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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1 중앙성결교회 주일 4부예배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한기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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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과 악인의 대조

잠언 10장 1~8절

 

1    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2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3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5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
6    의인의 머리에는 복이 임하나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7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게 되느니라
8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계명을 받거니와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리라
9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

10    눈짓하는 자는 근심을 끼치고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느니라 

 

9장도 솔로몬의 잠언이다. 10장부터는 조금 달라진다. 9장까지는 이야기 형식으로 전개된다. 그러면서 훈계를 주시고 설득하고 가르친다. 그런데 10장부터는 경구처럼 한 구절씩 얘기한다. 한 절씩 별개의 내용이다. 앞에서는 1인칭 2인칭으로 대화하는 것처럼 되어있으며 10장부터는 객관적으로 되어있다. 반의 적 평행 법이다. 앞에 내용과 뒤에 내용이 대조를 이룬다. 10장 1절부터 22장 16절까지 모여있는 것이다. 농축된 말씀이 한 구절씩 나오고 있어 설교하기가 힘든 구절이다. 한 구절 정해서 얘기를 풀어야 한다. 379개나 된다. 이것을 375번이나 설교해야 한다. 따라서 조금 산만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잘라서 설명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강조하고 넘어가겠다. 집에서는 한 구절씩 묵상하거나 암송하면 참 좋다고 할 수 있다. 잠언은 지혜를 가르치며 잘 사는 기술을 가르쳐준다. 10장의 내용은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1절을 보자. 지혜와 미련한 아들이다. 기쁨과 근심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대조적이다. 그런데 왜 지혜로운 아들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가? 왜 미련한 아들은 어머니를 근심하게 하는가? 이것이 궁금하다. 실제 삶을 보면 정말 맞다. 지혜로운 자식은 부모의 기쁨이고 어리석은 자식은 부모의 근심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부모님에게 기쁨인가? 아니면 근심거리인가?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지혜로운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에게 기쁨을 주어야 한다. 8절도 마찬가지다. 마음과 입, 지혜와 미련, 계명과 멸망이 대조이다. 멸망의 반대는 흥왕 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받는 사람이 흥왕 하는 것이다. 입이 어떻게 미련할까? 자꾸 남을 험담하거나 잡답하거나 막말하는 것이다. 입으로 멸망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1절과 8절은 지혜와 미련한 것을 얘기한다. 2절을 보자. 불의와 공의, 무익과 구원이 대조적이다. 불의의 재물이 무엇인가? 부당한 방법으로 거둔 재물이다. 남을 속이는 것이나 고통을 주어 얻은 것이다. 불의의 재물을 들이면 안 좋은 것들이 같이 들어오니 무익하다는 것이다. 재물이 얼마나 유용한가? 그러나 불의의 재물은 무익한 것이다. 아무 효과가 없음이다. 그러나 공의는 유익하다. 공의의 재물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은 유익한 것이다. 진짜 중요한 것은 죽음에서 건져주는 것이다. 제일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다. 공의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구원하듯이 유익한 것이다. 불의의 재물은 죽음 앞에서도 무익한 것이다. 공의는 죽음에서 우리를 건지는 것이다. 잠언을 보면 앞으로도 인과응보의 교훈이 많이 나온다. 잘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자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오는 것이다. 재물이 크고 작고보다는 재물의 성격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3절, 6절, 7절을 보자. 의인과 악인에 대해 나온다. 