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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와 공정함

Q.T/C.S.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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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문제에는 하나님의 죄 용서와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같은 부분은 용서가 양해를 뜻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와 양해를 같은 것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자신들을 속이거나 괴롭힌 누군가를 용서하라는 말을 들으면 그들은 속임수나 괴롭힘 자체가 없었다고 설득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면 용서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그 사람은 가장 중요한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의 다음번 약속을 반드시 믿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마음에 남아 있는 원한과 상대에게 모욕과 상처를 주거나 앙갚음하고 싶은 욕망을 모두 없애 버리기 위해 정말 분투해야 합니다.)

이 상황과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상황과의 차이점은 이렇습니다. 우리 자신의 경우, 우리는 스스로의 구실을 너무나 쉽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구실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내 죄에 대해 늘어놓는 구실은 실제로 내 생각만큼 훌륭하지 않다고 봐도(확실한 정도는 아니라도) 무방할 것입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의 구실들은 내 생각보다 낫다고 봐도(확실한 정도는 아니라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의 잘못이 우리 생각만큼 크지 않음을 보여 주는 모든 것에 먼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죄가 전적으로, 철저하게 그의 잘못이라 해도 우리는 여전히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가 저지른 죄의 99퍼센트가 정말 타당한 구실들로 설명될 수 있다 해도, 용서는 남은 1퍼센트에서 시작됩니다. 양해할 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는 일을 양해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자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공정함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용서할 수 없는 부분들을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어렵습니다. 한 번의 큰 모욕을 용서하는 건 어쩌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일은 다릅니다. 들볶아 대는 시어머니, 윽박지르는 남편, 바가지 긁는 아내, 이기적인 말, 거짓말쟁이 아들을 계속해서 용서하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방법은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기억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매일 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할 때마다 진심으로 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는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비를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외가 있다는 암시는 전혀 없으며, 하나님은 결코 빈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영광의 무게>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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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실수와 하나님의 교정책

Q.T/C.S.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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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8일

이 위험을 피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모든 변명을 우리보다 훨씬 잘 아신다는 걸 기억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정상 참작 사유’가 있다면 하나님이 그것을 놓치실 우려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도 못 한 많은 사정들까지 다 아실 것이므로, 겸손한 영혼들 중에는 죽은 후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죄를 덜 지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기뻐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 양해할 만한 점이 있다면 하나님은 다 양해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할 것은 핑계 댈 수 없는 부분, 죄입니다. 하나님이(우리 생각에) 양해하실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우리가 의사에게 갈 때는 부러진 팔처럼 우리 몸에서 잘못된 부분을 보여 줍니다. 다리와 눈과 목은 다 괜찮다고 계속 설명하는 것은 시간낭비에 불과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잘못 생각한 것일 수 있지만, 어쨌거나 그 부분들이 정말 괜찮다면 오히려 의사가 그 사실을 더 잘 알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정말로, 진심으로 죄 용서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핑계를 늘어놓는 우리의 불안은 상당 부분 참으로 죄 용서를 믿지 않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우리의 잘못들에 대해 하나님이 만족하실만한 타당한 이유 들을 제시하지 않으면 우리를 다시 받아 주지 않으실 거라는 생각 때문에 생겨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진정한 용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죄, 정상 참작을 다 하고도 남은 죄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그 끔찍함과 더러움과 비열함과 악독함 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지은 사람과 온전히 화해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용서이며, 우리가 구할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용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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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와 양해

Q.T/C.S.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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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우리는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용서를 놓고 자주 실수를 범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저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때(아주 주의하지 않는 한) 실제로는 제가 그분께 전혀 다른 것을 구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용서가 아니라 양해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와 양해는 전혀 다릅니다. 용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 너는 이런 일을 했다. 하지만 네 사과를 받아들인다. 나는 이 일에 대해 네게 앙심을 품지 않을 것이고 우리 사이의 모든 것이 이전과 똑같을 것이다.” 그러나 양해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어쩔 수 없었다는 것과 본심이 아니었다는 걸 알겠다. 정말 네 잘못이 아니었구나.” 이런 의미에서 용서와 양해는 반대말에 가깝습니다. 물론, 하나님과 사람 사이건 사람과 사람 사이건, 수십 가지의 경우, 용서와 양해가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죄로 보였던 것의 일부가 실제로는 누구의 잘못도 아님이 드러나 양해가 됩니다. 그리고 남은 부분은 용서를 받습니다. 명백한 이유가 있는 경우라면 용서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행동 전체에 용서가 필요하다면 그 일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라고 하는 일이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해명을 받아 주시기를 구하는 일일 때가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이유는 대부분의 행동에는 어느 정도의 핑계, ‘정상 참작을 할 만한 상황’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하나님께(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알리느라 바쁜 나머지 정말 중요한 것을 잊기 쉽습니다. 남은 부분 말입니다. 어떤 행동에서 핑계 댈 수 없는 부분,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는 부분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잊어버린다면, 실제로는 우리 자신의 핑계에 스스로 만족하면서 자신이 회개했고 용서받았다고 상상하며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영광의 무게>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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