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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8장 6~16절
감사함으로 찬양 352 안개가 날 가려
감사함으로 찬양 286 나의 영혼이 잠잠히
17장에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나온다. 블레셋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데 그 노래는 여인들의 노래였다. 축제를 하면서 악기를 동원하여 춤을 췄다. 노래는 힘이 있으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 시대의 노래는 정서를 담기 마련이다. 그래서 힘이 있다. 요즘 BTS가 대단하다. 온 세계를 압도한다. 메시지가 있다. 그 가사 안에 메시지가 있다. 문제는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히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불렀다. 사울은 이것에 매우 민감해했다. 불쾌해하였다. 평정심이 깨졌다. 폭풍이 일었다. 우리도 마음에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배에 평형수가 안차서 뒤집어지기도 한다. 내면에 평정이 깨지면 매우 위험하다. 럭비공과 같다. 그 감정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시기심과 질투는 비교할 때 나온다. 오늘날은 경쟁사회이다. 유치원 때부터 그렇다. 죄인의 속성이 이렇다. 등급, 수치, 통계, 규모와 사이즈에 따라서 비교한다. 비교에 따라 울고 웃는다. 경쟁에 지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간다. 경쟁할 때 스트레스 지수는 올라간다. 관심과 인정에 민감하면 더 그렇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에 예민하다면 위험한 것이다. 사울은 시기와 질투를 했다. 시기는 남이 가지고 있으면 나도 가지고 싶은 것이다. 질투는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집착이다. 사울은 시기와 질투를 같이 가진 것이다. 다윗의 인기를 가지고 싶고 자기의 왕권을 계속 누리고 싶은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욕하는 적장을 죽인 것 밖에 없다. 오히려 왕이 승리자로서 명예를 누린 것이다. 내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 인생을 결정한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 주목한다. 거룩한 주목도 있다. 모세가 가시떨기나무를 주목했을 때 거기에 끌린 것이다. 거기서 하나님의 부름을 경험하였다. 사울은 시기에 찬 주목을 하였다. 사울의 마음이 다윗에게 집중하였다. 거기에 온 신경이 가 있었다. 오직 다윗에 움직임에 신경을 썼다. 그러므로 시기심은 정상적인 삶을 방해한다. 감정에 에너지를 한 곳에만 쏟게 한다. 영혼이 망가진다. 다른 사람이 잘돼서 불행해진다. 가까운 사람의 성공을 기뻐하기는 어렵다. 배가 아프다. 형제, 자매간에도 질투가 존재한다. 시기는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고 가까운 사람에게서 벌어진다. 옆집이 장사가 잘되면 보통일이 아니다. 좋은 동기가 시기심에서 나올 수도 있다. 친구 목사의 교회가 부흥되면 배가 아플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시기와 질투는 무서운 것이다. 아마데우스를 보면 살리에리와 모차르트가 나온다. 살리에리는 인정받는 음악가이다. 모차르트는 하늘이 내린 신동이다. 모든 사람에게 찬사를 받는다. 살리에리는 불타오른다. 음악계에서 일인자인데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를 시기하고 질투한다. 모차르트는 압도하는 실력으로 연주한다. 모차르트에 재능은 절정을 향해 달린다. 살리에리는 이인자로서 영광이 가리어지고 분노로 터트린다. 하나님을 원망한다. 십자가를 버린다. 패배감과 굴욕감으로 모차르트를 죽일 계획을 갖는다. 시기와 질투는 살인으로까지 번졌다. 살리에리 증후군이라고 들어보았는가? 인간의 절망이다. 늘 2등 하는 친구는 늘 악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살리에리는 자신도 충분한 재능을 갖추었다. 최고의 음악가로 살 수 있었다. 질투심이 자기를 태웠다. 날마다 모차르트를 바라보았다. 상대적 빈곤은 자주 비교하면서 나타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면 헤어 나오기 힘들다. 괜찮은 사람도 그렇다. 마귀가 주는 것이다. 비참해진다. 열등감은 무서운 것이다. 비극과 두려움이며 웅덩이이다. 감사와 기쁨을 누리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사울은 이미 왕이었다. 출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윗에게 주목했다. 그냥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인데 그렇지 못했다. 오늘 내가 사랑받는 존재로서 받아야 된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 아들을 내어줄 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사울이 시기와 분노에 사로잡혀 있을 때 악령이 주목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막으시지 않으셨다. 이제부터는 악령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감정은 그냥 방치하면 마귀가 들어온다. 이렇게 되면 전혀 다른 고민이 된다. 그러면 심각해진다. 극단적 상태로 번진다. 사울은 악령에 이끌려 광기를 이룬다. 집안을 돌아다녔다. 사탄은 최악에 상태로 데려간다. 죽이는 상태까지 말이다. 죽이는 곳에 가보면 사탄이 주도적임을 알 수 있다. 그 안에 악한 영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이 악한 영이 있기 때문이다. 사울은 다윗을 죽일 생각에 사로잡혔다. 불행했다. 창을 던졌다. 다윗이 피해버렸다. 