보았다고 하더라. 그런데 "목사님이 질문하시는 것에 대답을 하기가 힘드네요."라고 하였다. 기가 막혔다. 성경을 신뢰하지 않고 그냥 읽은 것이다. 또 더 걸작같이 얘기하시는 할아버지도 계셨다. "아니 그게 어디 내 맘대로 되나요? 하나님이 들어오라고 하면 들어가고 나가라 하면 나가는 것이지."라고 하였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였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의인으로 인정하신다. 성경에 너무 많이 나오지만 100% 신뢰를 안 한다. 날마다 흔들거린다. 이런 생활하지 말기를 바란다. 갈대와 같지 않길 바란다.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은 말씀하시면 거두는 법이 없으시다. 그분의 말씀은 영원한 법칙이며 흔들리지 않는다.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두 번째는 믿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 때문에 고민한다. "믿음이 약해서."라고 얘기한다. 겸손한 말이지만 분별하자. 그러나 그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는 것이다. 진짜 믿음은 반드시 있는 것이다. 보석이 눈곱만 해도 진짜가 존재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겨자씨라고 표현하였다. 작아도 진짜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을 믿는 것이며,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내 믿음을 논할 때 강하냐 약하냐를 논하지 말고 가짜인지 진짜인지를 분별하자. 한국에서 가장 큰 믿음을 가진 목사를 써내라 한다면 조 목사님을 쓸 것이다. 그런데 조 목사님도 개인적으로 물어보면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실 것이다. 걱정하는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다. 뭔가 앞을 향해 가려고 한다. 아무도 자만할 사람은 없기 때문에 진짜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 옆에 강도를 보자. 평소에 설교를 듣지 않았고 기도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하였다. 그것도 믿음이라고 구원하셨다. 존 칼빈의 예화가 있다. "작은 믿음이지만 진짜 믿음은 능력이 있다. 구원시킬 능력이다."라고 하였다. 지하감옥은 위생시설이 엉망이다. 지하감옥의 죄수 얘기다. 두더지가 구멍을 뚫고 들어왔다. 하루에 한 번 햇살이 구멍에 들어왔다. 지하감옥을 환하게 하였다. 죄수들이 그 순간 햇빛에 일광욕을 하였다. 두더지 구멍이 있는 죄수는 병이 걸릴 확률이 더 낮았다. 생명 연장에 도움을 주었다. 그 햇살은 진짜이기 때문이다. 건강과 생명에 이로움을 주었다. 진짜 믿음은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확신이 없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믿음을 갖자. 세 번째는 사죄에 축복을 잘 몰라서 생긴다. 용서의 축복이다. 죄 책 감에 구원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이 굉장히 많다. 확신하냐고 물으면 "나 같은 죄인이 자신 없어요."라고 한다. 불안과 공포가 있다. 물론 70살이 되도록 잘못한 것이 없다고 느끼면 죄 책 감이 덜할 수 있다. 그러나 간음죄와 사기죄를 범하고 돌아온 분들은 죄 책 감에서 해어 나오지 못한다. 결혼하고 나서도 과거에 잘못된 죄를 범한 부인들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범한 죄 때문에 뿌리가 흔들리는 고통을 당한다. 죄책감이다. 요즘처럼 여성의 정절을 지키지 않는 때에는 더 그렇다. 마음 한 구석에 불안이 상주한다.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예수님의 보혈이 얼마나 대단한가? 예수님의 피가 얼마나 대단한가? 골로새서 2장 13절을 보자.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100% 모든 죄를 사하셨다. 거짓말하지 않으신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몇 번 부인했는가? 3년 동안 따라다니며 신앙고백을 청산유수로 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저주하며 모른다고 하였다. 어떻게 용서받는가? 가롯 유다와 베드로나 무엇이 다른가. 베드로는 고백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용서하셨다. 베드로 전후서와 사도행전을 읽어보라. 베드로가 자기 죄 때문에 고통하던가? 전혀 아니다. 정말 무결하게 씻어주신다. 사도 바울은 보통사람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사람이지만 용서하셨다. 사도 바울이 자기 죄 때문에 고민하던가? 자기의 가시가 있었지만 자기의 핍박하던 죄 때문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자유한 사람이었다. 수가성의 여인도 마찬가지다. 한 번 용서하시면 완전히 용서하신다. 저의 이름은 옥한흠이지만 이상하게 지었다고 생각한다. 조 목사님은 이름이 멋있다. 그러나 은혜를 깨닫고 성령께서 알려주셨다. 한이 없이 흠이 많은 옥이더라. 진주이다. 예수 믿고 나서 한 개의 흠이 없는 옥이 되었다. 할렐루야. 그것을 생각하면 감사하다. 한 번씩 마귀가 흔든다. 겁이 나지만 불안하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나라. 나는 한 개의 흠도 없는 옥이다."라고 외친다. 떨지 말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로마서 8장 33절을 보자. "누가 정죄하리오?"라고 하였다. 이런 문제 때문에 확신이 없다면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자. 그 피는 놀랍고 보배로운 피이다. 영광스러운 보혈이다. 믿음과 감정이 흔들리면 불안하게 된다. 신앙생활에서 감정은 중요하다. 특별히 성령의 역사를 받는 사람은 더 중요하다. 냉랭하게 앉아 있을 수 없다. 