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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장 3~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찬송가 455장 '주님의 사랑을 본받는 자'
우리들의 찬양 331장 '예수 이름 높이세'
'설레지 않음은 버려라'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곤도 마리에라는 여성이 썼다. 금요 예배에서 알았는데 이 사람은 정리의 여왕이라 한다. "정리는 곧 버리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내버리는 것이다. 독특한 것이 버리는 기준이다. 그 물건을 가슴으로 안아보고 설레면 보관하고 설레지 않으면 갖다가 버린다고 한다. 부교역자가 자기 아내를 안아보고 설레지 않으면 버리지 말라고 농담으로 말하였다. 저는 엄청 은혜가 되었다. 왜냐하면 저같이 변덕이 많은 남편에 대해 여전히 설레지 않을 것이다. 저 같은 사람을 사랑해 주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느껴져서이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이 10년 이상 똑같은 사람에게 설교를 듣고 설레지 않을 텐데 너무 고마웠다.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는 내용이 주님에게도 연결되어 주님에게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로마서 5장 8절을 보자. 10절도 보자. 백화점 갔을 때 확 띠는 물건이 있을 때 설레기 마련이다. 주님은 우리를 보고 아주 설레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도 설레지 않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서 구원하신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이 의처증 환자 같다. 의심을 하고 하나도 설레지 않는다. 지난주에도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너무 감격하게 되었다. 찬송가 135장 3절 가사도 마음에 든다. 베드로와 도마보다도 더 하면 더했지. 우리 안에 설렘도 없는 저 같은 것을 감격에 버거워 견인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주님에 대한 사도신경 고백을 보면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 고백은 4가지 고백이 담겼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도 뺄 것이 없다. 로마서 1장 4절을 보자. 예수와 그리스도의 직분을 살펴볼까 한다.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직분이다. 누가복음 1장 30절을 보자. 성부 하나님께서 의도를 가지시고 지으신 것이 '예수'이다. 구원자라는 뜻이다. 마태복음 1장 21절을 보자. 사람들이 교회를 찾고 예수님을 찾는 이유는 아주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불면증으로 찾고, 어떤 사람은 대인 관계 때문에 고독하고 외로운 마음 때문에 찾는다. 또 어떤 사람은 병이 들어서 찾고,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문제나 어려움 때문에 찾는다. 여러 갈래로 양상이 나뉜다. 오병이어를 구경하러 오기도 하였고 귀신 들린 사람을 구원하러 찾으러 오기도 하였다. 주님은 외면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알고 믿어야 한다. 위 사항 모두 구원자 예수님의 영역의 들어가지만 그 근원적 의미는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위에 나열한 내용은 별책부록이고 가장 중심은 죄 용서함인 것이다. 십자가이다. 원수에서 회복된 것이다. 기억할 것은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데 나의 유일한 고백이 되어야 한다. '나는 예수님만 믿습니다.'라고 해야지 '예수님도 믿습니다.'라고 하면 안 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보면 "왜 하나님의 아들을 '구세주'라는 뜻의 '예수'라고 부르십니까?라고 질문한다. 답은 "그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께 있으니 다른 곳에서 구원을 찾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우리가 구원자라는 뜻의 예수를 되네일 때 나는 구원자가 필요한 죄인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대조를 볼 수 있다. 사도행전 7장 54절을 보자. 사람은 자기의 약점을 드러내길 꺼린다. 사도행전 2장 37절을 보자. 그저 설교 듣고 죄지어도 상관없다는 설교만 기다리는가? 신앙의 성숙은 마음의 찔려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 죄에 대한 인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과 한국 교회는 우리가 노력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절망의 신음소리가 나와야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보이는 것이다. 만약 안 보인다면 말씀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심각하게 점검해보아야 한다. 두 번째로 직분은 '그리스도'이다. 누가복음 2장 11절을 보자.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구약의 히브리어로 '메시아'이다.