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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 좋다는 것은
빌립보서 4장 4절
인간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본능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도록 만드신 것이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은 원리이다. 행복을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기쁨인 것이다. 기쁨을 누리고 있다면 행복한 것이다. 모든 것을 가졌어도 이것이 없다면 불행한 것이다. 전도서 2장 24~25절을 보자. 전부 먹고 마시고 하는 것이다. 솔로몬은 안 해본 것이 없는 사람이다. 저도 호주에 있어 봤는데 소고기를 좋아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안 먹는 것이 없다. 중국도 안 먹는 것이 없다. 그러나 세상에 들어가면 우울함이 있다. 세상의 만족은 허접한 것이다. 목이 마른 것이다. 너무 빨리 만족하고 끝낸다. 인류는 어떻게 해야 기쁨을 얻는지 갈길을 잃었다. 우울한 사회일수록 오락이 난무한다. 그리고 곧 쾌락으로 이어진다. 환락으로도 이어진다. 점점 강도가 높아져간다. 스포츠는 광기에 가깝다. 도박으로도 이어진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게임과 도박이 연결성을 가진다. 즐기기 위한 도구와 장비가 난무한다. 호주와 미국은 캠핑카가 대세다. 우리나라도 슬슬 따라가는 중이다. 그리고 술 문화와 와인문화가 다양하다. 서양은 더 역사가 깊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위한 술을 만든다. 창고에 저장하다가 기념으로 꺼내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엄청나다. 왜냐하면 사회가 스트레스가 많고 우울하기 때문이다. 기쁨을 얻지 못하면 환각적인 것을 따라다니며 절망이 채워진다. 우울해지고 어두워진다. 어떤 추구도 만족이 없다. 냉소적이고 칙칙하고 시니컬하다. 기쁨을 얻기 위해 찾아다닌다. 어떤 죄는 순간적으로 기쁨이 찾아오기도 한다. 유명하고 돈도 많지만 곧 도박장을 찾는다. 돈과 시간이 있으면 찾는 것이다. 마치 불나비가 불을 찾아다니다가 타 죽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존재의 밑바닥으로부터 갈망하는 것을 찾지 못하였기에 더 타들어간다. 기쁨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인생의 성공을 하면 어느 정도 기쁨을 누릴 수 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류현진이 다저스에서 연봉을 많이 받아서 똑같이 되고 싶어 하지만 웬만한 사람들은 마이너 그룹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배트를 몇 번 휘둘리다가 끝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 얻는다 해도 잠시에 기쁨이다. 쾌락이다. 영원하지 않고 지속적이지 않다. 세상에도 축제가 난무한다. 개발을 하고 먹거리와 시장을 만든다. 강에 고기를 풀어놓고 잡기도 한다. 결국 고기를 못 잡고 바가지를 쓴다. 널려있는 것에 기쁨을 추구하지만 짝퉁이다. 그 모든 것들은 계속 돈을 써야 한다. 기쁨을 주지 못하고 돈은 나가며 중독이 찾아온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만족을 얻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돈 벌기도 쉽지 않다. 그 즐거움이 찾아올 것처럼 보이지만 계속 목이 마르다. 기쁨이라는 것은 원초적인 것이다. 바울을 보자.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한다. 명령조이다. 감옥 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라지지 않는 기쁨이다. 왜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창조하셨다. 기쁨을 누리도록 창조하셨다. 절대로 우울하게 창조되지 않았다. 즐거움을 추구하도록 창조하셨다. 그래서 반드시 기뻐해야 한다.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 거짓된 기쁨을 추구하도록 갈 가능성이 많다. 오늘 세상에 불행은 거짓된 기쁨을 쫓는 것이다. 왜 그런가? 참 기쁨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에 청춘을 쏟아붓는다.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인생을 망치는 것이다. 불나비처럼 불을 쫓는다. 그러니 어떤 형태로든 기쁨을 추구하지만 찾지 못하는 것이다. 이 비밀을 오늘 쥐고 가자. 천국은 기쁨의 나라이다.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우울한 곳이 아니다. 기독교에 분위기도 밝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면 밝아진다. 그림도 이상하게 그린 사람이 있는데 무섭기도 하다. 마귀 닮은 추상화도 있다. 돈 주고 절대 사지 말자. 예수 믿는 사람은 밝다. 십자가가 기독교에 상징이지만 십자가는 부활도 완성되는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추모하는 종교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것이다. 부활은 기독교에 심장이다. 죽음을 절대 소망으로 바꾼 것이다. 어둠을 겆어낸다. 영생의 복음은 부활로 주어진다. 