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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4 주일예배

Q.T/은혜샘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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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뒤안길

열왕기상 11장 1~13절

 

지난 주간 분노로 보낸 것 같다.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였다.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노골적인 경제보복이다.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도 진주만의 공습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뒤통수를 친 것이다. 가장 가까운 한국에 대해 뒤통수를 친 것이다. 일본인 가운데 더러는 이런 표현을 쓰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개의치 않는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조바심에서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이 문제를 보려고 하지 않고 덮어 버리고 싶은 것이다.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타인의 아픔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일본에게는 한국이 가시 같은 존재인 것이다. 사실을 부정하고 왜곡한다. 허상을 쫒아 불나방처럼 달려간다. 오늘 말씀에서는 솔로몬의 역사를 들추어내시는 하나님이시다. 솔로몬의 모습을 보면 더 이상 누려보고 싶은 것이 없을 만큼 누렸다.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성공을 거두었고 그가 만진 것은 금으로 변하였다. 10절을 보자. '솔로몬 시대에는 은이 돌처럼 은하였다.'라고 되어있다. 솔로몬의 이야기로 시작하며 3장에서는 더 의미심장하게 표현한다.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였다.'라고 되어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흠모하고 그의 영혼 안에도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있었다. 그야말로 위대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의 지혜를 듣기 위해 찾아왔던 감탄과 증언을 우리도 들었다면 열왕기상 11장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장 이상적이고 지혜로운 사람을 뽑으라면 항상 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11장은 비극적이었다.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솔로몬에 모습에서 반면교사의 끝판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절대로 벌어지지 않아야 할 불순종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품이다. 선 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변질이 일어난 것이다. '솔로몬 왕은 외국 여자들을 좋아하였다'라고 되어있다. 서로의 관계 속에서 이방 여인들을 사랑한 것이다. 이방 아내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외국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이방 아내들이 문제인 것은 그들의 민족성이 아니다. 그들이 따르는 신들 때문이다. 그들이 믿는 우상들 때문이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거짓 신들의 처소를 묵인하였다. 솔로몬의 정략결혼들은 그를 다신론자로 바꾸게 만들었다. 11장에서는 결국 경고에 그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아키 레스 건을 드러내신다. 솔로몬의 치부였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솔로몬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신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솔로몬의 타락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았다. 서서히 조금씩 진행되었다. 1,000명의 아내가 하루아침에 맺어지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이미 우려스러운 마음으로 경고의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솔로몬의 선택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고 가르치신다. 구별되어야 할 왕의 도리를 말씀하신다. 신명기 17장 16절 이하를 보자. 왕이 없던 때에 왜 이런 규례를 주셨을까? 이스라엘을 둘러싼 이방 제국이 훨씬 세련되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곧 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여 눈에 보이는 사람을 앉히고 예배드리며 사람이 가로챈 것이다. 그것이 죄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 스스로의 어둠을 선택한 것이다. 내가 삶의 주인이며 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경배해야 함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이방 여인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솔로몬을 한 번 만나려면 3년이 걸렸다. 20년 동안은 건축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정략결혼을 통해 매주 결혼식을 올렸을 것이다. 이 여인들이 남편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신을 찬양하며 산당을 짓고 의식에 참여하며 외로움을 달랬을 것이다. 몰렉과 동일한 신인 것이다. 혐오스러운 우상들이었다. 솔로몬은 어두워졌다. 6절을 보자. 주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끝에 가서는 그의 인생 내내 잘못된 선택을 반복하였다. 그는 추락하기 오래전부터 죄에 빠져있었다. 수많은 결정과 선택의 결과인 것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았을 것이다. 로맨스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우상숭배의 길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이런 명분을 내세울지도 모른다. '대의를 위해서 라고'말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물건을 살 때 소비중독에 빠지기 쉽다. 내가 소유한 물건에서 찾는 것이다. 우리 눈과 마음은 하나님과 멀어지며 무감각해지며 성령님을 근심케 한다. 사적인 이성과의 만남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절대 바람직하지 않은 사귐에 빠진다. 그들의 삶의 멸망의 씨앗을 뿌린다. 필립 라이크라는 분이 '솔로몬, 어떻게 유혹을 이기는가?'라는 책에서는 뱀들이 작지만 치명적이라고 하였다. 그것들을 죽이지 않으면 거대한 뱀이 될 것이며 우리를 죽일 것이라고 얘기한다. 사소한 죄들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고 얘기한다. 쉽게 빠지는 일들에게서 경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다. 내 소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유는 일종의 덫이라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재물을 축적하기 시작하고 그것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시편에서 다윗은 '재물이 늘어도 네 마음을 거기에 두지 말라'라고 얘기한다. 주중에 '차이 나는 클래스'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로마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로마가 쇠망하고 멸망한 이유를 말하는데 수백 가지라고 하였다. 한 가지 퀴즈를 내었다. 그 퀴즈의 답은 '번영'이었다. 스스로 안전과 쾌락을 추구하며 하나님에게서 떠나갔다. 그 번영이 등을 돌리게 만든 것이다. 자기를 위해 은과 금을 쌓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솔로몬에게 재물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권력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아가서에서 참 만족과 기쁨을 주시는 것을 알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돈, 성, 권력을 주시는 것이다. 이것들이 더럽고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누리게 하시는지와 목적을 잊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선물인 것이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때 우상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도 진공상태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지 않으면 그 자리를 무언가로 끊임없이 대체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선물로 말미암아 진짜 행복을 경험한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즐거워함이 너희의 힘이니라'라고 하였다. 하나님 만이 우리의 힘이 됨을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 돈과 권력은 그저 도구일 뿐이다.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수단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의 도구인 것이다. 이것을 망각하면 예외 없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며 쌓는다. 번영이며 우상인 것이다. 이것이 죄에 본질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짐승의 형상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그런 삶으로 달려간 것이 솔로몬의 비극인 것이다. 그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만이 참 창조주이신 것임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잠깐 높인 것이다. 패배한 민족의 신은 승리한 민족의 신을 섦 기는 것이 그 당시 모습이었다. 그것들이 발 밑에 있어야 하는데 머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백성들을 착취하였다. 협박하고 조정하는 것이다. 타락한 모든 이의 방식이다. 일본이 지금 그러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일본만큼 GDP가 높다면 어떤가? 우리가 일본처럼 안 그랬을까? 아마 우리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땅의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사장님들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두들겨 패거나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며 지켜가야 하는 것이다. 왜 그는 추락하는 것을 방지할 만큼 지혜롭지 못하였는가? 우리의 재능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요긴하게 쓰일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이 떠나 있다면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데 사용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교회가 고린도 교회였다. 그들은 어린아이라고 하였다. 솔로몬의 이야기가 비극이 된 까닭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로 충만하길 바란다. 세상의 가치를 다 더해도 영생과 구원의 가치의 1그램도 되지 못한다. 금은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다. 솔로몬의 황금빛 나라는 하나님 영광의 나라에 비교한다면 희미한 빛인 것이다.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이 솔로몬보다 부유하다. 훨씬 더 신선한 음식과 옷을 입는다. 편리한 가구와 음악, 교통수단을 이용한다. 내 소유의 자동차를 가졌다면 전 세계 3% 안에 드는 부자이다. 내 명의의 자동차이다. 이 모든 것은 수준 높은 삶을 누리게 한다. 그러나 그분의 목적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 영혼의 참 만족은 없는 것이다. 요한일서 2장 17절을 보자. 그런 마음에서 지키라고 얘기하신다. 세상의 금을 혐오스러운 우상으로 바꾸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법은 복음과 사역에 내 몸을 맡기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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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7 중앙성결교회 주일 3부예배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한기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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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하지 말라