의인은 주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악인의 소욕이 있다면 의인의 소원이 있는 것이다. 의인의 소원을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이며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34편 9~10절을 보자. 의인들은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시편 37편 25~26절을 보자. 의인은 물질적으로도 부족함이 없도록 복을 주시는 것이다. 악인은 욕심을 부려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악인들은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무기가 입이다. 입에 독을 물었다.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주로 언어폭력이다. 상처를 주고 기분 상하게 함이다. 의기소침하게 만들며 명예를 훼손하게 한다. 의인에게는 머리에 복을 주는 것이다. 지난주 이스라엘 대통령을 만났다. 성경말씀을 인용할 때는 모자를 꺼내놓고 얘기하더라. 제스처를 보면 알겠더라. 의인들은 머리에 복을 주시는 것이다. 7절을 보자. 의인은 기념이 된다. 기억이 되는 것이다. 그분을 두고두고 칭찬한다. 의인들은 그 이름이 살아있으며 남아있다. 악인은 몸도 썩고 이름도 썩는 것이다. 안 좋게 말을 하는 것이다. 칭찬이 아니라 안 좋은 말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 계속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의인은 죽은 다음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악인은 잊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4절과 5절을 보자. 노동인데 손으로 비유하셨다. 성경이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기독교가 특별하고 차별된다. 노동에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유교는 일을 안 하고 먹고사는 것을 복으로 여긴다. 불경은 일을 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하나님이 일을 주셨다. 그 일을 주님께 하듯이 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주신 청지기로서 소명을 가지고 사명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개신교의 노동 사상이 긍정적이며 복음적이다. 우리나라도 기독교 130년 만에 이렇게 달라진 것이다. 노동에 대한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편이며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근면함을 권장한다. 안식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일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켜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번갈아가면서 살아가는 것을 권장한다. 일 열심히 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는 것이다. 손이 부지런하게 되면 부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열심히 하였음에도 어렵게 사는 분이 계신다. 잠언은 교육의 목적이 있다. 교훈을 이분법적으로 가르쳐준다.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5절을 보자. 여름에 거두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여름에 거두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지혜로운 아들인 것이다. 반대로 추수해야 하는데 자는 자는 부끄러운 것이다. 이런 자식은 부모에게 근심이며 부끄러운 자녀인 것이다. 상황 파악이 안 되어 게으른 것이다. 마땅히 일해야 하는데 노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해진다. 지혜로운 아들과 부끄러움을 주는 아들이 대조된다. 한 구절씩 떼어 봐도 이해가 가능하다. 오늘 종합해보면 의로운 자는 부모의 기쁨이며 죽음에서 건져지고 음식을 얻고 재물을 얻고 수확을 얻고 생명을 얻는 것이다. 악한자는 부모의 근심이고 재물도 소용이 없고 게으르고 부끄러움을 얻고 멸망당하는 것이다. 이 말씀들이 조합되는 것이다. 이 잠언도 기억하여 나가자. 지향하는 방향이 있음이다. 어떻게 사고하고 말해야 하는지 생활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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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중앙성결교회 주일예배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한기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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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함의 초대