믿음의 있어서 감정은 중요하다. 장로교는 너무 억누르는 측면이 있었다. 은혜를 받아도 기뻐할 수 없어 골방에서 춤을 췄다. 신앙의 기현상이다. 순복음교회는 감정을 존중한다. 처음 오면 흥분할 수 있다. 믿음과 감정은 혼동하지 말자. 감정을 믿음이라고 혼동한다. 감정이 식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천국처럼 보인다. 그러나 날마다 계속되지 않는다. 점점 감정에 물이 빠진다. 원점으로 돌아간다. 또 남편과 싸우고 신경질 부린다. 교회에서는 괜찮은 척한다. 목사도 마찬가지다. 목사의 은혜가 날마다 충만한가? 잘못된 것이다. 저도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엘리야를 보라. 사탄은 교역자를 공격한다. 감정 컨트롤이 안된다. 기분이 안 좋다고 하여 냉각상태 빠졌다고 해서 그 사람 믿음이 가버린 것인가? 내 감정이 식었다고 내 믿음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다. 내 감정 때문에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살아계신다. 내 감정이 올라가서 믿음이 좋다고 판단하지 말자. 내 감정이 측정도구가 아니다. 오직 말씀에 있는 것이다. 기분이 안 좋으면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모세에 인도를 받아 출발하는 마지막 밤이다. 유월절 지키는 날 애굽의 공포의 밤이 오기 전에 말씀하셨다. 애굽의 장자는 모두 죽이는 공포의 밤이었다. 어린양을 잡아라. 그 피를 문설주와 좌우 방안에 발라라. 고기를 먹어라. 절대로 문 열고 나오지 말아라. 외투를 입고 허리를 동이고 신발을 신고 날이 밝아 출발할 때 어린양을 먹어라. 그 피가 있으면 넘어가리라. 그러나 없으면 사람이고 짐승이고 처음 난 것은 모두 죽이겠다고 하였다. 한 집에서 어린양 고기를 먹고 있었다. 깊은 밤에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들이 둘러앉았다. 고기를 먹고 있는데 분위기가 아이스 박스이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죽음의 천사 얘기를 하였기 때문이다. 조금도 정신을 놓지 말라고 일러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어붙은 것이다. 그런데 다른 집을 보니 싱글벙글하며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얘기하였다. 우리 집은 죽음의 천사가 넘어갈 것이라고 기뻐하였다. 기분 좋게 먹자고 하였다. 비교해보자. 한 집은 얼어붙었고 한 집은 기쁨이 가득했다. 천사가 어느 집을 들어갔을까? 두 집다 안 들어갔다. 감정은 관계가 없는 것이다. 문설주에 피가 발라져 있기 때문이다. 그 피가 우리 집에 묻어 있는 것이다. 어떤 사탄도 이기지 못한다. 과거에 죄가 많아도 문제가 안된다. 기뻐하지 않던지가 관건이 아니다. 감정 때문에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면 안 된다. 끝으로 다섯 번째는 순종을 하지 못해서이다. 이것은 중요하다.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니 순종을 등한시한다. 죄짓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적당하게 타협하고 세상을 산다. 교회 안에서 회개하면 된다고 한다. 순종이 병이 들었다. 믿음과 순종은 하나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나무와 열매로 보았다. 믿으면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우리가 100% 순종 못할 것을 인정하신다. 그러나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다 하여 순종에 성의를 다하지 못하면 잘못된 것이다. 이런 것이 반복되면 구원의 확신이 없어진다.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순종은 반드시 믿음을 따라간다. 믿는 것만큼 중요하다. 따라서 순종의 생활을 제대로 하면 흔들리지 않는다. 제대로 못하면 흔들린다. 담대함이 사라진다. 떳떳하지 못하게 된다. 5가지를 얘기하였다. 기억하자. 지금은 말세이다. 흔들리지 아니한 확신이 필요하다. 천하가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사탄은 유혹한다. 괜찮다고 한다. 확신을 갖지 말라고 한다. 전략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30년 동안 드러나지 않게 사생활을 하시다가 대중 앞에 드러내셨다. 자신이 메시아임을 확인시켜 주셨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셔서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광야에 갔는데 마귀가 시험하였다. 왜 시험할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을 떡이 되게 하라." 흔드는 것이다. 확신을 흔드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구유에 태어나셨을 때 확신하셨을까? 지각이 자라고 성장하셨던 것이고 확인하셨던 것이다. 12살 때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알았다. 요단강에 세례 받고 확신하셨다. 십자가에 길을 가셔야 하겠다고 확신하셨다. 그런데 마귀가 흔들었다. 세상의 구원 계획을 방해하였다. 우리가 이것을 볼 때 마귀가 확신을 갖지 못하게 흔드는 것처럼 지금도 계속 흔들고 있음을 알자. 정신이 가물 해질 때 찾아왔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라." 공격하였다. 만일 예수님의 마음에 확신이 흔들렸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탄은 지금도 돌아다니며 훼방을 놓는다. 구원의 확신이 절대 흔들리면 안 된다. 말씀을 무장하고 배우자. 천하가 무너져도 거룩한 백성임을 의심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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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8 주일예배

