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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4장 28~33절
찬송가 446장 오 놀라운 구세주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을 주실 때 테스트를 거쳐서 주시는 경우가 많다. 저희도 교회를 개척할 때 정자동 상가를 얻어서 갔다. 4층에 80평 정도 공간에 복도와 화장실, 사무실을 내면 본당은 조그마했다. 결정이 나고 잔금을 치르는데 이웃 교회 목사님에게 이 곳에 못 들어온다고 연락이 왔다. 아마 통일교로 오해한 것 같다. 부동산에 연락을 해서 하루만 연기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목사에게 찾아가서 비굴하게 사정했다. 처음으로 개척한다고 얘기했다. 사랑의 교회에서 후원해서 개척하는 1호 교회라고 빌었다. 처절하게 2시간을 빌었다. 2년만 있다가 나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십자가와 간판도 안 걸겠다고 하였다. 주보에도 인근 교회 성도는 안 받는다고 쓰겠다고 하였다. 청소년 사역만 하였었다고 생각해 달라고 하였다. 수련회 장소로 가기까지가 너무 힘들었다. 기력을 소진한 것이다. 집으로 향했다. 막내아들이 3살이었는데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내가 너한테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잠이 오지 않았다. 경기도 마석에 수련회 장소로 갔다. 2000명 가까이 모여있었다. 저녁에는 비가 부슬부슬 왔다. 식당이 모자라서 바깥까지 줄이 이어졌다. 식당 안에도 줄이 말도 못 했다. 또 눈물이 났다. 제가 또 다짐을 했다. "너희들한테 부끄러운 목사가 되지 않으마."라고 하였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정말 염려가 많았다. 창립멤버가 30명 정도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성경에 두 인물이 스쳤다. 에서였다. "이까짓 장자가 무슨 소용이 있나?"라고 했었다. 한 끼 안 먹는다고 죽지 않는다. 마치 제 꼴이 에서와 같았다. 죽을 것 같았다. 사실 죽을 만큼은 아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기도해주시고 있고 창립멤버도 30명 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 인물은 이삭이다. 고뇌에 마음이 툭 내려앉았다. 마음에 자유를 얻고 그 목사님에게 메일을 보냈다. 젊잖게 보냈다. "목사님 기도해봅시다. 걱정 마세요."라고 썼다. 그 당시 천만 원정도 손해를 보았다. 그건 피 같았다. 이웃 교회에 헌금했다고 생각했다. 깨끗이 포기했다. 미금역에 70평 공간을 보았다. 인근 교회로 찾아갔는데 그 목사님 표정이 너무 안 좋았다. 그래서 또 포기했다. 그래서 연결된 곳이 송림 중고등학교이다. 그런데 타 교회에서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예비해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좋은 곳을 주시기 전에 테스트하고 계셨던 것이다. 송림 중고등학교는 만평이 넘는 곳이다. 그런데 저는 80평도 안 되는 곳을 보고 안쓰러워 잠도 잘 못 잔 것이다. 피를 말리는 두 달이었다. 기왕 주실 거면 확 주시면 되는데 시간이 걸려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때 멱살이라도 잡았다면 지금도 아찔하다. 분당 우리 교회에 일등공신은 아마도 그 목사님 일지도 모른다. 그분을 초청할까도 생각했지만 차마 그러진 못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좋은 것을 주시길 원하신다. 그런데 80평을 원하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을 때 통과하는 것이다. 다윗에게 가장 고마운 생명의 의인은 누구겠는가? 요나단? 정답이 아니다. 골리앗이다. 세상에 골리앗이 없었다면 다윗은 초라한 목동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 다윗이 물맷돌에 죽는 바람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이다. 두 번째로는 사울이다. 사울만큼 또 고마운 존재가 없다. 잠도 안 자고 옥상을 다니다가 그 여자를 보고 불러 임신시키고 또 남편을 죽이고.. 사울을 통해 연단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 바깥에 사울을 불러 다윗 내면에 사울을 죽인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세우기 전에 자기 자신을 위하는 욕망 덩어리를 죽이기 위하여 바깥에 사울을 사용하셨다. 다윗에게 가장 고마운 존재는 사울이다. 우리가 감당을 못해서 허우적대는 것이다. 이 사람의 성격을 죽이려고 하나님이 주신 도구인 것이다. 시어머니도 마찬가지다. 그런 시어머니라도 만났기 때문에 기도하러 오는 곳이다. 못된 며느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연단하시는 것이다. 환경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강한 믿음이 필요하다. 서울 영동세브란스 병원에 이희대 교수가 있다. 여성 유방암과 갑상선 암에 대가라고 한다. 일 년에 암 수술 600회를 한다고 한다. 주일과 토요일 빼고는 하루에 두 번을 해야 한다. 그런데 당신이 대장암에 걸린 것이다. 4기였다. 수술해도 회복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이 평상시처럼 환자들을 돌보았다. 