사울은 다윗을 제거하면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러나 경쟁자가 없어지면 또 다른 경쟁자가 나올 뿐이다.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았다.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것을 보며 더 두려워하였다. 조건과 상황에 문제가 아니다. 외적인 것으로는 사울이 압도한다. 그런데 사울은 초라했다. 옹졸하고 겁에 질려있었다. 백성들에 소리에 들뜨지도 않았다. 지혜롭게 처신했다. 왜 이런 일이 있을까? 살펴보자. 하나님보다 실제 하는 대상이 나타날 때 착각하는 것이다. 우상이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자기의 왕권을 흔드는 자로 다윗을 본 것이다. 사울이 발악을 한다. 사울은 다윗에게만 주목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에게만 주목했다. 조금도 요동치 않았다. 모든 힘은 하나님에게 주목해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주목하는 사람을 주목하신다. 그의 시선이 하나님에게서 권력으로 돌렸을 때 망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주목하라고 하신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주목하는 것이다. 수없는 우상들이 시선을 빼앗는다. 즐거움들에 빼앗긴다. 우상은 주목하게 한다. 시선을 하나님으로 돌려야 한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주목하기 위해서이다. 기도하는 동안에 다른 데로 돌리지 말자. 기도에 마지막은 모든 시선을 주님께 돌리는 것이다. 주님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묵상은 하나님에게 주목하는 것이다. 내 모든 마음이 삶에 초점이 하나님께 주목하는 것이다. 그분을 기대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주목한다. 주목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주변에 아랑곳없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한 사람에게 주목하는 것이다. 그의 모든 시선은 하나님에게 있었다. 지금 시대는 매우 시선을 산만하게 한다. 요구하는 소리가 많다. 시기와 질투가 일어난다. 두려움에 빠진다. 마귀가 우리의 영혼을 앗아간다.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하나님이셨다. 민심도 하나님이 주장하셨다. 여인들의 노래는 더 커져갔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에 왕권을 탈취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었다. 하나님이 막으셨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비교와 경쟁이 아니다. 우리의 시선을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내가 조금 잘났다고 우쭐대지 말자. 오직 시선을 하나님께 두자. 사울은 하나님께 많은 것을 받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흘 해졌다. 결국 중심을 잃었다. 경쟁자가 나타나자 조급해졌고 죽이려 하였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으면 분노하고 죽는다고 야단이다. 결국 집중력이 깨진다. 몰락한다. 오직 하나님만 주목하자. 모든 위험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다. 나를 주목하는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자.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오직 주님께. 사울은 자신의 일에. 자신에 자리에 주목했다. 우리 시대 속에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그 시선을 돌리신 적이 없다. 늘 바라보신다. 나를 놓치지 않으신다. 문제는 우리이다.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놓치지 말자. 승리의 길은 다른데 있지 않다. 사울은 수천 명에 병사를 풀었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지키셨다. 사울의 칼날을 피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을 때 백성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칭송을 받게 하셨다. 하나님에 행하심이셨다. 우리는 주변에 사람들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그냥 아낌없이 박수를 치자. 나보다 늦게 전도된 사람이 은혜받으면 시기하지 말고 배 아파하지 말자. 박수를 쳐주자. 모든 관계를 점검해보자. 망가지지 않았는지. 어리석은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지. 명쾌한 대조를 통하여 깨닫자. 오늘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주목하자. 하나님이 알아서 책임져 주실 것이다. 사울이 아니다. 하나님이다. 주목하는 일에 실패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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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의 관심사는 성벽을 다시 쌓는 일이었습니다. 