Q.T/은혜샘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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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도하라

열왕기상 8장 22~30절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 사원에 있는 마니차라는 기도 바퀴이다. 기도 바퀴가 설치되어 있는데 기도 통 안에는 라마교 경전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지나가며 기도 바퀴를 돌리면 된다. 한 번 돌릴 때마다 경전을 한 번 읽은 것으로 되는 것이다. 한 번 돌릴 때 죄의 업보가 없어진다고 믿는다.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난다고도 믿는다. 사이버 기도 바퀴라는 것도 있다. 자동차에 붙이고 쉬지 않고 돌린다. 그것을 기도라고 주문을 외우며 위로를 받는다. 오늘도 열심히 돌리고 있다. 일본의 신사에서 승려에게 기도를 받으려면 5, 6만 원을 내야 한다. 카드도 받는다. 기도를 시작한다. 겉으로는 정종을 늘여놓고 기도한다. 참배객들은 기도 종이를 잡아서 맨다. 그것들이 벚꽃처럼 나부낀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어떤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갚을 것이라고 기도하지는 않는가? 마치 주고받는 거래처럼.. 거래로서의 기도는 정해진 관습으로 변하게 한다. 위의 다른 기도들과 다르지 않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하나님에게 긴 기도를 올려드린다. 22~30절은 이것의 서론이다. 7가지 청원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용서를 누리게 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솔로몬의 서론에서 기도란 무엇일까? 솔로몬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기도 목적을 찾아보자. 그리스도의 기도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참된 지식과 믿음으로 시작된다. 솔로몬은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였다. 그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하지 못함을 고백한다. 유일한 주권자이심을 고백한다. 세상이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그 안에 사는 모든 인생을 창조하셨음을 간섭하시고 통제하심을 고백한다. 이 믿음도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상대하는 대화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 당연하다고 하였다. 하나님을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누구이신지를 우리 눈높이만큼 알려주시면 이해한다. 그러나 이런 것도 알지 못한 채 기도한다. 우리 스스로가 만든 우상과 나를 기뻐하게 하는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는다. 아담 또한 하나님을 알았다. 모든 시간을 하나님과 같이 하였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그 친밀함은 어렴풋하게 상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회복시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독생자의 영광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게 되었다. 잃어버렸던 거룩한 지식을 회복하였다.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는 자격도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심을 아는 게 가능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덕이다. 우리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는 유일한 분이시다. 기도해야만 하는 이유인 것이다. 주권을 인정해야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얘기하지만 진짜 주인도 하나님 이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조차 내 만족과 허황된 과시로 만들 가능성도 있다. 참된 지식과 믿음이 없다면 나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의 기도는 신들을 달래서 원하는 것을 받는 것이다. 열심히 무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신실하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무엇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미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다. 솔로몬이 확신한 이유는 하나님이 백성과 맺은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기도하며 나아갈 때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히브리서 11장 5~6절을 보자.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곳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다. 약속 가운데 우리에게 준 은혜인 것이다. 그래서 확신과 약속을 붙들고 기도해야 한다. 솔로몬은 하나님 깨로부터 지키셨으며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루셨다고 하였다. 이루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근거이다. 