기자가 "아니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보통 암 1기만 되어도 자포자기하게 되는데 이박사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 어려움을 도전정신으로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는데 예수님을 만났다. 베드로만 예수님 앞으로 찾아갔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주님 앞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모험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폴 트루니라는 기독교 상담가가 있다. "모험하는 인생"이라는 책에서 하나님께서는 모험하도록 지으셨다고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 압제로 힘겨워할 때 이스라엘 후손들은 태어나자마자 종 살이를 하였다. 그래서 2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비굴하게 사는 것과 저항하게 사는 것이다. 선택권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험하는 분이시다. 압제하는 백성에게 비굴하게 살기를 원하시지는 않는 것이다. 홍해를 건너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가나안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비굴한 것도 부정적인 사고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이다. 홍해를 건너야 하는 것이다. 임신하신 분도 보이시는데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처럼 복 받은 존재도 없다. 마리아도 거저 된 것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모험을 요구하셨다. "네 몸을 빌려 아기 예수를 낳아도 되겠니?"라고 물으셨다. 처녀가 잉태한 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것이다. 그 당시 여자가 임신한 것이 발견되면 사형이었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제안하셨다. 여기서도 금요철야에 나오신 분들은 믿음의 여인일진대 하나님이 물으신다면 자신 있게 손들 수 있는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제안하신 모험정신은 상상할 수 없는 요구였지만 믿었던 것이다. 순종하고 수용한 것이 마리아인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모험을 요구하실 때 거절하며 살았던 우리이며 가난한 것도 하나님 탓이 아닌 것이다. 시카고 한 교회에 존 오토 버그는 "네가 만약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얻으려면 배에서 뛰어내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뛰어내리지 않으면 기적은 없는 것이다. 오늘 이것을 붙잡자. 물 위로 걷고 기적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가? 제가 사랑의 교회를 10년 사역하다가 분당에 개척하려니 죽을 맛이다. 옥한흠 목사는 지혜의 왕이다. 무슨 문제이든지 1분 안에 해결이 나왔다. 정말 안전한 배였다. 생각만 해도 죽을 것 같다. 너무 두려웠지만 사랑의 교회를 뛰어내렸다. 불신앙으로 붙잡고 있는 뱃머리에서 뛰어내리는 결단이 내려지길 바란다. 두 번째는 굉장히 중요한 것인데 모험하되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야 한다. 저는 주일학교 선생님이 원망스럽다. "베드로가 성질이 급해서 물에 뛰어내렸다."라고 망언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알아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주님이 허락하셔서 뛰어내린 것이다.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다. 뚜렷한 응답을 가지고 모험하였던 것이다. 남에 성격을 가지고 정말 이상한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렇다고 사표 던지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니까 모험하는 인생 가지고는 불안정하다. 하나님의 뜻도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냥 뛰어내리면 빠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복된 밤이 되길 바란다. 토레이 박사가 쓴 기도의 능력이라는 책을 보았다. "왜 초대교회에 능력과 말씀의 능력으로 살던 교회가 초라하게 되었는가?"라고 물었다.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정마다 자녀들이 우상이 되어서 죽을 고생인데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하였는데 독일이 신성모독을 사과하라고 벌떼처럼 일어났다. 니체는 신이 죽었음을 증거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교회를 가리켜 신의 무덤이라고 낭설 하였다. 목사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교회가 신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으로 간 교회가 포위당했을 때 마음이 아팠다. 