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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31 금요기도회

Q.T/분당우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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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대로 함이라

여호수아 8장 33~35절

 

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34.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35.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콜럼비아 연구자 쉬나 아이 엔나가 말하였는데 보통 사람은 매일 70번의 의식적인 선택을 한다고 한다. 이것이 1년이면 2만 5천50번이며 70년으로 치면 178만 8천500번이라고 한다. 테드 강연으로 들었다. 미국에 존 오트버그 목사는 이것을 다 합치면 우리 자신이 된다고 하였다. 보통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승리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계속적으로 웅덩이로 나아가는 사람도 있다. 왜 그럴까?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때는 어떤 결과가 따라오는 것이다. 그 배후에 영향을 미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우리도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성령님이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저도 사역을 해야 할지 유학을 더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우리 성도님들도 교회에 오기까지 여러 선택을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오늘 각자에게 메시지가 있기를 바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선택하게 하시는 무언가가 있음을 인지하자. 본문을 보면 여호수아의 선택이다. 여리고성을 정복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의 자신감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아이성 앞에서 패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만에 정복하였다. 자신에게 실패를 줬던 그곳을 정복한 것이다. 얼마나 전쟁을 이겨서 기뻤는지 큰 돌무더기도 쌓았다. 그것은 어디서든지 이스라엘이 아이성을 점령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여호수아가 선포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해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전쟁의 기념비는 단지 자기의 업적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위해 제단을 쌓으라는 것이다. 이 전쟁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어떻게 이런 축제 분위기에서 명령을 할 수 있는가? 그가 모세에 명령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모세의 명령은 신명기 27장 4~8절에 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모세는 그곳에 못 들어가면서 말하는 것이다. 당시 모세가 뜬 구름 잡았던 소리를 기억하는 것이다. 말씀을 기억하는 자는 전쟁 분위기에 도취되지 않는 것이다. 그의 포커스는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 것이다. 감사의 예배와 번제,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전쟁 같은 삶에서 반응하길 바란다. 말씀을 기억하며 사는 것은 정말 어렵다. 저도 인도네시아 오지에 다녀왔다. 그곳은 전기와 수도가 없다. 상황이 정말 열악하였다. 집 밑이 화장실이며 강이었다. 화장실 옆이 샤워실이었다. 샤워실 옆 물이 먹는 물이었다. 선교지로 가기 전에 인도네시아를 지원한 학생들과 말씀 훈련을 한 기억이 있다. 우리 스스로 특공대를 외칠 정도였다. 대단히 많이 훈련받은 아이들이었다. 그곳은 이슬람에 색채가 짙었다. 어둠 속에서 형제들도 망을 보며 지쳐갔다. 그런 상황의 연속이었다. 어떻게든지 회복하기 위해서 예배를 드렸다. 그 이슬람 오지에서 1시간을 예배드리는 것이다. 찬양하나 가지고 임재를 경험하였다. 아이러니하게 아이들이 계속 지쳐갔다. 그래서 하루를 마무리하며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 나누었다. 그런데 말씀 묵상한 것이 기억나지 않는 것이었다. 밤이 되어서 다 잊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훈련이 바뀌었다. 아침부터 밤이 될 때까지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는데 쏟는 것이다.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다. 그러자 놀라운 고백이 쏟아졌다. 어떤 아이는 은혜를 간증하기 시작하였다. 기억하는 노력을 하니 말씀에 영향력을 느꼈다. 저와 같이 훈련하는 제자 훈련생들한테도 강조한다. 하루 종일 귀납법을 하면서 이 본문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자각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어떤 것을 읽었는가? 말씀에 영향이 있었는가? 담임 목사님에게 설교 듣고 기억하였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 곳에서 하나님이 하신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저 감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여야 하는 것이다. 한 귀로 듣고 그냥 흘리지 말자. 이 말씀을 기억하려고 애쓰면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24장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있었다. 여자들이 무덤을 찾아갔는데 무덤이 열려있었다. 예수님은 안 계셨다. 3~4절을 보자. 여자들이 근심하는 것이다. 천사들이 나타난다. 6절을 보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자 여자들이 기억하기 시작하여 모든 이에게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여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몸을 만져보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기억한 것이다. 