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다. 구약의 기름 붓는 행위는 직분자에게 행하는 것이다. 선지자, 제사장, 왕이다. 구약의 세 직분은 각각의 역할의 구분이 명확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것의 3개를 통합적으로 이루시는 분이다. 하이델베르크 제31문을 보면 "왜 예수님을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의 '그리스도'라고 부르십니까?"라고 질문한다. 답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기름 부으심으로 우리의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과 뜻을 완전하게 계시해주는 위대한 선지자가 되셨고, 자기 몸을 화목제로 드려 우리를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늘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이 되셨으며, 우리를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시고 죄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늘 지켜 보호하시는 영원한 왕이 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을 통합하는 예수님의 직분을 설명하였다. 당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신 것이다. '그 외아들'은 우리 번역이 잘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녀독남을 외아들이라 하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다. 총신대 이상훈 교수가 쓴 것을 보면 '하나라는 숫자의 개념보다는 독특하며 특별하다'의 의미이다. 독생자라는 표현이 더 좋다. 사도신경은 성부, 성자, 성령의 신비의 일체인 한 몸을 이루는 의미가 녹아내려야 하는 것이다. '우리 주'라는 것은 헬라어로 퀴리오스이다. 그 당시 로마 황제에게 사용되던 의미였다. 마태복음 16장 15~16절을 보자.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이 대화를 하였다. 이 도시는 헤롯왕이 로마 황제에게 받은 도시이다. 빌립이 이곳을 수도로 만들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세상 권력을 상징한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심을 밝혔다. 내 인생의 돈이 주인이지 않는가? 우리는 돈이 시키면 다 한다. 권력, 명예 등 교회를 개척하고 정신 차리지 않으면 내가 주인이 될 수 있다. 오늘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주님이 물으신다. "너의 주인이 누구이냐?" 김덕종 목사님이 쓴 '사도신경 안 외어도 좋지만'을 보면 신학대학원 시절 회상이 나온다. 신학교 교수는 늘 주님을"주인님"이라고 불렀다. 주인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신학생들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그러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자. 사도바울의 주인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신앙고백이다. 내면에 사도바울과 같은 고백이 생기면 첫째로 성품이 닮고 싶어 지는 것이다. 둘째로 사역을 닮아가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시시한 사람은 없는 것이다. 모두가 소중하다. 어제 오전에 너무 은혜가 되었다. 부흥회가 되었다. 갑자기 제 어린 시절 생각이 났다. 저는 골목길 끝 집에 살았다. 그 앞에 저 보다 한 살 어린 친구가 살았는데 보통 성격이 아니었다. 한 성격이었다. 성격이 저와 마찬가지여서 많이 싸웠다. 싸우고 풀고를 반복했다. 그분의 엄마가 더 이해가 안 되었다. 싸우면 문제를 삼았다. 소리를 질렀다. "찬수 엄마여~"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 분이 막 뭐라고 항의를 하면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저희 어머니였다. 한 번도 저의 편이 돼주지 않았다. "왜 나 보고만 잘못했다고 하는가?" 저희 어머니는 5남매 중에 제가 막내였기에 저를 제일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어제 아침에 그 생각이 났다. 어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는 예수 믿는 가정이잖아. 저 집은 예수 안 믿잖아."라고 생각이 들어 울컥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예수님의 고난이 표현되어있다. 3절을 보자. 7절도 보자. 그 억울한 십자가를 지시고 조롱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어린양처럼 잠잠히 서있으며 입을 열지 않으시는 것이다. 왜 항변하지 않으셨을까? 베드로가 병사의 귀를 잘랐을 때를 기억하는가? 마태복음 26장 54절을 보자. 두려움에 떠는 양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하는 순간 우리의 구원은 없는 것이다. 왜 어머니가 대들지 않을 수 없었냐는 것이다. 이런 것 때문에 눈물이 났다. 찬송가 455장 1절을 불렀다. 하늘로부터의 평강을 원하는가? 이 찬양이 한국교회에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상처가 있는 분이 있다면 성령께서 요한복음 16장 33절을 쥐어 주셔서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네가 손해를 봤지만 네가 이기는 거야."라고 말이다. 결론을 맺는다. 이번 여름도 비장한 마음으로 몇 주간 설교를 내려놓는다. 미국 설교가 잡혀있다. 취소하고 싶다. 대안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면 진 거 같아도 이기고 손해본거 같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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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서 강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