분당 우리 교회가 신의 무덤이 아니라고 우리가 보여주자고 외쳤다. 짧은 6년 동안에 기적이 많이 일었다. 뇌종양 걸렸던 형제가 회복되고 자궁암 3기로 절망했던 여학생의 병이 떠나갔다. 수십 쌍에 이혼 가정이 회복되는 역사도 일어났다. 신의 무덤이 절대 아니다. 마치 골리앗 앞에서 싸움질하는 비참한 한국 교회 앞에서 도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가가 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분명히 뜻을 구했다.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분명히 허락하셔서 나아갔는데 빠져버린 것이다. 창업도 사업도 실패할 수 있는 것이다. 확실히 알아야 하는 것은 허락을 받아도 낭패와 좌절과 잘못됨을 경험할 수도 있지만 일시적 실수가 절망이 아닌 것이다. 베드로의 몰락이 아닌 것이다. 너무나 작은 파도 앞에서 물에 빠지는 것이 우리 모습이다. 성령님이 우리를 위로하신다고 믿는다. 치료해주심을 믿는다. 우리는 일어날 수 있다. 회복될 수도 있다. 모험정신을 가지되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나아가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주일설교를 마치고 집에 왔는데 한 자매에게 이메일이 왔었다. 이 분이 결혼을 했는데 폭력을 경험한 것이다. 이혼을 하였다. 그런데 직장 상사가 위로해 줘서 몸을 줬다. 그런데 유부남이었다. 이 여자분이 예배를 드리다 은혜를 받은 것이다. 자신의 옳지 않은 것에 대한 가책을 느낀 것이다. 그 유부남과의 관계를 끝내기로 결단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았다. 그 유부남이 용돈도 준다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감성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도 끊어지지가 않았다. 그 이메일을 읽으며 너무 가슴이 아팠다. 보통 예배가 5부를 드린다. 저는 흥분하면서 드려서 고갈이 빠르다. 그 날은 잠도 안 오고 피곤한데 정신이 말짱했다. 그런데 너무나 단호하게 "끝내여야 합니다."라고 보냈다. 베드로를 안전하게 도와주는 것은 배다. 그런데 예수님은 계시지 않는다. 배에서 뛰어내리면 죽을 것 같지만 그 건너편에는 예수님이 계시는 것이다. 그 유부남과의 관계를 끊으면 죽을 것 같지만 예수님이 계시지는 않는 것이다. 그것을 청산해도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회개는 배에서 뛰어내리는 것이다. 날마다 우는 것이 아니다. 주님 계시지 않는 그 무엇으로부터 뛰어내리는 결단을 내리길 바란다. 죽을 것 같은데 거기에 주님이 계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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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장 1~4절
이 교회에 영적 산불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나도 너도 교회도 민족도 불타서 통일이 되면 좋겠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기를 바란다. 성령집회가 생겼음을 듣고 기분이 좋았다. 저는 몸에 병이 많다. 작년 연말에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새벽 기도를 하는데 40일 기도를 하고 싶어 졌다. 저는 간암으로 수차례 수술과 투석을 해야 했다. 매일 해야 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설교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금년에는 40일 기도를 해보겠다고 했더니 다 말렸다. 그래서 선포하고 시작을 했다. 놀란 것이 있는데 나보다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은 나오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데 새벽마다 만 명이 나왔다. 인터넷까지 합하면 2만 명이었다. 두 번째는 20일 하면 지칠 줄 알았다. 그런데 40일까지 다 하더라. 성경책도 8000부가 나갔다. 이것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었다. 세 번째는 제가 40일을 하고 있었다. 불가능에 도전해보라. 성령 안에서 거짓말처럼 할 수 있었다. 40일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 예수 안 믿던 남자들이 다 기어 나왔다. 매사에 빈정대고 냉소적인 남자들이 새벽에 일어나 나왔다. 새벽에 남자들이 꽉 찼다. 병 나았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얘들도 방언을 하였다. 중학교 아이들이었다. 집중 못하던 아이들이 1시간씩 설교를 들었다. 형이 동생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도 하더라. 15분 동안 계속되었다. 저는 여러분의 자녀들이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방언을 하기를 바란다. 온누리교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모두 놀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교회가 기도하는 사람으로 꽉 차기 바란다. 성령의 폭풍과 바람을 만날 수 있다. 장로님들이 안수를 했으면 한다. 실제로 장로님이 안수하니 귀신이 나가고 뒤로 넘어지기도 하였다. 