이것이 능력인 것이다. 경험보다 체험보다 중요한 것이 묵상인 것이다. 이것이 만나는 통로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에발산에 제단을 쌓는다. 여섯 지파씩 양쪽으로 나눠서 산에 세우는 것이다. 언약궤를 중심으로 서 있는 것이다. 전부 200만 명이다. 양쪽에 100만 명씩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널 때 20km였을 것이다. 폭이 갈라져야 200만 명이 건너는 것이다. 그리심산과 에발산에 서있다. 장관이다. 모세가 했던 명령들을 선포한다. 신명기 28장 1절이다. 상상이 되는가? 100만 명에게 각각 선포하는 것이다. 불순종에 대한 선포도 한다. 28장 20~21절을 보자. 여호수아 한 사람은 그 축제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한다. 열 두 지파에게 명령하여 200만 명이 말씀을 듣고 순종을 기약하는 것이다. 아멘! 이 광경이 너무나 황홀하다. 하나님 앞에서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여호수아 8장 35절을 보자. 모든 하나님의 약속을 아이와 이방인 까지도 화답하는 것이다. 이 상황은 사실 전쟁 중인데 불가사의한 일인 것이다. 그곳은 가나안 최전선인 것이다. 전쟁보다 중요한 것이 말씀에 순종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실제로 여호수아 1장부터 8장을 보면 독특하다. 여호와의 언약에 대해 순종하는 것의 연속이다. 기억함의 연속이다. 아이성 첫 번째 전투에서 패하고 돌이켜서 회개하여 두 번째는 승리한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순종을 통해 결의해야 한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하는 한 사람을 통해 한국교회가 하나 되게 하옵소서. 여호수아 말에 200만 명이 하나가 되었듯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 당신도 승리하길 원하시는가? 이 나라가 하나 되길 원하는가? 한국 교회가 하나 되길 원하시는가? 그렇다면 말씀에 순종하길 바란다. 사실 이 말씀은 도전이 된다. 모두 다 아는 얘기인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에게 질문하셨다. "정말 여호수아의 이 순종이 능력이 됨을 믿느냐?"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말씀에 순종하자. C.S.Lewis는 "순종은 모든 문을 여는 열쇠다"라고 하였다. 출애굽기 20장 6절을 보자.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 25절을 보자. 반석 위에 지은 집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다. 똑똑함과 능력이 문제가 아니다. 순종과 불순종의 문제이다.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결단이 열쇠인 것이다. 이것을 구해야 한다. 우리는 이 밤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순종을 선택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 삶이 한국 교회를 하나가 되게 하는 은혜의 통로가 됨을 알자. 말씀을 기억하고 순종하며 그 은혜로 회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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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3 중앙성결교회 주일 3부예배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한기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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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과 유혹

야고보서 1장 12~18절

 

지난 주에도 시험에 대한 주제로 얘기하였다. 오늘도 같은 주제인데 내용은 다르다. 시험이라는 말은 중위적이다.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하나는 테스트이다. 둘은 유혹으로 해석될 수 있다. 지난주는 테스트에 해당된다. 이 시험은 일시적이기에 참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은 유혹에 대해 설명한다. 유혹일 경우에는 참으면 안 된다. 즉시 도망가야 한다. 유혹은 일시적이지 않고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같은 시험이라도 유혹과 미혹이 있다. 지난주는 긍정의 의미라면 이번 주는 부정의 의미이다. 야고보는 같은 단어를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다. 그만큼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혹은 피해야 하는 것이다. 요셉도 시험과 유혹을 많이 당했다. 귀한 집 아들이 종의 생활을 하였다. 억울하게 감옥에 갔는데도 시험을 잘 참아서 결국 면류관을 썼다. 요셉에게도 유혹이 찾아 왔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였다. 겉옷을 벗고 유혹하였다. 결국 도망하였다. 그래서 이것이 시험인지 유혹인지 분별해야 하는 것이다. 13절을 보자. 저는 사실 시험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고난을 생각하였다. 고난도 견뎌야 하는 것이 있고 자처한 것이 있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이 그런 오해를 한다. 내가 구원받았으니 내가 하는 모든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오해한다. 그래서 잘못하고 불미스러운 일을 만든다. 결국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다. 만민 중앙 성결교회가 있다. 이재록이라는 사람이다. 몇 년 전 영상을 보니 그 사람에 대해 기자가 취재하였는데 라스베이거스에서 행동하는 것을 취재하였다. 건축자금이 필요해서 그 짓을 하였다. 말도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것이다. 마치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것처럼 영적으로 교만하다. 신앙생활하며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처럼 교묘하게 엮는다. 이것은 이단이다. 그래서 분별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뜻인지 분별해야 한다. 14절을 보자. 