첫 포로 귀환이 에스라와 함께 이루어진 이후에 10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성전은 재건되었지만, 성벽은 무너진 채 100여 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 성벽을 쌓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벽이 없으니까 다시 재건된 성전은 외부에 완전히 노출된 무방비 상태로 남아 있었고, 유대인들은 이 마을 저 마을에 이방인들과 섞여서 세상 사람과 똑같은 모양으로 사는 꼴이 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비하면 성벽을 쌓는 일은 별 볼 일 없는 사소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저도 한때는 느헤미야서를 읽으면서, ‘뭐 성전만 재건하면 되지, 성벽 쌓는 것이 뭐가 대단해서 느헤미야서가 꼭 성경에 들어 있어야 되는가?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지도자로서 탁월하다는 것이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하면, 남이 놓치고 넘어가기 쉬운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성벽을 다시 쌓는 것이 성전을 재건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것이 느헤미야의 탁월성입니다. 성전이 없었다면 성벽 쌓는 일이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재건된 마당에 성벽을 쌓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느헤미야의 시각이었습니다.
벽이 없으면 성전이 보호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밤낮없이 위험과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이 있지만 성전을 보호할 성벽이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결국 이 마을 저 마을에 흩어져서 가나안 부족들과 함께 동화되는 생활을 했고, 그들의 잡된 종교와 문화에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젖어들었습니다. 서로 통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고 언어가 혼합되었으며, 신앙적인 면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차별성을 내보일 수 없을 만큼 혼탁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민으로서의 주체성을 지키지 못하는 어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벽이 꼭 있어야만 했습니다. 성벽은 적으로부터 성전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영향을 차단하기 때문에, 상징적이면서도 실제적인 이스라엘 민족의 보호망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벽의 의미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세속화, 이방화를 내버려둔다면 성전을 백 번 재건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또 흩어질 위험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성벽을 쌓아서 상징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인과 구별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는 것과, 또한 예배와 하나님의 말씀이 혼탁한 세상 물에 더럽혀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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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6일
교회 안에서(교회 밖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별다른 생각 없이 아주 많은 말을 합니다. 예를 들면, 사도신경을 통해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저는 이 문구를 몇 년 동안이나 되풀이하다가 이것이 왜 사도신경에 있는지 자문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 문구는 사도신경에 들어갈 가치가 없는 듯 보였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당연히 믿지, 말할 것도 없잖아.” 그러나 사도신경을 작성했던 사람들은 이것이 우리가 교회에 갈 때마다 상기해야 하는 신앙의 일부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제 경우에는 그들이 옳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죄 용서를 믿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나마도 계속 상기하지 않으면 아주 쉽게 잊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고 믿지만, 우리에게 죄지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고도 믿습니다. 이 두 번째 부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기도문에 있고, 우리 주님이 강조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 중 이만큼 분명한 부분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없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의 죄가 그리 끔찍하지 않거나, 정상 참작이 되는 경우에만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게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야 하고, 그것이 아무리 끔찍하고 비열하고 자주 되풀이되더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 역시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영광의 무게>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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