할렐루야 장로님들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33년 동안 예수님은 30년을 준비하시고 3년간 공생의 삶을 살다 가셨다. 예수님의 삶은 3가지인데 말씀을 가르치시고,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셨다. 저는 아시다시피 병약한 몸 때문에 아픈 사람에 대한 애정이 넘친다. 그런데 제가 아프다고 못하는 건 없다. 할 것은 다 했다. 그거뿐이다. 병이 나를 이기지 못한다. 조용기 목사님도 오신다고 들었다. 조용기 목사님이 "하나님이 목사님 병은 안 고쳐 주시죠?"라고 물으셨다. 자기도 그렇다고 하셨다. 그래서 조용기 목사님이 남을 고치시고 나서 항상 "나두요~"라고 붙인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생애가 말씀과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셨는데 모든 자를 다 고쳐 주셨다. 저는 교회에 오시는 분이 모두 낫기를 바란다. 사도들도 병 고치는 축복을 주셨다. 성령이 오신 후 그리스도인은 안수를 하면 귀신이 떠나가고 병 고치는 은사가 있는 것이다. 말만 하지 실제로 그 능력을 쓰지 않는 것이다. 당장 사용하기를 바란다. 특별히 교회에게 병 고치라는 명령을 하셨다. 제가 몸이 약하기 때문에 기도를 많이 하다가 깨달았다. 교회 장로들을 불러서 안수하라고 하셨다. 장로가 무엇인가? 성경은 장로가 하실 일 하나를 정확하게 얘기하신다. 병이 치유되는 것이다. 안수하는 것이다. 이제 집회할 때마다 "모든 장로님이 안수할 것이다."라고 선포하였다. 능령이 있던 없던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능력이 나타난 것이다. 예수 믿는 자에게 병 고치는 능력을 주셨다. 이것을 사용하면 부흥이 일어난다. 우리 교인들이 성령 받고 능력을 얻어야 한다. 말씀을 전하시고 병을 고쳐주셨다. 둘째로 큰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난과 병을 짊어지시고 고통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우리는 자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모든 고통에서 치유를 받은 것이다. 예수님이 짊어지신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이다. 교회에 십자가가 우뚝 선 것이다. 세 번째는 부활이다. 사망과 권세와 무덤을 깨트리시고 사탄의 권력을 깨트리시고 음부의 권세를 깨트리신 것이다.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크리스천 라이프이다. 크리스천 얼굴을 보면 우울증에 걸려있음을 본다. 그러나 부활의 에너지가 넘치기를 바란다. 네 번째가 오순절에 성령이 오신 것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삶, 죽음, 부활하시고 교회가 탄생하였는데 가장 큰 사건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것이다. 이 자리에 임하기를 바란다. 홀연히 급하고 바람 같은 소리로 임했다. 바람처럼 온 것이다. 하나님의 바람이 불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바람이 불면 종이와 나무가 흔들린다. 방바닥은 끄떡없다. 우리의 반응도 다 다르다. 가을바람이 불면 단풍이 생기고 봄바람이 불면 잎사귀가 살아난다. 성령의 바람이 불면 생기가 임하는 것이다. 불도 임했다. 사람에게는 불이 온다. 각 사람에게 불이 임하는 것이다. 혀 같은 불이 임하는 것이다. 성령의 불이 여러분에게도 임하기를 바란다. 때로는 기름처럼 생수처럼 터지는 것이다. 성령은 인격이시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오신다. 관념과 개념, 지식이나 교리가 아니다. 성령님과 예수님도 여기 계시다. 하늘에다 허공 치는 것이 아니다. 서로 악수하고 교제하고 허그하는 것이다. 영으로 말씀과 능력으로 내게 임하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니 성령 충만이 생겼다. 내 영혼 안에 하나님의 영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내 지식과 사고방식, 문화와 무의식까지 채워지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걸어가는 것이 충만함으로 채워진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예배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방언하기 시작했다. 방언은 가장 낮은 은사이다. 방언에 대해 느끼는 것이 많다. 저희 교인도 방언하기 시작하더니 뒤집어진다. 신앙생활이 달라진다. 은사를 받으면 성격이 고쳐진다. 성격 안 좋은 것은 자신이 더 잘 안다. 언어와 사고의 습관이 안 고쳐진다. 제일 고생하는 것이 자기 성격 때문이다. 주면 사람들이 괴롭다. 자기 자신이 더 괴롭다. 예수 잘 믿는 것은 성격 고치는 것이다. 늘 입과 성격이 문제이다. 비결이 있는데 은사를 받으면 고쳐진다. 40일 동안 한 가지 은사를 꼭 받기를 바랐다. 하나님 은사가 나타나면 성격이 변한다. 십일 조하면 자기가 놀랜다. 은사 받으면 자기가 놀랜다. 이런 능력이 있었네! 믿음이 나타나네! 상식과 교양이 내 삶이 아닌 것이다.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며 찬송과 기도가 달라졌다. 쇼크를 먹는 것이다. 성격 고치려고 얘 쓸 것이 없다. 은사를 받으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신호이다. 성격이 변하면 비전이 생긴다. 세계관과 목표 삶이 달라진다. 헌신이 생긴다. 