내 내면에 욕심에서 시험이 비롯되는 것이다. 내 내면에 욕심이 있기에 외부에서 미혹하는 것이다. 둘이 연합하여 작동하는 것이다. 사기당한 적 있는가? 보이스 피싱 피해를 당하였는가? 저도 속은 적이 여러 번 있다. 제 아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 적이 있다. "아빠는 공짜를 좋아해~"라고 말이다. 아들과 함께 한국 가는 길에 하와이를 구경하고 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와이에 갔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입장료도 다 받는다. 길거리를 걷는데 어떤 사람이 물었다. 자기가 입장권을 무료로 줄 테니 30분만 설명을 들으라고 하였다. 30분만 들으면 쿠폰을 준다는 것이다. 저는 그 사람이 설명하는 대상을 살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그 티켓을 얻으려고 30분동안 앉아있었다. 그가 설명하는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끝났을 때 티켓을 달라고 했더니 무언가 쓰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미국 영주권자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아닌데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왜 데려왔냐고 서로 얘기하였다. 그래서 아들이 막았다. 결국 티켓을 못 받았다. 그 후 이 사건을 놓고 아들이 자주 놀렸다. 그 날 시간도 버리고 결국 욕심에 미혹받은 것이다. 내 안의 욕심이었다. 뭔가 홀린 것처럼 잠시 잠깐 최면에 걸린 것처럼 끌려간다. 이것이 미혹이다. 내 욕심이 시험을 만드는 것이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 부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으면 온갖 시험이 밀려든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 권력을 얻으려 하면 온갖 시험이 몰려온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 쾌락을 얻겠다고 하면 시험이 몰려온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 좋은 성적을 올리겠다고 하면 그 순간 온갖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목적이 좋으면 수단 방법도 좋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유혹이 있다. 내 욕심이 있는 곳에 시험이 있다. 결코 하나님이 시험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자기를 시험하는 것이다. 내 약점이 있는 곳에 시험이 온다. 사탄이 귀신같이 파고드는 것이다. 돈에 약한 사람, 명예에 약한 사람, 이성에 약한 사람, 쾌락에 약한 사람을 공략한다. 그래서 조심해야 한다. 자기의 약한 부분이 있으면 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기회가 틈타지 않게 해야 한다. 내 욕심으로 미혹된다고 하였는데 미혹한다는 것은 미끼를 던져 기만하는 것이다. 낚시할때도 미끼를 던진다. 심지어 먹이도 아닌데 걸어서 던진다. 대부분 어리석은 물고기가 그것을 문다. 그리고나서 덩치 큰 사람이 낚아 올리는 것이다. 삼손이 다른 부분은 다 강한데 한가지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바로 이성의 문제이다. 그래서 블레셋이 미끼를 던진다. 드릴라 뒤에 군대가 있는 것이다. 자기 눈에만 드릴라가 보이는 것이다. 그것을 무는 순간 내가 먹히는 것이다. 이것이 유혹인 것이다. 우리를 시험하는 자는 사탄이다. 광명에 천사처럼 과장한다. 그래서 이 유혹이 내 욕심으로부터 어떻게 가는지 보자. 15절을 보자. 시험의 경로와 유혹의 경로가 정말 다르다. 시험이 인내를 낳고 생명에 이르지만 유혹은 욕망에서 시작해 죄를 낳고 그 죄가 사망을 낳는다.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 미혹해서 죄를 낳는 줄기가 생겨 사망을 낳는다. 그리고 인생의 패배를 낳는다. 정욕은 죄의 어머니이다. 정욕은 사망의 할아버지이다. 죽음은 정욕의 손자이다. 죄는 정욕의 자식이다. 밧새바를 다윗이 범했다. 정욕이 간음을 하게 하였고 기만하고 거짓하게 만들고 살인을 교사하며 그 태어난 자식이 사망을 하였다. 내가 지은 한 번의 죄가 곧바로 사망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쌓이고 장성하여 사망에 이르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내부의 욕망이 외적인 유혹을 환영한다. 밖에 유혹이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욕망이 죄악 된 행동과 반복된 습관을 일으켜 결국 사망에 이른다. 자기 욕심을 위해서 살며 자기의 물질을 소유하기 위하여 세상의 향락과 권력을 추구하며 어떻게 하나님 탓을 하는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권력과 탐욕과 향락을 놓으면 안 된다. 자기의 욕망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욕심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결국 유익이 되지 못하는 현세적인 것이다. 16절을 보자. 사탄이 자꾸 속이고 기만한다. 사탄은 "네 아픔의 근원이 하나님이야. 하나님 책임이야."라고 말한다. 17절을 보자. 하나님의 선물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은사를 주신다. 그 선물은 가장 좋은 선물이며 온전한 선물이다. 예수 믿으면서도 세상에서 오는 것을 구하니까 유혹에 빠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사를 얻어야 영원하고 변하지 않으며 온전한 것이다. 좋은 것 주시는 하나님을 믿자.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참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모든 빛 들에 아버지이시다. 전능하고 완전하고 영원하시다. 이 세상은 어둡고 절망적이고 두려운 것이다. 인간이 이룬 것 뒤에는 악과 그림자가 있다. 거기서 주는 복 뒤에도 어둠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것은 그림자도 없이 완전하며 후회가 없다. 18절을 보자. 우리의 첫 열매는 계속해서 같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같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나아가야 한다. 생명으로 나가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으로 살면 생명이 작동하며 잉태되는 것이다. 