절망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을 이겨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우울함 정도로 사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사는 것이다. 어두움이 깃들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복음을 고백한다면 어두움이 깃들 수 없다. 고통과 신음이 있지만 믿음으로 고백하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이다. 소극적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기뻐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뻐하는 것이 멀어 보인다. 청교도 신앙 안에 좋은 보석 같은 유산이 있지만 아쉬운 것도 있다. 금욕적인 삶을 추구한 면이 있다. 적극적으로 누리기보다는 억제하려다 보니 어두운 면이 있다. 옆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도 몇십 년 전에는 금지된 것이었다. 하나님에게 인사하기 전에 옆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이 경망스러운 것이었다. 경건과 거룩으로 엄숙했지만 어두웠다. 예배 밖에서는 친하다가도 안에서는 조용하게 들어왔으며 여성들은 검정 치마를 입고 들어왔다. 경건과 거룩을 오해한 것이다. 율법적인 분위기가 많았다. 하지 말라는 것이 많았다. 아이도 대학 가면 교회를 안 나갔다. 너무 옭아매고 어두웠다. 고행 주위와 금욕주의가 성행한 때가 있었다. 수도원도 크게 웃는 것도 못했다. 표정이 없었다. 하나님이 한 방 내리칠 분으로 오해하였다. 예배 마치고 나갈 때 오히려 환해졌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기쁨의 하나님이시다. 시편을 보라. 기쁨으로 가득 차 계신다. 시편 16편 11절을 보자. 시편 90편 14절을 보자. 기쁨에 관련된 성경구절은 너무 많다. 존 파이퍼 같은 목사도 기독교 희락 주의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밖에 없다. 기쁨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어둡고 화가 나있으시다면 누가 다가갈 수 있겠는가! 우상들은 위압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크게 만들었다. 너 함부로 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우상이 작다면 흉측하게 만들었다. 겁과 두려움을 주었다. 많은 의무와 규칙을 만들어 억지로 따르도록 하였다. 예수님의 시대에서도 율법자들이 비슷했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기쁨이 떨어진 것이다. 잔치 집에는 반드시 포도주가 있어야 하였다. 의무감만 남은 것이다. 자발성이 없이 버텨내는 신앙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포도주를 회복시켜 주시었다. 기쁨이 회복되는 것이다. 기쁨은 우리의 힘으로 얻을 수 없다. 하나님에게서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세상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리스도만이 참된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책상 위에서 쓰지 않았으며 감옥에서 썼다. 자신이 누리면서 쓴 것이다. 성도들에게 나와 같이 누리자는 것이다. 바울에 삶은 누리는 것이다. 장가도 가지 않고 나이도 들었으며 기쁨이 없지만 가식적으로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옥 안에서 환경이 좋겠는가? 어떤 상황에서도 그 상황을 뛰어넘는 것이다.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이다. 무조건 기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희락이 기쁨이다. 성령의 열매라는 것은 주도적으로 맺는다는 것이다. 성령이 맺으시는 것이다.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이라는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보자. 성령을 따라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육체에 욕심을 맺지 않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성령을 따라 행하는데 육체를 거스르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19~20절을 보자. 이 모든 육체의 일들이 만족을 위하여 추구하는 삶은 성령을 거스르는 일인 것이다. 오늘 이 세상의 모든 모습이다. 우리도 영적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희락은 사라진다. 답은 갈라디아서 5장 24절이다.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우리가 왜 기쁨을 놓치는가? 자기 육체의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 때문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으며 자기중심적이다. 자아 중심적 삶이다.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 자아 중심적으로 살아간다. 기쁨은 곧 사라진다. 기도를 하는데도 기쁨이 없다면 점검해보아야 한다. 기도하는데 우울한가? 오랫동안 기도 생활하는데도 우울하다면 이상한 것이지 않겠는가? 