사람 따라다니지 않고 말씀을 따라간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면 은사가 나타난다. 이런 것 없이 안수집사, 장로, 권사가 어떻게 되는가? 교회 행정 하라고 부른 것이 아니다. 기도하라고 부른 것이다. 섬기라는 것이다. 영적 능력을 사용하라고 부른 것이다. 전문성을 주신 것이다. 무릎 꿇고 기도하기를 바란다. 고린도전서에 능력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자. 우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는 세상처럼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세상의 법대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 3절을 보자. 예수 믿는 것은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이 계시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구원받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하나님은 왔다 갔다 안 하신다. 여러분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이 부르셔서 여기 계시는 것이다. 금요일에 어떻게 여기 앉아 있는가? 성령을 바보로 만드시지 말라. 무시하지 말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의논도 하지 않는다. 오늘부터 다시 하자. 성령님 환영합니다. 깜짝 놀라실 것이다. 찬송가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부르고 기도도 내 맘대로 하고 교회 봉사도 내가 원하는 것을 했을 것이다. 이미 오셨다. 내가 발견하는 순간 쇼크를 먹는 것이다. 얼굴이 달라진다. 생각이 달라진다. 그분이 활동하시면 은사를 주신다. 내 안에 충만해진다. 은사 받지 않고 어떻게 봉사와 헌금하는가? 내 재주로 하면 3일을 못 간다. 지치고 화가 나고 섭섭하다. 이런 것은 내가 했기 때문이다. 성령이 하시면 시험 들지 않고 기쁨이 넘친다. 성령이 임하면 능력을 주신다. 봉사이다. 이제 주님 없이 못 산다. 봉사 없이도 못 산다. 내 힘으로 하느냐?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하느냐? 성령이 하시면 할수록 능력과 힘이 넘친다. 그렇게 되면 포기도 된다. 숨을 줄도 안다. 침묵할 줄도 안다. 이상한 일들이 생긴다. 은사이다. 할렐루야교회가 은사 공동체가 되길 바란다. 7절을 보자. 어떤 이에게는 지혜를 주신다. 성령의 지혜이다. 지혜가 무궁무진하게 나타나다. 사랑받는다.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좋아한다. 그 사람 옆으로 가고 싶다. 말씀의 지혜가 넘쳐흐른다. 지식도 생긴다. 영적 지식이다. 하나님의 지식이 넘친다. 성경 100번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은 성경 읽어도 행동이 안 따른다. 성경 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 어떤 사람은 교회 온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말하는 것마다 겸손하고 아름답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말이다. 무슨 차이인가? 말씀의 지식과 지혜가 은사이다. 그 은사가 내 몸에 나타나기를 바란다. 사람을 살리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9절을 보자. 믿음의 은사가 나타났다. 어떤 사람은 긍정적이고 어떤 사람은 부정적이다. 어떤 사람은 창의적이고 어떤 사람은 모방적이다. 긍정적이고 창의적이길 바란다. 사도행전 19장을 보자. 요한이 세례를 줄 때 내 뒤에 오시는 분한테 받으라고 하였다. 교회는 은사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제가 깨달은 것이 만 명이 모여도 사랑하면 100명이 모인 것 같다는 것이다. 성령은 숫자와 상관이 없는 것이다. 교회는 은사 공동체이다. 병 낫다는 얘기가 많아야 한다. 간증문이 천통이 들어왔다. 모든 모임에 대한 얘기들이 간증 얘기로 넘쳐야 한다. 주의 종들이 많이 일어서야 한다. 방언을 우습게 여기지 말라. 아주 쉽다. 그냥 하면 된다. 안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예언도 하시고 통변도 하시라. 서로 조화를 일으킨다. 교회가 나오고 싶은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들어오는데 바퀴가 교회에 닿기만 해도 은혜를 받는다. 작은 영적 경험이라도 해봐야 아는 것이다. 암까지 안 나아도 된다. 옥한흠 목사님도 비염이 나았다고 소리를 지르셨다. 은사가 나타나면 상처가 치유된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온누리 교회는 성령을 강조하는데 이것을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투석을 끊겠다고 선포하게 되었다. 암과 저주가 물러간다. 비참함이 물러간다. 마음과 생각에 혁명이 일어난다. 미래는 가본 사람이 없는 것이다. 자살을 왜 하는가? 자신이 미래에 문을 닫은 것이다. 미래는 축복이다. 미래는 새 인생이다. 내 인생은 0점이지만 하나님은 100점이다. 나의 과거가 없어진다. 이상하게 행복예감이 든다. 못 말린다. 매사에 자신감이 생긴다. 미래는 아무도 안 가봤지만 성령이 계시면 달라지는 것이다. 인내심도 생기며 기대감도 생긴다. 조급증이 없어져 느긋해진다. 새벽 기도회 때 자녀들이 돌아오고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는 것이요 늙은이들이 꿈을 꾸는 것이다. 