죄악과 사망 대신에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유혹에 대한 얘기를 하며 진리의 말씀이 나온다. 유혹을 물리치려면 진리의 말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사탄이 욕을 한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대적하는 것이다.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하였다. 우리가 당하는 유혹에서 이기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서 어떻게 사탄을 대적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시편 119편 9절을 보자. 주의 말씀을 지킬 때 나를 지켜주시는 것이다. 금년에 많은 일들 중에 영적 분별력을 갖자. 그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며 분별하는 것이다. 그 말씀을 붙들면 어떤 유혹에서도 벗어나며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금년에 다가오는 사탄의 풍조에 대해서 잘 분별하여 견고히 서서 이겨내자. 어떤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과 더불어 온전한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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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1 수영로교회 주일예배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이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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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의 축복

창세기 5장 21~24절

찬송가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5장은 아담의 계보이다. 바로 앞에도 계보이다. 가인의 계보이다. 아담부터 노아까지 설명하는 것이다. 낳고 죽고 반복한다. 죽음의 역사가 설명되고 있다. 사실 흥미로운 주제는 아니다. 단지 몇 살에 낳고 죽는 얘기이다. 그런데 에녹에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아담의 7대 손이다. 마찬가지로 특별한 내용은 없다. 그런데 24절은 인상적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같이 느껴진다. 에녹에 대한 기록은 뭔가 부가적으로 붙은 설명이 있다. 이것이 특별하고 예외적이다. 출생신고가 있으면 반드시 사망신고서가 따라붙는다. 에녹은 출생증명서는 있지만 사망확인서가 없는 것이다. 창세기 5장 24절을 보자. 하나님이 그를 어디론가 데려가신 것이다. 핵심 메시지는 그가 죽음을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인류는 죄에 대가로 죽음이 찾아왔다. 우리에게 죽음은 저주인 것이다. 그런데 그를 죽음을 보지 않게 하시고 데려가신 것이다. 이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직접 당신의 나라로 데려가신 것이다. 그의 육체도 함께 데려가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부활하셨을 때 몸이 부활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셨다. 에녹도 특별한 것이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시적으로 보여준다. 히브리서 11장 5절을 보자.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실종이 아니다. 분명히 데리고 가신 것이다. 구약의 인물이지만 신약적 삶을 살았으며 부활을 보여준 것이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을 보자. 에녹이 어떻게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는가? 성경은 이것을 짧게 얘기한다. 그 답이 24절에 있다.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다. 인생의 비극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거부하는 것이다. 아담은 결국 하나님과 결별하였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거부한 것이다. 에녹의 삶에서 어떤 위대한 업적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딱 하나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던 노아. 창세기 6장 9절을 보자.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타락한 시대에 모든 이가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던 시대에서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동행인 것이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 것이다. 동행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이것을 생각해보자. 말할 테면 동행은 순종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간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마음과 뜻이 같아야 한다. 자기 원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다. 부부가 함께 살아도 정신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가정이 많다. 생각이 다르고 바라보는 게 다르면 동행이라 말하기 힘들다. 동행의 삶은 예수님의 삶으로 말할 수 있다. 십자가의 뜻은 아버지의 원함인 것이다. 이것은 즐거운 동행이다. 아모스 3장 3절을 보자. 뜻이 같지 않으면 동행은 불가능하다. 오랜 친구들은 서로 닮아있다. 고린도후서 6장 14절을 보자. 빛과 어둠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과 함께하기 어려운 것이다. 에녹은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다. 자기의 고집이 꺾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 것이다. 이것은 믿음이다. 고린도후서 5장 7절을 보자. 세상의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을 쫒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쫒는 것이다. 