잠언 9장 13~18절

 

잠언 9장 앞에는 지혜의 초대가 있었다. 지혜를 여성으로 비유하였다. 지혜를 초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여인의 초대가 있는 것이다. 양쪽에서 초대를 받는 것이다. 지혜 있는 여자와 미련한 여자가 초대하는 것이다. 우리도 단박에 지혜를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세상에서 보면 구별이 잘 안된다. 오히려 가짜가 요란하다. 미련한 것이 더 화려하다. 겉으로 멋있어 보인다. 잘못하다간 지혜의 여인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이다. 미련한 여인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이다. 어느 집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지혜의 여인이 초대하는 곳에 들어가면 생명의 축제가 열리는 것이다. 생명과 복을 받게 된다. 어리석은 사람도 지혜롭게 된다. 어리석은 여인의 집에 들어가면 죽음과 저주가 기다린다. 지옥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어리석었던 사람이 더 어리석어진다. 정신 바짝 차리고 분별하지 않으면 잘못되는 것이다. 그러면 미련한 여인의 초대는 어떠한가? 그곳은 떠들며 어리석은 것이다. 훈련이 안 되는 것이다. 예의도 없고 규칙도 없고 방탕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무지하기까지 하다. 지식이 없는 것이다. 소리도 요란하다. 보이는 것은 멋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천박하다.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다. 마치 지혜로운 여인처럼 유혹한다. 창녀 하고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잠언 7장 11~13절을 보자.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부끄러움을 알도록 얘기해야 한다. 안 그러면 뻔뻔해지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은 스스로 부끄러워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창기들을 부끄러움이 없는 여자들로 보는 것이다. 말과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 제가 여인 얘기를 읽어보면서 생각났는데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교육전도사를 하였다. 그곳에서 영등포까지 전철을 타고 갔다. 그러면 도착역에서 저를 붙드는 여자들이 있었다. 갑자기 가방을 낚아채서 오라고 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들어와서 가지고 가라고 하였다. 참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한 둘이 아니었다. 요즘은 그곳도 롯데백화점이 있다. 앞에서는 지혜의 여인도 사람을 보내 정중하게 초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목적지로 가는 사람들을 딴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제 아내 친구들이 모였다. 동기 남편이 부총장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가 결혼할 때 주례 목사님이 정보를 잘 못 받았는지 갑자기 축가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즉석에서 곡을 불렀다. 그 메시지가 '딴 길로 가지 맙시다'였다. 딴 길로 가기를 요구하는 여자에게 가면 외도하게 되는 것이다. 바른 길로 가려면 유혹하는 것이다. 지혜를 흉내 낸다. 사탄은 빛의 사자로 가장한다. 그럴듯하게 우아하게 꾸민다. 일곱 기둥과 생명 양식도 없다. 바르게 사는 남자를 유혹한다. 그래서 마치 물고기에다 낚시 미끼를 꽂아 던지는 것이다. 로마서 1장 32절을 보자. 자기들도 그런 죄를 지으면서 다른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다. 다 같이 죽자는 것이다. 죄인들끼리 격려하는 꼴이다. 죄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동성애도 부끄러운 일인데 그렇게 한다. 어리석은 자는 돌이켜야 하는 것이다. 지혜의 여인은 짐승을 잡고 포도주를 혼합해서 잔을 갖춘다. 어리석은 자는 도적질 한 무리인 것이다. 몰래 먹는 떡이 맛있는 것이다. 세상이 이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지혜는 내 식물을 먹고 내 포도주를 마시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난번에 얘기한 것인데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다. 원죄 때문이다. 죄를 향한 부패성이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훔친 것이 맛있는 것이다. 훔치는 순간에 화학물질 때문에 쾌감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족함이 없어도 백화점에 가서 훔치는 것이다. 도벽이다. 변태 성욕자들도 비정상 관계로 스릴과 쾌감을 느낀다. 이것이 죄성이다. 유혹이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한다. 아까 전에도 교회 밖에서 시끄럽게 할 때 놔두라고 하였다. 애들도 하지 말라고 하면 더한다. 불륜, 도적질에 중독되고 빠진다. 비밀스럽게 몰래 먹는 떡이다. 왜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만들었는가? 생명나무를 먹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죄로 바꾸는 습성이 있다. 태국에 다녀왔는데 이런 얘길 하더라. 남성, 여성과 삼성이 있단다. 삼성은 남자인데 하고 다니는 것은 여자였다. 주위에 많이 보였다. 카페에서 마실 것을 주는 분도 여자인데 가까이 보니 남자였다. 그리고 성전환 수술을 잘하는 곳이 태국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비용이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도 남자가 여자로 성전환 한 사람이 있다. 자기 성 정체성이 불분명한 것이다. 이것이 세상이다. 지난 주도 SBS 앵커가 망신당한 사건도 있었다. 몰래 한 것과 드러난 인격이 틀린 것이다. 요셉을 유혹하던 보디발의 아내도 마찬가지다. 유혹이 파멸로 이끄는 것이다. 훔친 것 먹어서 탈이 안 날 수 있을까? 지혜의 초대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지는 것이다. 결국 스올로 넘어가는 것이다. 지옥이다. 그래서 지혜가 사람에게 공평으로 인도하는 것과 달리 어리석은 것은 탐욕으로 인도한다. 미련함을 삼키는 순간 죽음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과 바알의 초대이다. 바알은 음란한 것이다. 우리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저쪽으로 넘어갔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바른 길로 갈 수 있는가? 지혜와 항상 같이 가야 한다. 지혜와 떨어지면 어리석은 길로 가는 것이다. 10장으로 가도 지혜와 어떻게 동행하는지 가르쳐주는 것이다. 지혜를 저버리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떨어져 있는 것이다. 가정, 남편, 아내도 마찬가지다. 지혜의 초대에 응하길 바란다. 어리석은 자의 초대는 도망가자. 저도 가방 버리고 그냥 가려고 하자 다시 돌려주었다. 우리의 길을 바로 가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까지 뺏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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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0 중앙성결교회 주일 3부예배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한기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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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행 일치

야고보서 1장 12~18절

 