성령이 계심을 확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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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장 1~6절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성경을 펼쳤을 때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읽어가는가? 제가 드리는 조언 몇 가지는 '성경과 누가복음을 누가 썼는가? 기계적으로 썼는가?'의 관점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쓴 것이다. 누가가 쓴 것은 누가의 냄새가 바울이 쓴 것은 바울의 냄새가 물씬 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학자가 기계적으로 쓴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다. '유기적 영감'이다. 유기적이라는 말은 생명적 연합인 것이다. 손과 손목은 연결되어있는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연결이 유기적 연결이라는 말이다. 성령께서 누가를 감동시킬 때 어떻게 하였을까? 신비로운 일이다. 50/ 50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인가 인간인가? 100% 사람이며 100%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질문해보자. 왜 이 얘기를 첫 장에 기록하셨을까? 항상 생각해보자. 구약성경은 히브리어,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번역을 잘해도 항상 벗어나기 십상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번역이 있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무 치우쳐지면 안 된다. "강물에 네 돌을 던져라." 이것은 어떤가?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무슨 말인지 모른다. 수 천 년 전에는 남을 도와주라는 말이었다. 그대로 번역하고 설명을 붙이던가 해야 할 것이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지방 신문에 실린 내용이다. 고등학교 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차를 하나 선물해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졸업식날 성경이 들어있었다. 그래서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가출해버렸다. 여러 해 뒤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례가 끝난 뒤 자기 방에 들어가 보니 자기 책상 위에 성경이 그대로 있었다. 그것을 다시 열고 성경을 열어보니 봉투가 있었다. 자동차 값이 들어있었다. 편지도 있었다. "자동차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고 싶다."라고 쓰여 있었다. 누가복음을 읽으면서 우리도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갖고 싶은 것이 많은가? 결혼, 집, 건강 등 수도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외면하시지 않는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 영성이 높아지는 것이 현실에서 도피하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공격한다. 스크루 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을 보면 스크루 테이프라는 사탄이 졸개들을 훈련시키면서 "네가 공격하는 크리스천을 그렇게 공격해서는 힘들다. 그 청년이 어머니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을 닮게 하시고, 기도 많이 하시고, 성경 많이 읽게 하시고'라는 내용의 기도는 그대로 두고 그 어머니의 관절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못하게 막으라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현실 문제는 그대로 버려둔 채 별세계로 살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나라에 속해 있다. 하나님 나라와 현실 세계이다. 사탄은 우리를 믿음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 쉽지 않으니 우리의 균형을 깨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잘못 깨닫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접할 때 위 내용처럼 아버지가 자식에게 주어야 할 때 갖고 싶은 것뿐만 아니라 훨씬 더 큰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이 기록을 주신 것이다. 서론에서 기억할 것은 예수님의 전기가 네 권이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다. 전기가 이런 방식으로 기록된 적이 없다. 링컨의 전기는 대개 비슷하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다. 마태복음의 복음은 사자 복음이다. 백수의 왕 라이언 같은 모습이다. 사탄의 시험을 깨끗이 이기는 모습과 바람이 잔잔하게 되는 복음이다. 