우리도 세상 친구들과 오랜 세월이 흘러 만났을 때 그 친구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서 거북함이 든다. 내가 다른 길을 걷는 것이다. 혹시 그 친구들과 마음이 맞는다면 이상한 것이다. 세상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 동행하는 삶인 것이다. 이것은 믿음이 필요하며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5절을 보자. 동행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쁘시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히브리서 11장 6절을 보자.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내 길을 고집하여 하나님을 바꾸려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나를 바꾸는 게 쉬운가? 하나님을 바꾸는 게 쉬운가? 내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일평생 우리의 초점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하게 맞춰져야 한다. 자기의 이기심을 내려놓고 고분고분 해져야 한다. 혹시 부부생활이 어려운가? 이것은 결혼을 했으면서도 자기의 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싱글로 살 때처럼 생활하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면 초점과 에너지를 상대에게 쏟아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아의 죽음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행하길 원하신다. 내 자아가 죽어야 한다. 마태복음 16장 24절을 보자.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따라야 한다. 내 자아를 부인해야 한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함은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자아가 죽는 것이다. 혈기가 왕성할 때는 동행할 수 없는 것이다. 에녹은 몇 년 동안 그렇게 하였나? 무려 300년 동안이다. 어쩌면 에녹은 더 죽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순간순간 꿈틀거리는 자아가 죽는 것이다. 부부도 한 사람이 완전히 죽으면 동행이 가능하다. 매 순간 나의 자아가 죽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은혜를 누리길 바란다. 자기의 고집이 죽어야 한다. 내 주장이 죽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원리는 죽음이다.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우리 삶의 비밀이다. 동행의 비밀이란 같이 걷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온전히 친밀해야 한다. 끓여 퍼진 라면이라도 좋은 사람과 먹으면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어떤 운동이라도 사이가 좋은 사람끼리 하면 좋은 것이다. 계속 함께 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친밀함이다. 이 모든 것의 있어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하는 것인가 이며 핵심은 친밀함인 것이다.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친밀한가 가 중요한 것이다. 우울증의 원인이 친밀한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친밀한 관계가 없다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수많은 관계가 있어도 진정한 관계가 아니다. 기계적이며 상업적인 관계일 뿐이다. 그 관계는 우리 삶의 깊은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에녹과 하나님과의 동행함이라는 것은 친밀함의 증거이다. 동행할수록 강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척도인 것이다.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관계는 깊어지지 않는다. 일로 만난 관계는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일 속에서는 깊다고 느끼지만 끝나면 우울증이 오기도 한다. 진짜 친밀한 관계는 쉬운 게 아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으며 많은 대가가 필요하다. 부부관계도 친밀해지는 것이 쉽지 않다. 어마어마한 대가가 필요하다. 신앙과 종교의 구분이 필요하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종교생활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경험적 삶이 필요하다. 종교생활이 왜 문제인가? 종교적 수행만 하기 때문이다. 부부생활도 마찬가지다.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밥하고 세탁하고 돈 벌어주지만 거리가 멀어 서로 소원해지면 위험해지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경험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의 특권은 신약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친밀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표현이 존재한다. 우리가 열심을 치면 바리새인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오늘날 그들이 우리 교회에 온다면 그들은 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게 자기 열심히며 자기 과시이며 자기만족일 뿐이다. 비유하자면 탕자의 맏아들인 것이다. 둘째 아들보다 더 심각한 사람일 뿐이다. 아버지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냉혹한 인간상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다면 종교생활일 뿐이다. 해로 갈수록 힘들 뿐이다. 에녹은 300년 동안 신앙생활하며 더더욱 친밀해졌을 것이다. 하나님을 더 사모하고 닮아가는 여정인 것이다. 같이 운동하고 밥을 먹고 수 없이 배우며 아빠를 닮아가는 것이다. 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동행하는 과정 속에 교제인 것이다. 성품을 닮으며 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신앙의 핵심이다.