야고보서의 전체 주제를 표현하는 말씀은 야고보서 1장 22절로 말할 수 있다. 듣는 말씀과 행함이 일치되어야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로마서 바울 말씀을 보면 신행일치를 주장하였다. 믿는 것과 사는 것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행 일치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청행 일치는 언행일치보다 힘들다. 내가 말한 대로 사는 것은 가능하지만 특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오늘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18절을 보자. 사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었던 지혜의 말씀이다. 대화에서는 듣는 것이 중요하다. 경청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제대로 들을 수 있는가? 마음을 다해서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청이라는 책을 보면 귀를 기울여 들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은 하나를 주고 귀를 두 개 주셨다. 우리는 대게 남이 말할 때 내가 말할 것을 생각하며 말하는 도중에도 끼어든다. 제대로 듣지 않아서 대화가 어렵다. 사랑의 첫 번째 의무가 듣는 것이다. 부부간에도 들어줘야 하는 것이다. 들어주지 않으니 답답해서 속병이 생긴다. 돈 주면서 들어달라고 상담한다. 그 남편이 들어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들어주지 않아 고함을 치며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헨리 나우웬은 "예수님은 온 몸이 귀였다"라고 얘기한다.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듣는 자가 복된 것이다. 사무엘도 사울한테 와서 경청하는 것이 낫다고 얘기하였다. 제대로 듣지 못하고 말하면 시험 들거나 유혹에 빠진다. 또한 알아듣지 못해 화를 내면 이것도 시험 들거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성내기를 더디 해야 한다. 잠언 29장 20절을 보자. 말이 조급한 자는 희망이 없는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말이 급하다. 행동보다 말을 많이 한다. 극단적인 말도 쏟아낸다. 분노조절장애가 문제이다. 들어보고 생각 좀 해봐야 한다. 화가 나면 하루정도 지나서 말해야 한다. 이것을 참지 못해 고초를 겪는다. 19절의 말씀은 18절과 연관된다. 진리의 말씀이 나온다. 진리의 말씀을 잘 알아들으라는 것이다.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말고 새겨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 진리의 말씀을 잘 들으면 믿음이 생긴다. 로마서 10장 17절을 보자. 그 진리의 말씀을 알아들을 때 믿음이 생긴다. 그것은 고백이며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기고 행위로 나타난다. 그래서 야고보는 근본적으로 얘기하고 있다. 바울은 믿음에서 행위를 말하였지만 야고보는 들음에서 난다고 하였다. 진리의 말씀을 들었는데 믿음이 행함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것은 위선이다라고 하였다. 성령이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 단순히 오늘 듣는 말씀이 즐겁게 해 주기 위함이 아닌 것이다. 모름을 알게 해 주기 위함이 아니다. 어떤 세상의 정보만을 주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이 말씀이 나에게 적용되어 행위로 나타나지 않으면 마치 음식을 먹고 소화되어 건강과 활동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과 동일한 것이다.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는 결과를 일으킨다. 성을 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하나님의 의는 절대적이다. 말씀을 적용해야 의를 이룰 수 있다. 신앙생활을 생각해 보자. 성경의 말씀을 들을 때 적용하는가? 아니면 판단부터 하는가? 만약 판단부터 한다면 토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에 있어 갑자기 "내가 물을 내랴?"라고 하였다. 판단부터 한 것이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상관없이 행동한 것이다. 모세와 아론조차도 가나안을 밟지 못했다. 야고보서 1장 21절을 보자. 더러움이 있을 곳이 없어 나가는 것이다.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은유적 표현이 많이 나온다. 이것은 씨부리는 비유와 연결된다. 옥토에 씨가 뿌려지니 30, 60, 100배의 풍작이 있는 것이다. 줄기와 열매가 나오는 것이다. 온유한 마음이 순전한 마음이며 옥토이다. 그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구하며 생명을 준다. 1장 22절을 보자. 자기를 속이는 것이 기만이며 위선이다. 우리들처럼 좋은 말씀을 듣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매주일마다 듣는다. 좋은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착각하면 안된다. 설교하는 목사만큼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도취하는 것이고 기만하는 것이다. 들은 것을 내 삶에서 행동으로 옮길 때 그것이 진정한 믿음의 삶이다. 듣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전에 생각을 했다면, 말을 했다면, 잘 들었다면 잘 실천할 것만 남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의 적용 결과를 말하였다. 마태복음 7장 24~27절을 보자.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짓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모래위에 짓는 것이다. 비가 오고 태풍이 불면 이것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든든한 것이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얘기하였는데 어떻게 적용하여야 할까? 듣고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듣는 것은 같지만 행함에서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이다. 듣는 우리에게도 이렇게 갈린다. 듣고 잃어버리는 자보다 듣고 실천하는 자가 복을 받는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다. 행복하면 대개 아래에 있는 행복을 말하지만 위에 있는 복을 얘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우리가 하는 일에 복을 주신다. 사업과 가정, 직장에 복을 주신다. 행한 대로 복을 주신다. 행복하시길 기대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복을 받는다. 그래서 이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복 받길 바라는가? 청행하는 사람에게 행복을 주시는 것이다. 왜 거울을 보는가? 이 시절에는 굉장히 귀한 것이었다. 자기 모습을 비추어보았다고 한다. 거울을 보고도 문제점이 있음에도 그냥 가면 안된다. 그것을 교정해야 말씀이 사는 것이다. 보고 잃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보고 고치고 행동하는 사람이어야 보람 있고 가치 있는 것이다. 나의 삶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설교가 넘쳐나고 종교의식과 행사하는 기관도 많지만 세상과 내 삶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1장 26~27절을 보자. 스스로 재갈 물지 않고 자기 의를 내보이면 헛것인 것이다. 보통 경건 생활이라 하면 새벽기도와 성경 읽기, 성경 묵상인 줄 알았지만 야고보는 다르다. 일단 첫 번째로 말이다. 말을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인데 어려운 삶이 있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다. 실력, 권력, 재물을 가진 사람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 최후의 심판을 얘기하셨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 어떻게 행동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와 풍조대로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대로 나아가면 그것은 경건한 생활이 아니다.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참된 경건을 얘기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성취해야 할 경건이다. 이런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이다. 남에게 요구할 사항은 아니다. 그래서 듣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들은 것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청행 일치를 통해 모든 일에 복을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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