마가복음은 소 복음이다. 채찍을 맞으며 묵묵히 이겨내는 모습이다. 요한복음은 독수리 복음이다. 하늘 높이 떠 있는 독수리 같은 모습이다. 누가복음의 별명은 사람 복음이다. 인간 예수님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것이 사복음서이다. 옛날에는 마태, 마가, 누가를 공간 복음이라고 비슷하다고 여겼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너무 좁게 설명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시험기록만 해도 새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전혀 다른 접근으로 다가온다. 가령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소 복음이라고 하였다. 고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시험을 물리친 라이언 같은 모습이다. 성경을 좁게 보면 의미를 놓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눈을 하나님에게 고정해야 한다. 본문을 보자. 누가복음을 누구에게 썼다고 되어있는가? 데오빌로가 누구인가? 높은 분이라고 되어 있을 것이다. 4절을 보자. 물론 완전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소개하는 면도 없지는 않다. 목사도 그렇다. 항상 성도 앞에 서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읽을 때마다 다르다. 우리가 삶 속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언제가 기쁜지 물어보면 언제가 가장 기쁜 때 일 것 같은가? 가장 많은 사람들이 결혼한 날을 꼽는다. 별로 행복하지 않아도 그렇게 대답한다. 두 번째는 첫 아이를 얻었을 때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전혀 다른 것을 얘기한다. 14절을 보자. 요한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태어날 것을 예언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태어난 것도 아닌데 기뻐할 것이라고 얘기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도 생각해보자. 요한은 주인공이 아니다. 예수님이시다. 천사가 사가랴에게 "아들을 날 것이다."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 10달 동안 벙어리가 된다. 자기 아내의 나이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도 아닌데 예수님이 오시기 6개월 전부터 전령사 얘기를 하시는 것이다. 세례를 주신 것도 중요한 것이지만 세례 요한은 샘플인 것이다. 예수님 이전에 앞서서 활동하지만 먼저 죽었다. 누가는 이 사람들 다음 세대이다. 누가복음 다음이 사도행전이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연속 편이다. 시리즈이다. 그런데 세례 요한과 예수님, 예수님과 베드로가 교차하여 나타난다. 2000년 전에 기록된 것이 누가복음이고 그다음이 사도행전이다. 성령의 역사는 계속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까지 흘러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큰 계획이시다. 그런 부름이 우리에게까지 임하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 낮은 자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분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주셨는데 우리에게도 계속되는 것 같다"는 느낌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분의 아들이 SKY 대학을 가면 이런 것이 임하는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의 자녀 중 이삭만 약속의 땅을 주셨다. 에서와 야곱도 그렇다. 에서는 하나님과 상관없다. 이렇게 해서 12지파가 형성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 배척하였다. 왜 12제자를 주셨나? 12지파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완전수인 것이다. 12제자는 12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12명에 포함되는 모든 사람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가 믿는 믿음인 것이다. 우리가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말씀을 믿는 사람인 것이다.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인 것이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은 같은 피를 가져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믿음을 가져서이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얘기가 우리 얘기인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얘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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