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며 경험하는 것이다. 더 깊어지고 풍성해지며 친밀해지는 관계인 것이다. 혹시 갈수록 기쁨이 없는가? 예배 중에 가장 좋은 순간은 언제인가? 이것은 종교적 수행을 하기 때문인 것이다. 날씨가 너무 좋아 주일날은 어디 가고 싶은가? 그것도 일만 남은 것이다. 열심히 봉사만 한 것이다. 나중에 꼭 열 받게 되어있다. 어떤 분은 교회 다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 장담컨대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에녹처럼 300년간의 동행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요한복음 15장 14절을 보자. 종교의 생활에서는 얘기가 안 나오는 말인 것이다. 어떤 신이 자기를 친구로 내려서 표현하는가? 나의 친구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향하여 벗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종교적인 것을 깨트리는 것이다. 주일에 제물만 받는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매일 만나서 밥을 먹고 삶을 나누며 대화하는 것이다. 한 번 필요하면 주고받는 거래가 아닌 것이다. every time everywhere 인 것이다. 에녹을 통하여서 보여주는 것은 위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일 뿐이다. 그의 어마어마한 축복의 한 요인은 그저 동행한 것이다. 그 시대 가장 오래 산 사람은 그 아들 므드셀라이다. 969살을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 산다고 축복이 아닌 것이다. 에녹은 그저 369살을 살았다. 그야말로 요절의 삶이다. 우리 삶에서는 30살 정도일 뿐이다. 이 의미는 양이 아니고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삶의 질이 중요한 것이다. 어떤 이는 한 생을 지옥처럼 살았다고 표현한다. 내 삶의 질인 것이다. 퀄리티인 것이다. 에녹은 홍수 이전으로 보면 가장 짧게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길게 산 것이다. 에녹은 하나님이 데려가셔서 영원의 세계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영원한 삶인 것이다. 우리 성도들 중에서도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다른 세계의 관점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예수님도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주님은 완성적 삶을 사셨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이다.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셨다. 우리도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주제가 아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얼마를 살았는가가 중요하다. 우리도 돌아보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은 삶은 블랙인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은 어떤 것도 상관없이 복된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새롭게 재편되며 재해석된다. 시편 23편에 아름다운 구절이 많지만 그중에서 5절이 아름답다. 인생의 가장 어려운 순간에도 두렵지 않은 이유는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동행하시기 때문에 두렵지 않은 것이다. 에녹의 생애를 보면서 그가 대단한 업적은 없지만 딱 하나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우자. 저도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목회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어떤 인간적 삶도 필요 없다. 지금은 업적을 쌓아야 인정받는다고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과업중심적이며 투쟁적인 시대이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다. 내 열심되어 살고 싶어 하고 다른 성도와 싸우기도 한다. 미국이 특히 그렇다. 기도와 전도에 열심히지만 혈기가 왕성하다. 방언 있는 사람이 옆집사람과 매일 싸운다. 유명한 교회는 많지만 참 신도를 길러내지 못한다.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 가면 딱 하나만 남을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한 것뿐이다. 교회를 몇 년 다녔는가를 묻지 않으신다. 나와 몇 년을 동행하였는가 물으시는 것이다. 에녹의 생애는 단 한 줄이지만 가장 강력하다. 다시 창세기 5장 24절을 보자. 나는 하나님과 일평생 동행하였습니다. 이것이 가장 임팩트 있는 말이다. 우리도 비석에 이렇게 써야 한다. 찬송가 430장 1절을 보자.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너무 좋은 가사인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과 동행하던 에녹을 그냥 데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너 더 이상 죽을 필요 없어. 나와 함께 가자."라고 하였을 것이다. 축복 속에 축복인 것이다. 이 지상에 삶은 쉽지 않다. 도처에 사람들이 쓰러지고 고통스러워한다. 에녹의 주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지만 그는 동행하였다. 하나님은 언제나 도우시며 인도하신다. 때로는 우리가 그 손을 뿌리치고 나 홀로 선택할 때도 많다. 야곱의 생애를 봐도 그렇다. 독자적 행보를 걸어가고자 하였다. 동행할 그 순간까지는 질곡에 생애가 되는 것이다. 좋은 믿음의 친구가 있다는 것이 축복인 것이다. 배우자와 함께 걸어가는 것도 축복이다. 큰 힘과 위로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걷는 축복은 어떤가? 그는 전능자이시며 창조주이시며 생과 화복을 주관하시며 동행하시길 원하시는 것이다. 그 하나님과 함께 동행의 길을 선택하고 알아가길 원하며 그 안에 거하길 힘쓰며 함께 걸어가서 친밀함이 깊어질 때 그 안에 충만한 에너지와 만족과 기쁨이 흘러나와 매 순간 걸어갈 수 있는 기쁨이 흘러나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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