세상 사람들에 기도가 신에게 바치는 기도가 자신의 지성과 장성의 분량이 근거라면 그리스도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이 근거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다른 종교의 기도 차이는 무엇일까? 모든 종교는 지성이면 감천이다. 모든 결과는 나에게 달린 것이다. 그 기도는 하나님에게 달려있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달려있다. 모든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자기를 믿는 것에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믿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이 없다면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근거이다. 십자가의 은혜이다. 솔로몬은 지금 하나님이 머무실 성전을 지었으니 복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건강, 물질, 자식, 권세를 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받은 복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예배드리는 것이다.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복을 받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섭섭해질 것이다. "이런 것이 예수 믿는 것이라면 난 못하겠다"라고 할 것이다. 산상수훈. 만약 "이것이 복이라면 예수를 안 믿겠다"라고 한다면 아니 이런 고민이 아예 없었다면 둘 중 하나다. 정말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던지 아니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복을 구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다고 이제까지 착각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방인처럼 기도하지 않기를 원하셨다. 그들은 필요로 기도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이 주기도문조차도 주문을 외운다. 바리새인의 문제는 마태복음 6장 5절을 보자. 그들의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된 것이었다. 우리는 많은 기도의 가르침을 받아왔다. 그러나 제대로 된 경건의 모습은 없는 것 같다. 그만큼 기도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의식하는 경건의 삶이기 때문이다. "집사님 기도해주세요." 손사래를 친다. 나의 기도를 통해 어떻게 비치는 것에 너무들 신경 쓴다. 그만큼 기도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조종한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기도 모습은 사람을 판단하게 한다. 기도의 내용을 들어보고는 그 삶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판단해버린다. 그만큼 기도가 은밀함 중에 드리는 것이 너무 어려운 까닭인지도 모른다. 내 기도소리에 스스로 속기도 한다. 가장 많이 속는 게 목사이다. 잘못된 동기로 기도하는 자들이 바리새인이었다. 초점이 있는 곳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다. 공적 기도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인 기도가 없다면 잘못될 가능성이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 이런 기도를 하나님은 못 알아들으셨다. 그들은 또 말잔치를 벌였다. 거룩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외식하는 기도는 사람을 의식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기회로 삼기도 한다. 위선이다. 하나님에 백성다운 기도는 오직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골방에 들어가 닫고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과 문제를 의지적으로 끊고 하나님만 바라는 것이다. 집중하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를 내려놓는 것이다. 시편 46편 10절을 보자. 가만히 있는 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모른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라고 명하신다. 우리가 잠시 하나님 노릇을 쉬면 그러면 친히 하나님 되시겠다는 것이다. 그분으로 하여금 모든 일을 맡기라고 하신다. 비로소 그때 하나님은 명확하게 모습을 드러내시며 일하실 것이다. 백성들에게 여리고성 앞에서 돌라고 하셨다. 또 여리고성을 돌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전에 광야에서 출애굽 1세대처럼 하나님을 원망할까 봐 그랬던 것이다. 불신에 자리에 설까 봐 그러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하나님에게 주권을 양도할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이것은 위선인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골방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 가면을 벗게 된다. 진실한 내 모습을 하나님 앞에 내 보이게 된다. 그때야말로 내 기도 앞에 참 믿음과 영성이 드러난다. 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받는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받으셨다. 아무도 없는 그곳이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음을 선포하셨다. 사명을 드러내셨다. 우리도 혼자 있을 때 믿음은 드러난다. 기도원에 가서 영성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아주 성령 충만해 보인다. 