인생 광야 4인 4색
하나님의 교회는 마귀가 공격한다. 살아있는 교회는 마귀의 공격을 받는다. 영적인 보호막을 쳐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를 통하여 영적인 보호막을 쳐야 한다. 교회가 헌신하는 중직자와 일꾼을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잘 감당하면 교회가 성장하고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한 단계 도약할 것이다. 반대로 잘못 감당한다면, 다시 말해 악인이 세워지면 교회가 망하게 된다.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한 순간도 정신을 놓지 말고 듣자. 교회를 위해 힘을 다하여 기도하자. 정신을 못 차리면 벌써 마귀가 공격한다. 악인에게는 은혜와 자비가 없다. 이단을 비롯하여 악인이 못 들오게 하려면 항상 진리를 놓지 말아야 한다. 경계의 횃불을 들고 있어야 한다. 저는 이 강단의 말씀이 진리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틈도 주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리가 교회 안에 숨는다고 한다면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 드러나게 해야 한다. 양이 아닌 자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악인들이 회개하고 양이 되게 하시던지 그들이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망하지 않는 길에 들어가지 않는다. 오늘 본문이 조금 무겁다. 사무엘상 22장을 보면 다윗이 걸어가는 광야 학교에서 만나는 몇몇이 나온다. 인생 광야에서 만나는 4인 4색이다. 다윗과 사울, 도엑과 아히멜렉이 있다. 4명 모두 색깔이 사뭇 다르다. 첫 번째는 사울이다. 지난 시간 전반부를 묵상하였다. 다윗을 동굴에 머물게 하시며 새 역사에 새 인물을 뽑아 기초 작업을 하셨다. 그런데 이제는 사울을 쇠퇴하게 하시고 다윗을 세우신다. 다윗이 유대 땅 안으로 들어가라 하신다. 다윗이 나타나자마자 사울이 군대를 출동시켜 쫓는다. 에셀나무 아래서 국정을 논하는데 사울이 단창을 들고 1장 연설을 한다. 사무엘상 22장 7~8절을 보자. 의심과 비방을 퍼붓는다. 신하들에게 강조하기를 "나를 선택하거나 다윗을 선택하라."라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강요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울은 왕이다. 다윗은 신하이다. 백성들에게 굳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미움과 증오가 넘치는 것이다. 사울이 다윗을 비난하는 것을 듣고 사적인 감정임을 알아차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엑이라는 사람이 다윗과 아히멜렉의 말을 들었다며 고발한다. 사울은 도엑의 말에 집중한다. 여기에 매인다. 사울은 아히멜렉에게 "네가 왜 다윗과 공모하여 나에게 대적하느냐?"라고 물었다. 아히멜렉은 "잘 모르겠다."라고 얘기한다. 사울은 믿지 못한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영이 떠났기 때문에 분별하지 못하였다. 예배에 능력을 믿지 않고 기도를 의지하지 않으면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지는 것이다. 사울은 시기만이 가득하다. 17절을 보자. 제사장들이 보고하지 않는다고 모두 죽이라고 명한다. 왕이 잘못된 명령을 하자 호위병이 불복종한다. 도엑에게 제사장들을 다 죽이라고 명한다. 도엑은 병사들과 함께 쳐서 제사장들을 진멸해 버렸다. 완악한 왕인 것이다. 사울이 이렇게 된 것은 불일 듯 일어나는 시기와 질투 때문이다. 다스리지 못함으로 인한 것이다. 지난 6월에도 사울에 대해 말했었다. 우리 안에 시기가 있으면 그 안에 들어있는 내면이 파괴된다고 말하였다. 잃고 있는 4가지를 말했었다. 사울이 시기심을 가져서 하나님이 떠나가셨다. 더 나아가서 기름 부 음 받은 제사장들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 85명을 진멸한 것은 반역한 것이다. 그가 이러한 가운데 이스라엘 지파의 많은 민심이 사울을 떠나갔다. 사울은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어라"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다른 지파는 다 떠나갔기 때문이다. 그들밖에 없었다. 사울과 같은 시기심이 여기에도 있다면 우리 공동체도 다 떠나갈 것이다. 시기심은 우리 곁에 동역자들을 떠나가게 한다. 세 번째로 잃고 있는 것은 제사장 85명을 죽인 것이다. 제사장은 왕을 위해 기도하고 다스리게 돕는 역할이다. 엄청난 손실이다. 중보자가 없는데 난관을 다스리며 해쳐나가겠는가? 파멸에 이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울의 시기심은 제사장에 대한 존중도 사라지게 한 것이다. 사울과 아히멜렉과의 대화를 보자. 12절을 보자. "너 아히멜렉아."라고 부른다. 존중함이 없는 것이다. 사울은 기름 부은 자를 없신 여기는 것이다. 다윗을 부를 때도 존중함이 없었던 것을 찾을 수 있다. 시기심은 존중을 박멸시킨다. 