하나님께 열심히 나아가는데 어떻게 어두울 수 있는가? 그분은 전능자이시며 아버지이신데 내 모든 것을 맡겼는데도 그렇다면 자기중심적 기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누구 죽는 꼴 보시려고 그러세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못해서 일 수 있다. 내 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내 문제만이 관심이다. 그렇다면 기쁨이 없을 수 있다. 주기도문을 보자. 양식을 보아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되어있다. 오늘도 먹을 것이 없어서 죽은 탈북자 가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기적인 기도가 아니다. '나'라는 세계에 갇히면 기쁨이 없다. 내 만족만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채워도 밑 빠진 독이다. 채워지지 않는다. 왜 채워지지 않는가? 내가 추구하는 것을 채워도 만족이 없는 이유는 창조하실 때 그렇게 만드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만족은 이웃을 위하여 헌신하여 드릴 때 기쁨이 오도록 설계된 것이다. 기름을 넣어야 자동차가 가는데 물을 넣으면 가지 않는 것이다. 사용설명서대로 써야 돌아가는 것이다. 내 만족을 추구하면 만족과 즐거움이 오지 않는 것이다. 기도가 내 기도만 한다면 기쁨이 없다. 초기에는 그럴 수 있다. 유치반이니 그럴 수 있지만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가족들끼리도 기쁨이 없다면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부부간에도 이기심이 찾아오면 기쁨이 사라진다. 철저하게 상대를 위하여 헌신해야 한다. 아내와 남편이 서로를 위하여야 한다.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은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틀림없다. 내 마음대로 안되니 화를 내는 것이다. 기쁨이 사라지는 것이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을 유의하자. "주 안에서 기뻐하라." 여기에 비밀이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못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바깥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확실한 결론이다. 기쁨의 근원이다. 그리스도이다. 출처를 알아야 한다. 주 안에서 살아갈 때 찾아온다. 요한복음 15장을 보면 포도나무 비유가 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이다. 이 말은 결국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탕자에 비유에서도 아버지에게 돌아왔을 때 잔치집에 잔치가 일어났다. 풍악을 울리고 기쁨에 겨운 것이다. 그 축제에서 가장 기뻐한 사람은 아버지이다. 그 돌아온 탕자로 두 번째로 기뻐할 사람은 맏아들이다. 자신의 동생이 돌아왔기에 기뻐해야 하는데 기뻐하지 않는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는 알아보지 못한다. 자기의 몫을 챙기기에 바쁘다. 아버지의 기쁨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였다. 마음 안으로 들어가려면 아버지와 교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의 핵심중 하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다. 창세기를 설교하면서 준비하다가 타락한 세상을 쓸어버리시는 하나님의 아픔을 느꼈다. 기계적으로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셨다. 굉장히 인격적인 하나님이셨다.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돌아온 기쁨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 길이 없으며 잔인하기까지 하다. 전적으로 자신만 생각한다. 집 안에서도 부모 마음을 아는 자식이 있고 전적으로 자신만 생각하고 아버지의 재산만 노리는 자식도 있다. 욕심을 가진 동안은 누구와도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안 되는 것이다. 왜 친구인가? 관계에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맏아들이 기쁨이 없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를 말하는 것이다. 규칙을 지키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관계는 없고 자기 공로에 빠져있다. 자기중심적으로 가면 불평과 원망밖에는 없다. 교회 안에서도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존재한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을 다시 보자. 정욕과 탐심을 못 박아야 한다. 이것을 못하면 기쁨이 사라진다. 육체와 함께 탐심을 못 박겠다고 선언하자.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주님이 주신 것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이 기뻐하게 하는 것인지 잘 모른다. 