사실 일이 꼬이고, 관계가 깨지고, 돈이 떨어지고, 몸이 아프고 애들이 속 썩 일 때가 기도할 때인 것이다. 여러분들은 기도하고 있는가? 많은 사람이 몸이 아플 때 기도할 것 같지만 사실 원망한다. 하나님은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고도 하신다. 마태복음 6장 7절을 보자. 왜 같은 말을 반복하는가? 반복 기도가 기도를 효염 있게 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방법을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기도가 말을 많이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사정을 모르실 것이라는 불안이다. 사실 이것도 자신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자의 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기도는 관계이다. 그 기도를 누가 듣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나의 노력과 방법, 태도에 달려있다고 그동안 생각했던 것이 중언부언이다. 우리의 완벽한 기도 모델이 예수님이다. 예수님도 반복해서 기도하셨다. 우리보다 더 힘쓰고 애쓰셨다. 십자가를 감당하기가 힘들어 제자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하셨다. 졸고 있는 제자들 옆에서도 반복해서 기도하셨다. 사도바울도 육체의 고통을 제하여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하였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 기도하였는데도 하나님에게 응답받지는 못하였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원망과 좌절하지 않았다. 그의 약함을 통하여 주님을 더 알아가고 닮아갔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마음이신지 받아들이는 믿음이다. 수용하는 믿음이다. 기도해야 한다.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더 그렇다. 빈 말의 반복은 잘못된 것이다. 금식기도이든 철야기도이든 다 마찬가지다. 기도의 효염을 본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우리도 일 년에 네 차례 산상기도회를 가지려 한다. 모든 목장이 연합하여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경험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산이면 어떠한가? 여기서 응답 못 받는 기도가 산에서 응답받는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다. 삼시세끼 잘 먹고 응답 못 받던 기도가 금식했다고 응답받는다면 그것도 기도가 아니다. 그럼에도 왜 금식하는가? 저도 산꼭대기에서 기도한 적이 있다. 많이 갈급하기는 하였다. 사실 절박했다. 그때는 그것이 산에 올라가는 영성이었다. 그렇다고 응답 안될 것이 응답되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 갈급함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인격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기도할 때 기도자의 상황과 환경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기도자 그 자신이 바뀌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것이 너의 힘이라고 하신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무엇인가 내걸지 않으면 하나님의 관심을 얻을 수 없다고 착각한다. 예수님은 이것을 헛되다고 하셨다. 아니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전부터 하늘 아버지는 돌보고 계셨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삶 깊이 관여하고 계시다. 기도는 하나님께 새로운 정보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요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이미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심을 고백하는 것이 더 좋은 기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기도 중에 하나님을 가르치려 드는 사람도 있다. "이러시면 안 되죠." 하며 추궁하고 독촉한다. 교육하려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잊은 이방인의 기도이다. 이것들이 있어야 하시는 줄 아시는 아버지이시다. 미사여구가 아니다. 감동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으로 우리를 지으신 것이다. 기도하기 전에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아시는 것이다. 그런데 왜 두드리라고 명하시는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신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자만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을 게을리하면 교만하게 되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말씀하신 것도 그것이다. 바울을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 육체의 가시도 허락하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이루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필립 얀의 "기도"라는 책이 있다.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관계에서 기도가 무엇인지 알게 한다. 