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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작은 책 <화육론-On ter Incarnation>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와 같은 몸을 취하시고 인간으로 사신 것은 그분이 친히 감독하고 다스리시는 전 우주에서 그분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이곳 지상에서 주님이 몸을 입고 행하신 일들을 보며 그 몸 안에 거하셨던 분이 하나님의 말씀이셨음을 인정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기적에 대해 친히 하신 말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저는 이 교리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피조 세계 전체에 드러난 하나님의 활동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대대적 활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육하신 하나님이 팔레스타인에서 한 인간으로 사시며 행하신 기적들은 이 대대적 활동과 똑같은 일들을 다른 속도로, 작은 규모로 이룹니다. 그 주된 목적 중 하나는 한 인간이 능력을 발휘해 소규모로 이루는 일을 본 자들이 같은 일이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그 배후의 능력 또한 인격적 존재임을, 참으로 2천 년 전에 우리 가운데 사셨던 바로 그분이심을 인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실 기적이란 전 세계에 너무나 큰 글씨로 적혀 있어 일부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이야기를 작은 글씨로 다시 들려주는 일입니다. 큰 글씨로 적힌 이야기 중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도 있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부 기적들은 하나님이 이미 보편적으로 행하신 일을 국지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기적들은 하나님이 아직 행하지 않으셨으나 앞으로 행하실 일들을 국지적으로 보여 줍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는 지난 일을 상기시켜 주는 기적도 있고, 이루어질 일을 예언하는 기적도 있는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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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8일
지금껏 저는 유령을 본 적이 있다는 사람을 단 한 명 만나 봤습니다. 여자분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 사람은 유령을 보기 전에도 영혼의 불멸성을 믿지 않았고, 본 후에도 여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환영을 본 거라고 생각합니다. 본다고 믿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지요. 기적에 대해 말할 때는 우선 이 점을 분명히 해둬야 합니다. 처음부터 초자연적인 현상을 배제하는 철학을 견지하고 있다면 어떤 경험을 하더라도 그 일을 기적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기적이라고 주장되는 모든 사건은 결국 우리 감각에 와 닿는 경험이며, 우리의 감각은 때로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언제라도 우리는 자신이 본 것이 환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지 않는다면 언제나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따라서 기적이 정말 그쳤건 그렇지 않건 간에, 유물론이 득세한다면 서유럽에서는 기적이 정말 그친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묵시록의 말씀대로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해봅시다. 현대의 유물론자가 하늘이 말려 올라가고 크고 흰 보좌가 나타나는 광경을 직접 본다고 해봅시다. 그가 자신이 불못에 던져지는 것을 느낀다고 합시다. 그래도 그는 그 불못 속에서 조차 자신의 경험을 환각으로 여길 것이고 심리 분석이나 뇌 병리학으로 그 현상을 설명할 것입니다. 경험 자체는 아무것도 입증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이 꿈꾸는 것인지 깨어 있는 것인지 의심한다면, 어떤 실험도 그의 의심을 풀어 줄 수 없습니다. 모든 실험이 꿈의 일부 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은 우리의 선입견에 따라 이것저것을 입증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피고석의 하나님> 1부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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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일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걱정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 여기는데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네. 그건 고통거리지 죄가 아닐세. 모든 고통거리가 그렇듯, 우리가 잘 감당하기만 하면 걱정도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일이 된다네.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작, 그 첫걸음은 겟세마네에서 일어났잖은가. 겟세마네에서 아주 이상하고 중요한 일이 벌어졌네.
우리 주님이 하신 여러 말씀을 통해 볼 때, 그분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음이 분명하네. 주님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자신처럼 행동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아셨어. 그러나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기 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이 지식이 그분을 떠난 것이 분명하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단서를 달았다고는 해도, 잔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임을 아셨을 수는 없어. 그것은 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야.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겠나? 인류가 당하는 어떤 시련도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을까? 십자가를 앞둔 마지막 순간, 주님께 긴장과 염려가 찾아왔네. 희망을 품을 때 찾아오는 고통들이지. 주님은 그 극한의 공포를, 어쩌면 혹시라도 면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품게 되신 거야. 선례가 있었거든. 바로 이삭이네.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그것도 마지막 순간에 이삭은 목숨을 건졌네. 그런 일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란 말이겠지……. 그리고 주님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보셨을 거야……. 대부분의 종교화나 이미지가 표현한 것과는 전혀 다른 끔찍한 장면이었겠지.
이 최후의(그리고 틀린) 실낱같은 희망과 그에 뒤따른 영혼의 동요, 핏방울 같은 땀이 없었다면, 주님은 참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네. 완전히 예측 가능한 세상에서 사는 것은 인간의 삶이 아니니까.
마침내 천사가 주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comforting)”는 말씀이 있네. 16세기에 쓰인 comforting이라는 영어 단어나 그리스어 엔니슥쉬온(?)은 ‘위로(consoling)’라는 의미가 아니네. ‘강화(strengthening)’가 더 적절한 의미라고 볼 수 있지. 여기서 강화함이란 다가올 상황을 감당해야 한다는 필연성과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는 뜻 아닐까? <개인기도> 8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