시기심은 공동체와 교회에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장로님과 권사님, 집사님과 형제자매님도 계시지만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너무 잘 알아도 존중하는 마음으로 불러야 하는 것이다. 그분의 이름과 직분을 불러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정죄의 마음이 우리에게 사라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성도님, 형제자매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교회 안에 악한 마음이 떠나가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시기심이 있다면 빼내자. 어리석음을 범치 말자. 두 번째로 살펴볼 분은 도엑이다. 22장에만 나오는 분이다. 22장 7절을 보자. 사울의 신하이며 도엑이다. 에돔 사람이며 사울의 목자장이다. 다윗이 학살사건 이후 22절에서 아비 하달이라는 아히멜렉의 아들이 찾아와 "내가 도엑을 보았다. 사울에게 고할 줄 알았다."라고 하였다. 알았으면 말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화근이 될 줄 모른 것이다. 사울의 목자장은 우두머리이다. 강한 세력이 있는 것이다. 사울 왕이 죽이라고 명 하였을 때 호위병들이 거부하였다. 도엑은 사울을 따라다니는 자인 것이다. 385명을 죽인 것이다. 병사들을 지휘하는 사람이다. 비밀경찰 대장정도 되는 자이다. 에돔 사람 도엑은 사울 편에 선 것이다. 출세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을 가진 자인 것이다.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쓰는 사람인 것이다. 과잉충성을 하는 신앙이 없는 자인 것이다. 반면 제사장은 친구와도 같은 사람이다. 도엑은 정치적인 사람인 것이다. 악한 자인 것이다. 칼부림을 해 버린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최고로 악한 사람인 것이다. 다윗과 아히멜렉의 약점을 이용하여 엄청난 비난거리로 만든 자이다. 정치적으로 악용한 것이다. 마귀가 하는 일과 흡사하다. 기회주의적이다. 마귀는 감춰주지 않는다. 엄청난 비난 거리를 만들며 파장을 만든다. 도엑은 불신자이다. 도엑은 여호와 앞에 머물러 종교생활을 하였다. 단지 장소에 있기만 한 자이다. 교회 안에도 도엑과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교회는 구원받은 자가 모여야 하지만 세상 속이기 때문에 의인들만 있지는 않다. 가라지와 가짜 신자도 있으며 자기 정체를 숨긴 신천지가 들어와 있을 수도 있다. 도엑이 있을 수 있다. 작년에 소천하신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도엑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성소나 성막을 교회로 바꾸어서 읽어드리겠다. "도엑과 같은 사람에게 교회는 일상생활의 성화를 추구하는 장소가 아니라 일상생활을 치장하는 '거룩한 장식품'으로서 자기 의를 얻는 장소이다. 도엑 같은 이들에게 교회는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는 장소가 아니라 자신을 위장할 가리개를 얻는 장소이다. 도엑이 다윗과 같은 모습으로 거룩한 장소에 들어가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도엑은 그저 적당한 교인이었다. 그에게 종교와 그 관련된 일은 그저 '정치적 이득'이나 '직업상의 목적'을 위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도엑이 교회에 앉아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도엑과 같은 사람에게 교회란 '거룩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 불과하다." 정말 충격적인 설명이다. 자기의 의를 얻으려는 모습이 이곳에는 없길 바란다. 긍휼과 자비를 구하며 구할 때 하나님이 어루만져 주시며 은혜가 임하는 송원교회가 되길 바란다. 정치적인 이득이 얻어지는 곳이 아니다. 사용해서도 안된다. 그런 분이 있다면 거룩함이 아무것도 없는 장소로 여기는 것이다. 임직자 후보와 내용을 보며 중직자 가운데 도엑과 같은 자가 득세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도엑이 되지 않아야 한다. 납작 엎드려야 한다. 세 번째 사람은 아히멜렉 제사장이다. 다윗을 잘 도왔다. 하나님께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다윗을 돕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가축들을 도엑이 도축해버렸다. 전대미문의 학살이었다. 아비 하달이 보고할 때 다윗은 "내 탓이다."라고 하였다. 사무엘상 22장 22~23절을 보자. 그에 대한 약속도 하였다.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윗은 헤브론의 왕이 되었다. 33년 동안 다스리고 40년째에 아비 하달 집안을 만져주기 위해 아비 하달을 제사장으로 잘 섬겼다. 이 문제의 원인은 엘리 제사장 때의 형벌이 지금 심판이 일어난 것이다. 사무엘상 2장 12절을 보자. 그 아들들이 아무 예절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 구별 없이 자기들이 좋은 고기를 취하였다. 기름이 준비되기도 전에 다 빼갔다. 여인들을 겁탈하는 악행도 행했다. 엘리 제사장은 기도만 하고 말았다. 징계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 제사장에게 징계를 선언한다. 사무엘상 2장 22~31절을 보자.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하게 여겼다."라고 얘기하셨다. 30절을 보자.