이 책 부제를 보면 "하나님께 가는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길 기도"라고 되어있다. 가장 쉬운 것은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믿음과 담대함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쉬운 것이다. 가장 어려운 것이 하지 말라고 얘기하신 반복된 중언부언의 기도이다. 이는 바리새인과 이방인의 기도이다. 조애너는 남아공에 험악한 교도소를 찾아가 훈육하던 자녀이다. 교도소는 열악하였다. 조애너는 너무 보람 있었고 차차 교도소의 폭력적인 태도가 가라앉았다고 하였다. BBC에서 방송을 내보내기도 하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녀는 "당연한 얘기지만 이미 하나님이 거기 계시더라. 난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내 삶에 들어와 계신다. 한시도 빠짐없이 말이다. 기도는 그 부르심에 반응하는 통로일 뿐이다.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에 임재 앞에 나아가 반응하는 기도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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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2 수요저녁기도회

Q.T/사랑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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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1장 13~16절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말씀하신다. 수요일에 위로받기에는 조금 부담스럽다. 거룩하다는 말은 일상에서는 잘 쓰질 않는다. 교회 밖에서도 잘 들리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거룩은 잊힌 말이 되었다. 거북하다. 본문을 잘 살펴보게 되면 오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거룩에 관해 가지고 있었던 상식들을 뒤집는 선언을 3가지 보여준다. 첫째는 은혜를 바랄 때 거룩해진다라고 한다. 13절을 보자. 흔히 거룩은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13절의 근간이 되는 주동사는 바라라는 동사이다. 그 외 동이라, 근신하라는 분사로 되어있다. 제대로 된 번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되 마음에 허리를 동임으로써 근신함으로써 그리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바라라이다. 은혜를 바라라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12절에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은혜를 봄으로서 믿음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은혜를 받았다고 소개한다. 그러므로 죄와 율법과 마귀에 품 안에서 유혹하는 세상과 그것을 조종하는 사탄이 남아있는 한 맹공을 퍼붓는 것이다. 크신 은혜를 받고 살아갈 수 없도록 한다. 그러나 늘 그러진 않는다. 예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실 것이다. 정말 예수님 같은 높은 경지에 삶을 곧 살게 될 것이다. 오해하지는 말자. 이런 은혜가 그날에 오실 것이므로 근근이 죽지 못해 살다가 그 날에 절정에 구원을 누릴 것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늘 우리에게 계속 주시는 것이다. 어제도 내일도 주신다. 다만 이것이 그날에 절정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산 정상에는 누가 올라가는가? 산 밑에서 김밥 먹는 사람이 먼저 올라가는가? 아니면 끙끙거리며 올라가는 사람이 먼저인가? 당연히 뒤에 사람이다. 예수님 오시면 뛰어나가는 것이 아니고 계속 오르는 것이 수반되어야 한다. 허리를 동인다는 말과 근신하라는 말도 조심하라는 소극적인 뜻이 아니다. 허리를 동인다는 말은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리를 듣고 출애굽 때 허리를 동이고 유월절 때 음식을 먹은 것이다. 곧 행동할 채비를 하라는 것이다. 은혜를 몸으로 만들라는 뜻이다. 근신하다는 말은 술에 취하지 않고 맨 정신으로 또렷하다는 것이다. 단지 술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에서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지 맑은 정신으로 분별하라는 것이다. 알라는 것이다. 풍성히 은혜에 거하게 하심을 분별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거룩해지는가? 허리를 동이고 근신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모든 자리에서 은혜를 마음 다해 바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때 거룩해지는 것이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순종하는 자녀 된 것을 알 때 거룩해진다고 하였다. 14절을 보자.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당신은 순종하는 자녀인가? 언제 무슨 순종을 많이 하셨나? 저는 순종하는 자식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순종하는 자녀들이다. 우리가 한 순종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순종을 우리가 하신 순종이라고 여겨주신다. 드디어 우리가 순종하는 자식이 된 것이다. 순종하지 않을 때 사욕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가 많다. 사욕은 과욕이다. 사욕이라는 게 이 욕망.. 음침함과 음란함을 가져서 사욕이 된 것이 아니라 좋은 것, 필요한 것 과도하게 욕망에 사로잡혀 그 욕망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을 때이다. 