발을 동동 구른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지만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붙든다. 구별해야 한다. 관점이 중요하다. 주님이 주신 것으로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 좋은 생각들이다. 빌립보서 4장 8절을 보자. 좋은 생각들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 중 좋은 것들이 많이 있다. 무엇을 주셨는가? 구원이다. 구원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구원이라는 단어에는 항상 구원의 기쁨이 따라다닌다. 구원의 기쁨이 와야 한다. 구원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한테는 기쁨이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이것보다 더 큰 선물이 없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구원을 받았다면 기쁨을 누려야 한다. 이것을 잃으면 구원파가 좋아한다. 감당할 수 없는 기쁨이 몰려와야 한다. 십자가로 주신 구원이 광대하고 부요하고 놀라운 것인지 이해하면 그 기쁨은 그 어떤 것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누렸다. 바울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도 누리게 할 때 더 증폭됨을 알았다. 그래서 거기에 생명을 걸은 것이다. 자신의 삶을 복음을 위해 내어 놓았다. 바울이 발견한 것이다. 감옥에서도 매를 맞아도 장가가지 못하여도 좋다는 것이다. 바울 때문에 빛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얘기를 들어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았다. 복음이 누군가를 통해 전해지기만 한다면 기뻐하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기쁨이 혹시 자주 없어진다면 모조품일지도 모른다. 진짜 기쁨을 누리면 쉽게 빼앗기지 않는다. 가장 인생을 무겁게 만들고 우울하게 하는 것이 '죄'이다. 우울증도 자기 연민에 빠져있는 '죄'에 문제가 있다. 죄를 짓는 순간 급격하게 기쁨이 사라진다. '죄'는 원흉인 것이다. 관계가 꼬이면 기쁨도 사라진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이것이 사라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중 하나가 사죄의 기쁨이다. 염려와 불안이 사라진다.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 안에서 살면 세상 사람 눈치를 보지 않는다. 그냥 좋은 것이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남자들이 좋아한다. 그런데 비슷한 사람이 나온다. 그런데도 좋아한다. 주변에 아무 눈치 보지 않고 사는 것을 동경한다. 떠나고 싶은 욕구이다. 가정을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른다. 각자의 삶이 있는 것이다. 도시의 삶은 늘 눈치를 보며 산다. 남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 기쁨을 빼앗아 간다. 허세와 위선이 난무한다. 보여주는 것에 급급하다. 가면을 다 벗어야 한다. 오늘 우리 안에서 주님이 살아있을 때 자유할 수 있는 것이다. 외부에 압력보다 내적인 힘이 강하여야 한다. 영적으로 성숙해 갈수록 기쁨은 커진다. 믿음이 자라난다는 것은 결국 기쁨이 커져가는 것이다. 어떤 외부의 압력과 시선과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이 더 크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기쁨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 빌립보서 4장 13절을 보자. 어떤 형편에서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능력은 주 안에 있다는 것이다. 느헤미야 8장 10절을 보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살아갈 때 기대할 때 기쁨이 있다. 신앙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이 세상 문화에 편승하지 않고 주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며 이웃을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에 끝까지 완주해야 한다. 끝까지 완주하는 사람은 주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다. 누구보다도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자. 기쁨이 넘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하나님도 그렇게 살아가길 바라신다.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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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사람
