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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5일
‘마리아의 찬가’와 히브리 전통 시의 유사성은……문학적으로만 흥미로운 주제가 아닙니다. 물론 차이점도 있습니다. 마리아 찬가에는 저주도, 증오도, 자기 의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담담한 진술이 있을 뿐입니다. 주께서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앞서 저는 시편 기자들의 거친 목소리와 성가대 소년 가수의 고음 사이에 아이러니한 차이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 차이점은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갑니다. 다시 한번 고음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한 소녀의 목소리입니다. 조상들의 흠 투성이 기도들을 하나님이 완전히 외면하신 것은 아니라고 흠 없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고약한 환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잔잔하고 큰 기쁨만이 있습니다. 그 두 가지를 오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어머니에게 어떤 명예를 돌려야 하는지를 놓고 나누어져 있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한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동정녀 탄생을 믿고, 우리 주님이 육체적으로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인성을 갖고 계심을 믿는다면(주님이 인간의 몸에다가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제2위를 가진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단일 것입니다), 그 인성이 인간에게만 물려받은 것이라는 점도 믿어야 합니다. 그 출처는 하나뿐입니다(그 출처에 모든 참된 이스라엘이 압축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예수님 안에 엄한 요소가 있었다면, 그것이 인간적으로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지 능히 추측할 수 있고, 그 추측에는 불경한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그분의 소년 시절, 이웃 사람들은 “그 엄마에 그 아들이야”라고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을 통해 우리는 그분이 어머니에게, 혹은 어머니에 대해 하신 가혹한 말씀 중 일부가 그렇게까지 가슴 아픈 것은 아니었을 거라고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그 말을 대단히 잘 이해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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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3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선한 행위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냐를 두고 자주 논쟁을 벌여 왔습니다. 저는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무어라고 말할 형편이 없습니다만, 그래도 제가 보기에는 이런 논쟁이 가위의 양날 중 어느 것이 더 필요한가를 따지려는 일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사람은 도덕적인 노력을 진지하게 기울여 봐야만 항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그 절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그 믿음으로부터 반드시 선한 행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입장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패러디를 만들어 서로를 비난했습니다. 이 두 패러디는 진리를 더욱 분명히 드러내 주지요. 그중 한 편의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오로지 중요한 건 선한 행위다. 최고로 선한 행위는 사랑이다. 최고의 사랑은 돈을 바치는 것이다. 돈을 바치기에 최고로 좋은 곳은 교회다. 그러니 우리에게 1만 파운드를 내라, 그러면 우리가 당신의 뒤를 봐주겠다.” 물론 이 헛소리에 대한 응답은 “그런 동기로 베푸는 선행, 천국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베푸는 선행은 선행이 아니라 장삿속 투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또 다른 한 편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는 비난을 받았지요. “오로지 중요한 건 믿음이다. 따라서 믿음만 있다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 친구여, 마음껏 죄를 짓고 즐겨라. 그래도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문제 삼지 않으실 것이다.” 이 헛소리에 대한 응답은 “당신이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조금이라도 주목하는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그리스도를 믿거나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몇몇 이론을 머리로만 받아들인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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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2일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마음이 생길 때 그 마음을 북돋워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인위적으로 애정의 감정을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것이 곧 사랑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어떤 이들은 기질적으로 ‘냉정’합니다. 그것은 불운한 일이긴 하지만 죄는 아닙니다. 소화불량이 죄가 아닌 것과 같지요. 그런 기질이 있다고 해서 사랑을 배울 기회가 없거나 사랑을 배워야 하는 의무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법칙은 아주 간단합니다.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나 사랑하지 않나 고민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냥 그를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십시오. 그러면 곧 위대한 비밀 하나를 발견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는 비밀입니다. 어떤 사람이 싫다고 해서 상처를 주면 점점 더 그가 싫어집니다. 그러나 싫은 사람이라도 잘 대해 주면 점점 덜 싫어집니다. 한 가지 예외는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사랑의 법을 따르기 위해 잘 대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얼마나 너그러이 잘 용서해 주는 사람인지를 과시하거나 상대방이 마치 빚진 사람처럼 자기를 찾아와 ‘감사’를 표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잘 대해 주는 경우는 실망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사람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들은 어떤 것이 과시이고 선심인지 금방 알아챕니다). 그러나 그가 단지 하나님이 지으신 자이기 때문에(우리처럼) 나의 행복을 바라듯 그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잘해 준다면, 그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더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며, 아니면 덜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저자들은 이 사랑이라는 말을 인간들 사이의 기독교적인 사랑뿐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을 묘사하는 데에도 사용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데 종종 난색을 표현합니다. 자기 마음속에는 그런 감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은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십시오. 가만히 앉아 억지로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 내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만일 내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무엇을 할까?”라고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그래서 떠오르는 일을 가서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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