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에 해당되는 글 376건
2월 25일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죄를 회개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가끔 가상의 죄라도 회개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죄를 회개하는 젊은이들에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이보다 다소 복잡합니다. 잉글랜드는 하나의 자연적인 주체가 아니라 시민 사회입니다. 따라서 잉글랜드의 행위라고 하는 것은 실상 영국 정부의 행위를 말합니다. 젊은이에게 잉글랜드의 외교 정책을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이웃의 행위를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외교부 장관이나 각료 장관은 이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정죄를 전제로 합니다. 그러므로 국가적 회개의 으뜸가고 치명적인 매력은 우리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괴로운 일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슬퍼하는-그러나 우선 비난하는-신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자신이 하는 일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젊은이들이 분명히 알게 된다면, 그는 분명 사랑의 원리(law of charity)를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불행히도 국가의 죄를 회개할 때 쓰는 표현이 그 진정한 본질을 감추고 있습니다.
참회자는 위험한 수사적 표현을 사용하여 정부를 ‘그들’이 아니라 ‘우리’라고 부릅니다.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말고 자신에게는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해서는 안 되는 입장이므로, ‘우리’라고 불리는 정부는 ‘사실상(ipso fac-to) 사랑의 영역은 물론, 정의의 영역에도 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참회자는 정부에 대해 무슨 말이건 하고 싶은 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거침없는 비난이라는 널리 퍼진 악을 마음껏 저지르면서도 줄곧 자신이 참회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Q.T > C.S.루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서와 양해 (0) | 2019.07.15 |
---|---|
죄의 용서 (0) | 2019.07.10 |
무례한 자들의 불평 (0) | 2019.07.10 |
완전한 회개자만 줄 수 있는 도움 (0) | 2019.07.09 |
회개란 무엇인가? (0) | 2019.07.09 |
2월 22일
만약 예수가 인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라면 그의 고통과 죽음은 “그에게 지극히 쉬운 일이었을 것이므로” 아무 가치가 없지 않으냐고 불평하는 이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반발을 배은망덕하고 무례하다며 나무라는 사람도 있겠지요(이런 나무람은 아주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선뜻 그렇게 못하는 것은 그들이 무언가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 이 말에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주장은 옳습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생각보다 더 옳은 주장일 수도 있습니다. 완전한 순종, 완전한 고난, 완전한 죽음은 예수가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더 쉬운 일이었을 뿐 아니라, 오직 그가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유 삼아 그의 순종과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 같지 않습니까? 선생님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글씨를 써 주는 것은 그가 어른으로서 글씨 쓰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생님은 아이보다 더 쉽게 글씨를 쓸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이를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글씨 쓰는 것은 어른에게 쉬운 일’이라는 이유로 선생님의 도움을 거절하고 글씨 쓸 줄 모르는(따라서 ‘불공평한’ 이점을 갖고 있지 않은) 다른 아이에게 배우겠다고 우긴다면, 글씨 배우는 일은 아주 지지부진해지고 말 것입니다.
제가 급류에 빠졌는데, 강둑에 한 발을 딛고 있는 어떤 사람이 저의 목숨을 구해 주기 위해 팔을 뻗었다고 합시다, 그 때 제가 “아니, 이건 불공평해! 당신은 지금 유리한 위치에 있잖아! 강둑에 한 발을 디디고 있으니까”하고 (물에 빠져 숨을 헐떡거리면서) 소리쳐야 마땅하겠습니까? 그가 가진 이점-여러분이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는-이야말로 그가 저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자기보다 강한 존재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순전한 기독교> 2장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Q.T > C.S.루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죄의 용서 (0) | 2019.07.10 |
---|---|
국가의 죄를 회개하는 데 따르는 치명적 유혹 (0) | 2019.07.10 |
완전한 회개자만 줄 수 있는 도움 (0) | 2019.07.09 |
회개란 무엇인가? (0) | 2019.07.09 |
살아계신 하나님께 다가서기 (0) | 2019.07.09 |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기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 속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인간과 함께 거하십니다. 인간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계신 곳에 인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의 신비를 담은 최대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심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며 하나님의 존재를 계시하는 실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 측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27)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외형적인 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형상이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본심과 교통 하는 영적인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혼'이라고도 하고, '얼'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대로'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 '자기 형상'은 누구의 형상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창세기 2장 7절에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생령이란 '살아 있는 혼', '살아 있는 생명'을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호흡을 함으로써 살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서 영적인 존재가 되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8편 4~5절에서 "사람이 무엇 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 이관데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대문호였던 셰익스피어는 "인간은 하나님의 작품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이다. 그의 눈동자는 얼마나 빛이 나며, 그의 이성은 얼마나 위대하며, 그의 몸놀림은 얼마나 신기한가!"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피조물에게는 자신의 형상을 반영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와 친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인격적 존재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몇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지성, 감정, 의지 등을 가진 인격적 존재입니다.
둘째,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스스로 결단하고 행복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의지가 있는 책임적 존재입니다.
셋째, 인간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윤리적 존재입니다.
넷째, 인간은 창의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다섯째,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며, 그 뜻에 따를 수 있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닮았다고 할 때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부모의 외모를 닮습니다. 또 성격을 닮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로는 부모의 마음과 그 정신을 닮았을 때 그 부모의 자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들여서 우리가 생령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영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심이요.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심으로 받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게 하심으로 아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살려 주심으로 사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주심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생기는 하나님의 생명이요.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과 하나님이 교제하는 데만 있습니다.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 > 故 이중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1/12/30 한신교회 주일예배 (0) | 2019.11.2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