야고보서 3장 1~12절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 3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이기수라는 작가가 '언어의 품격'이라는 책을 썼다. 야고보서는 말에 대한 얘기이다. 이것이 신앙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크며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말에 대해 주의할 것을 얘기한다. 말에 온도와 품격이 있다. 말을 들어보면 마음에 상태와 인격이 전달된다. 오늘 야고보서 3장 1절을 보자. 자신은 이미 선생이면서 다른 이들에게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한다. 저도 지금까지 '당신 목사 되세요~'라고 해보지 않았다. 제가 좋은 목사가 되지 못해서 일수도 있다. 자녀들도 그렇게 얘기하지 못했다. 교수였을 때도 학생들에게 '왜 신학교에 왔느냐?'라고 물었다. 학생들이 당황해하였다. 저는 목사가 인기 있는 직업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목사가 인기 있는 시대는 타락하는 시대이다. 목사가 인기 있고 대우받고 환영받고 대단해지면 교회는 타락하는 것이다. 아마도 야고보는 복음이 전해지면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런 말들을 했을 것이다. 왜 선생 되지 말라고 하는가? 선생은 말을 많이 한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하기 때문이다. 말을 통제하지 못하면 실언하고 상처 준다. 조롱할 수도 있고 실족시키기도 한다. 저도 생각해보면 전도사 시절에 말을 잘 못해서 상처 준 일이 있었다. 선생은 남을 많이 가리켜야 하니 그런 것이다. 행동과 말이 일치하지 못하면 위선자가 된다. 좋은 영향을 끼쳐야 하는데 나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선생은 많은 책임이 따른다. 교회에서도 교인들을 가르쳐야 한다. 교인들에 대한 책임이 무겁다. 천국에 가면 목사들은 입만 와 있다. 교인들은 귀만 와 있다. 말에 중요성이다. 말에 허구성이다. 3장 2절을 보자. 말에 실수만 줄여도 온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여러 가지로 노력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한 가지 길을 얘기한다. 그 한 가지가 말조심이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말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 말을 잘 쓰면 품격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품'은 수준이나 등급을 얘기한다. 사자성어 '이청득심'이 있다. 다른 사람에 말을 경청해야 그 마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경청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배우자도 마찬가지다. '과언 무환'이란 말이 적으면 근심이 사라지는 것이다. '언위심성'이란 말이 그 마음에 소리인 것이다. 말을 들어보면 마음이 어떠한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비유를 하셨다. 야고보도 중요한 교훈을 얘기할 때 비유를 들었다. 말의 긍정적인 것을 비유하였다. 3장 3~4절을 보자. 온몸에 에너지들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혀'인 것이다. 원하는 쪽으로 발휘하도록 해주는 것이 말이다. 거대한 힘들을 잘 결집시켜 유익이 되도록 인도해주는 것이다. 언어를 주신 본 뜻이다. 아무리 자동차를 잘 만들어도 제어하는 브레이크가 고장이라면 운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긍정적인 말과 건설적인 말과 사랑하는 말을 하려고 주신 것이다. 반면에 건설적인 것으로 쓰지 못하고 파괴적으로 쓰는 경우가 나온다. 5절을 보자. LA와 강원도에서 불이 났는데 헬기로 끄고 싶어도 잘 꺼지지 않는다. 말에 파괴력이다. 불과 같은 것이다.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절을 보자.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불사르는 것이다. 지옥불에서 나는 것이다. 사탄이 우리 인간에게서 혀를 관장한다. 거기서 지옥의 불을 지핀다. 혀를 잘못 사용하게 시켜서 온 세계를 지옥불로 만든다. 세치도 안 되는 혀가 화를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온통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 평생 쌓은 것도 무너뜨린다.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자. 생생하게 말 한마디 잘 못해서 망한다. 잘 못쓰게 되면 큰 사고와 재난을 부른다. 사람들의 인생을 망하게 한다. 남들도 태우고 지옥을 만든다. 어떤 사람을 가만히 보면 '지옥불 나오네~'라고 생각이 든다. 어떤 이는 마음에 상처를 남기며 인격을 모독하고 죽인다. 남에 뒤에 가서 악성 댓글을 남긴다. 사람들의 인격을 모독하고 죽인다. 오늘 3장 7절을 보면 야생동물도 벌레까지도 바다의 생물도 사람들이 잘 조련하면 즐거움을 위해 활용할 수 있다. 새들도 조련을 하여서 묘기를 보여준다. 자연 생물들은 조련이 되는데 인간은 자기의 혀도 통제하지 못하여 악한 것을 쏟아 놓는다. 3장 8절을 보자. 독사만 독이 있는 줄 알았더니 맹독이 사람의 혀의 있는 것이다. 계속 끊임없이 악을 지어낸다. 마태복음 5장 22절을 보자. 지옥의 불에 대해 예수님이 얘기하신다. 긍정적으로 좋은 일에 사용하라고 주신 말을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오용하는 것이다. 3장 9절을 보자. 언어의 이중성이다. 같은 입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다가도 저주하는 것이다. 이중적이다. 