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길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것에 대한 심판인 것이다. 아비 하달까지 5대가 70년 동안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잘 섬겼지만 형별을 이제야 내린 것이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사울, 도엑이 자행한 사건이지만 형벌도 외면하지 않으신 것이다. 이 일에 악인들을 사용하여 정리를 하신 것이다. 아히멜렉 집안의 몰살사건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것을 통해 죄의 역사성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죄를 싫어하시기에 형벌을 내리시기로 작정하신 것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하나님이 죄를 다루시는 죄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머지 제사장과 가축들도 남기지 않으신 것이다. 죄의 연대책임을 주시는 것이다. 가족 안에 죄가 연이어 이어질까 봐 죄의 심판이 이어진 것이다. 마음이 힘들었다. 하필 아히멜렉이.. 귀하게 쓰임 받을 인물이지만 선대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범죄함이 있을 때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후대에 선한 것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범죄함이 있다면 회개하자. 심판받을 일이 있으면 용서함을 구하자. 후대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자. 마지막으로 한 사람은 다윗이다. 다윗이 학살사건을 알게 된 뒤에 사울의 성막을 지키는 당번 아비 하달이 다윗에게로 도망하였다. 다윗에게 전부 얘기하였다. 다윗이 "나 때문이었다."라고 얘기하며 격한 감정을 하나님 앞에 기도로 승화한다. 시편 52편을 보자. 도엑을 향한 격한 감정으로 기도한다. 결단하는 기도이다. 도엑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나머지 세 사람의 마음도 다 담고 있다. 하나님에게 심판하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시편 52편 5절을 보자. 심판해주시길 바라는 것이다. 악인이 망하지 않으면 속상하지만 악인들은 짧은 시간 성공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그러나 뽑힐 것이다. 왜 한 번에 날려 보내시지 않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서서히 고사시키시며 뽑아 내시며 의인들에게 알려주시는 것이다. 결국 다 뽑히는 것이다. 반면 의인들은 어떻게 되는가? 시편 52편 8절을 보자. 다윗의 고백이다. 학살사건이 일어나고 도엑의 모습을 보면서도 평정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푸른 감람나무이다. 나와 영원히 함께 해주십시오. 한 번 뿌리내리면 끝까지 뿌리내리는 나무인 것이다. 의인의 뿌리는 하나님이 뽑지 않으시는 것이다. 말씀이 교회에 주어질 때 진액이 쥐어져 풍성한 은혜와 열매가 있는 것이다. 다윗에게 협력하는 두 사람을 주셨다. 한 사람 아비 하달을 살리신 것이다. 아비 하달을 동역자로 주시는 섭리이다. 사무엘상 22장 5절을 보면 선지자 갓을 통해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동역자의 복이 있기를 바란다. 사울은 제사장을 죽이는 말살자였지만 다윗은 하나님에게 합한 자가 된 것이다. 4인 4색 중에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가? 세 번째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윗이 되길 바란다. 은혜를 경험하기를 바란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 도엑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의 후손이 멸망당할 일이 범죄함이 나타나지 않고 정결함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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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게벳의 노래
작은 갈대 상자 물이 세지 않도록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네
어떤 맘이었을까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흐르고 흘러
동그란 눈으로 엄말 보고 있는
아이와 입을 맞추고
상자를 덮고 강가에 띄우며
간절히 기도했겠지
정처 없이 강물에 흔들흔들
흘러 내려가는 그 상자를 보며
눈을 감아도 보이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겠지
너의 삶의 참 주인 너의 참 부모이신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맡긴다
너의 삶의 참 주인 너를 이끄시는 주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드린다
그가 널 구원하시리 그가 널 이끄시리라
그가 널 사용하시리 그가 너를 인도하시리
너의 삶의 참 주인 나의 삶의 참 주인
나의 참 부모이신 하나님 그 손에
나의 삶을 맡긴다 나의 삶의 참 주인
나를 이끄시는 주 하나님 그 손에 나의 삶을 드린다
나의 삶의 참 주인 나의 참 부모이신 하나님 그 손에 나의 삶을 맡긴다
나의 삶의 참 주인 나를 이끄시는 주 하나님 그 손에 나의 삶을 드린다
하나님 그 손에 나의 삶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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