어떤 욕망도 어떤 욕구도 사사로운 것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을 때 다 우상이 되는 것이다. 사욕이 본받지 말라는 것은 붕어빵 틀같이 닫혀 버리는 것이다. 별 모양에 아무리 바라봐야 별 모양만 나온다. 그곳에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제 지인의 아들이 더블백에 자기 몸무게만큼의 마약과 권총을 넣고 팔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보석이나 사면이 없는 종신형을 받았다. 젊은이가 말이다. 그런데 8년 만에 최우수 모범수가 되어 가석방되어 잘 살고 있다. 이런 아들을 둔 지인과 얘기하다 대뜸 "성경에 누구를 존경하는가?"라고 물었다. 요나를 제일 존경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왜 불순종의 요나를 존경하는가?"라고 물었다. 진짜 하나님 자녀가 되어야 하나님 얘기를 안 듣는다고 얘기하더라. 순간 나도 설득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제가 교회 사택에 사는데 제가 아는 목사들의 자녀들은 말을 잘 듣더라. 그런데 저희 집 자녀는 그렇지 않다. 말 잘 듣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옆집의 아들들은 우리말을 잘 들을까?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무나 못한다. 지옥 가고 싶지 않아 순종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다.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을 자유 속에 순종을 요구하시며 우리가 순종하면 복을 주니 벌을 내릴까 봐 무서워하라고 하시지 않는다. 이와 달리 너무 놀라워 마음을 나눠주시고 나를 성장시키시는 마음을 알려주시는 게 새롭고 고마워서 순종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지금 우리가 순종 못할 수 있지만 뒤뚱 거리고 어설프지만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놀랍고 감사할 것 밖에 없고 이 분과 동행하고 사는 것이 더 이상의 행복이 없다고 생각될수록 이것이 진짜 순종인 것이다. 우리가 이웃집 아저씨께 한 번 하는 순종하는 게 아니라 믿는 자녀 된 확신의 순종이다. 예수님의 공로를 알고 그런 순종의 마음을 붙드는 것이다. 점점 더 거룩해짐을 믿는다. 베드로는 세 번째로 종교의 영역뿐 아니라 모든 삶에 순간과 영역에서 거룩해질 수 있다고 말하신다. 15절을 보자.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하신다. 레위기 19장 2절을 인용한 말씀이다. 레위기는 잘 아시다시피 평신도와 제사장에게 어떻게 하면 거룩에 이르는가? 가르쳐주는 책이다. 모든 행실에서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하시면서도 레위기 전체에 걸친 율법과 말씀을 일체 하고 있지는 않다. 거룩이라는 것이 어떤 특정함 계명과 계율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마음 쓰고 행동하는 것 이상의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행실에서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다는 말씀은 무거운 계율을 지게 하시려고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알면 알수록 신나게 하신다. 우리 생활의 대부분은 거룩과 관련이 없다. 우리가 무언가 지고 나아가도 칭찬받기에는 부족하다. 거룩이 어떤 특정한 계명을 지킨다는 가정이라면 말이다. 모든 행실에서 거룩하다고 한다면 힘 솟을 일과 즐거운 일들이 넘칠 것이다. 상상만 해도 흥분된다.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어떤 욕망과 욕구와 필요도 같이 추구하면서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돈을 벌어도 거룩해질 수 있는 것이다. 공부를 해도 마찬가지다. 공부를 안 해도 거룩해질 수 있다. 물론 공부를 하는 편이 거룩해질 확률이 높다. 쉬어도 거룩해진다. 여행을 가도 거룩해질 수 있다. 등산을 가도 거룩해질 수 있다. 낚시도 거룩해질 수 있다. 정치를 해도 거룩해질 수 있다. 국악을 해도 거룩해질 수 있다. 개를 길러도 거룩해질 수 있다. 고양이를 길러도 거룩해질 수 있다. 결혼을 하거나 안 해도 거룩해질 수 있다. 종교 영역뿐만이 아니다. 우리 삶 전체를 거룩하게 하신다. 모든 행실이라는 말은 주일 10시, 12시 같이 어떤 특정한 시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살리는 말씀이다. 세워주는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느끼고 동행하고 임재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이다. 놀라운 말씀이다. 주일만이 아니라 모든 삶에서 거룩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존귀한 자인 것이다. 세상에 어떤 종교와 신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을 얘기하는 신이 없다. 모든 신이 내가 이러니 벌벌 떨라고 얘기한다. 자기를 떠나라고 얘기한다. 아버지 하나님 만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거룩해질 수 있다고 그것이 마땅하다고 힘주시고 격려하신다. 거룩하다고 하면 힘이 없거나 까칠하거나 날카롭거나 행동거지가 조심하게 되거나 단정하거나 엄숙하게 된다는 억측이나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은혜를 바라는 것이다. 순종하는 자녀라 여겨주심을 붙드는 것이다. 모든 삶에서 거룩에서 비켜간 것이 없는 것이다. 활짝 열어 놓으셨다. 내 본성. 가장 하나님 다운 것. 하나님 자녀를 세우시고 인생 한가운데로 걷게 하시는 이 시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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