모순적이다. 찬송하던 입으로 같이 저주하는가? 하나님을 찬송하였으면 사람들을 칭찬해주고 격려해주고 위로해주고 활용해야 한다. 더 놀라운 것은 설교하는 사람들도 막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정죄하고 위협하는가? 언어폭력이다. 어떤 목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는 이중적이지 않다. 쓴 물이 계속 쓴 물을 낸다. 십자가의 은혜로 변화되었다면 새로운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오늘 말씀은 믿음의 언어를 쏟아내자는 뜻이다. 믿는다면 믿는바대로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선생도 말한 대로 살 수 있다면 선생이 되어라. 그럴 수 없다면 선생이 되지 말아야 한다. '언행일치'이다. 우리가 성령 받아 방언을 말한다고 하는데 새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믿음의 언어이다. 본래의 창조질서의 부응하는 것이다. 우리의 혀 조차도 그리스도의 통제를 받게 될 때 남을 세워주고 이로움을 주고 자신을 세우고 창조 역사에 부응하는 것이다. 성령의 우선적 역사는 언어가 달라지는 것이다. 말의 실수가 적어지면서 품격과 성품이 달라지며 인생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말에 실수가 없어지면 온전해지는 것이다. 오늘부터 결심하고 실습하자.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이루자. 인생의 방향도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 온전한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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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그 위험성
창세기 6장 1~8절
1~2장은 하나님의 창조, 3장은 죄, 4장은 가인의 살인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 5장은 죽음의 서곡이 퍼져나간다. 6장은 죄의 영향력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된다. 창세기를 잘 들여다보면 인간의 본질적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인간이 왜 파멸하고 고통에 신음하는가? 그것이 창세기에 있다. 원인은 죄 때문이다. 죄를 듣기 싫어한다. 어디를 가도 얘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 모든 문제가 죄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도 이미 알고 있다. 아이도 죄를 잘 짓는다. 가르치기 전에 다 할 줄 안다. 한 교역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이가 핸드폰을 사용한 얘기를 들었다. 돌아왔을 때 핸드폰이 따뜻하였다. 부모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아이가 갖다 놨었다. 죄는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가르치면 오히려 그르치는 것이다. 에덴동산은 완벽했다. 그런데 거기서 죄를 지었다. 죄를 짓는 것에 능숙하다. 아담 이후로 죄는 가속화되었다. 죄를 짓는 도구도 변화되었지만 본성은 같은 것이다. 창세기 6장 6절을 보자. 하나님이 한탄하시는 것이다. 민수기 23장 19절도 보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아픔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심판하시지는 않으시며 아파하시는 것이다. 창세기 6장 7절을 보자. 심판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악상을 얘기하시는 것이다. 창세기 6장 1~2절을 보자. 생육과 번성은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인간은 죄악으로 바꾸었다. 죄는 순기능을 역기능으로 바꾸는 것이다. 심판은 이것을 돌리고 정화하는 작업인 것이다. 우리도 쓰레기를 버린다. 쓰레기는 있어야 할 존재의 목적이 없는 것이다. 냄새가 나고 악취가 나고 균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쓰레기는 존재할 목적이 하나도 없는 상태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목적이 있다. 목적과 이유가 없이는 만드시지 않는다. 기대할 이유가 없을 때는 심판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놓치면 쾌락을 추구하며 죄악에 빠지는 것이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도 길을 잃었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삐끗하면 엉뚱하게 변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나 칼 막스, 진화론의 대가 찰스 다윈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론을 만든 어마어마한 공로를 세웠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곳에는 인간의 죄를 부정하는 것도 따라붙는다. 죄를 부정하고 싶어 하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면 죄의 기준도 사라지는 것이다. 죄의 판단 근거와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동성애도 인권이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인권을 다룬다고 하는 미명 하에 동성애 자체에 죄 악성을 다루지 못하게 한다. 죄를 죄로 규정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욕망이다. 공산주의도 죄를 사회학 구조속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인간은 죄를 왜곡하며 합리화한다.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아무렇지 않게 짓지만 양심이 있는 것이다. 양심도 자주 죄를 지으면 마비가 된다. 양심이 없는 것과 비슷하게 된다. 자기가 짓는 죄가 죄인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죄가 왜곡을 시키면 급속도로 끝을 향해 가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창조되지 않았다면 동물 수준으로 가는 것이다. 2절을 보자.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가인의 후손과 섞이는 것을 얘기한다. 비정상적인 결혼에 대한 심각성이다. 그 시대의 집단적 흐름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자손과 섞이는 것이다. 결혼할 때 매력을 찾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야곱도 라헬을 보고 7년을 하루같이 일을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성적 매력만 보고 결혼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왜 이 부분을 말하고 계시는가? 인류 역사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할 때의 파괴가 가정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도 마찬가지다. 비정상적인 사회는 비정상의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정이 미래의 어떻게 되는 지를 알려주는 징조인 것이다. 한 가정의 거룩 성이 결혼에 관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성의 신성이 부모에서 무너지면 다른 것은 볼 것이 없는 것이다. 신자와 세상의 구별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세속화라고 얘기한다. 하나님은 섞는 것을 싫어하신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도 칠족을 멸하라고 하셨다. 죄의 심각성과 파괴적인 것을 아시고 같이 망하게 됨을 아시는 것이다. 죄의 오염도가 굉장히 높은 시대에 살고 있다. 극심한 혼란은 명확한 기준이 없음이다. 죄의 기준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갈 때까지 가는 것이다. 신자도 세상과 다르지 않을 때 굉장히 위험한 것이다. 동성애가 무섭지만 꼭 그것 때문이 아니라 세속화 때문에 더 심각한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동성애 때문에 망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으며 의인이 없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롯의 자녀들도 세속화되어버렸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렇지 않은 사람과 똑같다면 하나님께서 기대할 것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면 심판밖에는 없는 것이다. 신자의 거룩 성은 생명이며 거룩을 잃으면 끝나는 것이다. 창세기 6장 4절을 보자. 네피림은 고대의 명성 있는 자들이다. 인간의 자랑을 얘기한다. 이것을 극대화하는 것이 창세기 11장에 바벨탑 사건이다. 성을 하늘까지 쌓으며 자기들의 이름을 자랑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랑은 하나님의 반역이 따라붙는다. 인류의 문명도 마찬가지다. 뉴욕의 9.11 테러를 보면 미국의 교만을 볼 수 있다. 성적인 타락은 인간의 교만이다. 교만은 하나님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무섭게 다루시는지 알 수 있다. 대적하시며 없애버리는 것이다. 교만은 자기 숭배이며 대적인 것이다. 교만하면 남 얘기를 듣지 않는다. 세상이 그렇다. 누가 더 높아지는지 사족을 다한다. 죽고 죽이는 것이다. 자기 이름에 생명을 건다. 죄 중에 죄가 교만이다. 점점 더 교만하다면 끝이 나는 것이다. 교만이 무서운 것이 경고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 망하는 길인 것이다. 창세기 6장 5절을 보자. 인간의 마음과 계획이 항상 악하다. 인간의 속성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 자체가 부패한 것이다. 신문을 보면 가끔 경악한다. 이것도 작은 표출에 불과한 것이다. 부패한 상태이며 항상 악을 생각한다. 죄의 계획은 악한 것에서 나온다. 구정물과 같은 것이다. 성경은 매우 의도적으로 말씀하신다. 인간은 매우 치밀하고 계획적인 것이다. 심판이 임하는 것이다. 심판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시점이 중요하다. 죄를 지을 때 다분히 의도적이다. 어떤 죄가 드러났을 때는 초범이 아니다. 마음으로 수없이 예행연습을 한다. 관찰하며 죄를 지으며 갈고닦는다. 인간의 욕망은 중간지점이 없으며 파멸에 이른다. 죄가 시작되면 볼륨을 올리며 빈도가 잦아진다. 죄로 망하는 것은 어떤 죄 때문이 아니다. 수많은 죄가 쌓인 결과이다. 우리의 비극도 우회의 사건이 아니라 돌발 사건이 아니라 불순종이 축적되어 그 사건이 터지는 것이다. 심판의 목전에도 회개가 없다. 가롯 유다를 보자. 스승을 팔고도 회개는커녕 자살로 마무리하였다. 우리가 매일 목격하는 모습이다. 우회로는 없다. 하나님은 외통수라고 하신다. 죄의 가속도는 누룩과 같다. 밀가루 반죽의 누룩을 넣으면 부푼다. 우리는 죄가 창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죄의 둑이 터지고 파도처럼 몰려온다. 구체적이고 담대하게 지으라고 부추긴다. 광고, 신문, 매스미디어를 통해 충실히 본능을 터트리라고 한다. 은혜의 강도를 높이지 않으면 이겨낼 재간이 없다. 하나님은 철저히 오류가 없으며 전지전능하시다.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이지 않으시며 완전무결하시며 오래 기다리신다. 심판을 미루심이다. 사실 우리도 지금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이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자비를 베푸시며 눈을 감으신다. 주일설교를 들을 때 "제발 그만해~"라고 하신다. 곁에서 사인을 주신다. 돌아올 순간을 기대하시는 것이다.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시듯 하신다. 하나님은 오래 기다리시지만 하나님은 심판 날이 오면 실행하신다. 죄악이 가득한 시대에서도 한 장면이 들어온다. 8절을 보자.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도다. 다 망하고 끝나는 시대에서도 은혜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6장 가운데서 8절은 영롱하게 빛난다. 노아가 심판에서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노아는 은혜의 빛줄기를 보았다.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 띈 것이다. 그 시대 백성과 다르게 살았기 때문이다. 9절을 보자.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이다. 그 시대를 거슬러 살은 것이다. 그 시대의 방식과 세속화를 피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바르게 살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하나님의 은혜에 이끌려 살아서 그런 것이다. 은혜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의 줄기를 붙들며 동행한 것이다. 우리도 우리 힘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세상을 역류할 힘이 생긴다. 세상의 악은 지금도 기승을 불이며 영향력이 어마어마하다. 청년들을 보아도 느낄 수 있다. 죄의 열기에 빨려 들어간다. 속수무책이다. 은혜를 붙들어야 한다. 죄인 이어서 자포자기하면 안 된다. 얼마든지 은혜를 붙들면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죄는 강렬하지만 은혜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널빤지와 송사리 얘기가 좋다. 널빤지는 강물에 떠내려 간다. 아무리 커도 떠내려 간다. 그러나 송사리는 아주 작은 몸집에도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복음이 들어온 이후 예수의 생명이 흐른다. 이제는 죄와 갈등하며 시름하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이기는 수준에 이르는 것이다. 로마서를 읽어봐도 그렇다. 로마서 8장을 보면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을 이기는 것이다. 기가 막힌 성경에서 빛나는 부분이다. 죄의 권세를 이기고 성령의 법이 죄를 다스린다.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는 약속을 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5장 21절을 보자. 우리를 승리케 하시는 것이다. 그 은혜의 힘이 왕 노릇 하여 영생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를 알기 전에는 죄가 왕 노릇 하였다. 대책이 없었다. 겉으로는 포장이 되어있는데 그 안에 죄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은혜의 시대이다. 은혜를 받기 원하는 자는 폭포수처럼 받을 수 있다. 영권 회복 집회에 은혜가 넘쳤다. 다르게 사는 힘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죄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갈보리 언덕에서 죄의 실체를 본 사람은 구토한 흔적처럼 여기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를 바꾸는 것이다. 흰 옷 입은 사람은 뭐가 조금만 묻어도 씻어내고 싶은 것이다. 조그만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거룩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이다. 거룩한 사람은 더더욱 거룩해지고 타락한 사람들은 더더욱 타락으로 달려가게 된다. 마지막 시대인 것이다. 노아처럼 은혜를 구하며 다른 길을 걸어서 구원에 이르러 승리하는 백성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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