야고보서 2장 1~13절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야고보는 자신의 형제였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였다. 믿음을 가진 자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믿는 사람은 차별할 수 없는 것이고 차별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조차도 사람을 차별한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한다. 밖으로 보이는 것을 보고 첫인상을 갖지만 그것으로 그 사람을 속단하고 판단하면 안 되는 것이다. 사무엘 선지자가 왕제를 피택 하기 위해 이세에 집에 갔는데 거기서 엘리야를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고 하였다.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보아야 한다.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 한다. 그러면 누구나 존귀하게 보인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면 안 된다. 우리나라도 외모지상주의가 심한 것 같다. 성형도 많이 한다. 그 사람이 그 사람 같다. 잠시 잠깐 외모가 통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속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속 사람이 아름다워야 한다. 또 가진 것으로도 판단한다. 학식을 가졌느냐에 따라 판단한다. 이것은 세상적인 기준이다. 스펙을 쌓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을 드러내기 위해 애를 쓴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아야 한다. 교회에서도 그 영향을 드러내지 못하면 교회가 아닌 것이다. 긍휼히 여기지 못하면 사람을 차별한다. 장애를 가진 사람은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데 긍휼히 여기지 못하면 함부로 여기게 된다. 매정하게 된다. 교회는 그런 문화를 바꾸어야 하며 솔선수범해서 모범적인 공동체로 거듭나야 된다. 전라도 김제에 가면 기억자형 교회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80년대에는 남자와 여자가 같이 앉는 것이 문제가 되어서 기억자형으로 앉았다. 조덕삼과 이자익이라는 사람의 얘기가 있다. 이자익 씨는 친척집을 행상하다가 김제의 조덕삼 씨의 마부로 들어갔다. 조덕상 씨 집에 에이트 씨가 오셔서 전도를 하였다. 그래서 조덕삼 씨와 이자익 씨가 신자가 되고 세례를 받아 집사가 되었다. 금산교회를 지었다. 1909년 초대 장로를 세웠다. 투표를 했는데 조덕삼 씨는 떨어지고 이자익 씨가 되었다. 교인들이 뽑은 것이다. 그분이 발언권을 얻어 얘기하였다. "오늘 결정은 하나님이 결정하셨습니다. 우리 교인들은 훌륭한 사람을 뽑았습니다. 이자익 장로님은 믿음이 좋습니다. 저도 섬기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물론 그 후 조덕삼 씨도 장로가 되었다. 그분이 보기에 이자익 씨가 총명하게 보여 유학을 보내 주었다. 결국 이자익 씨가 목사가 되었다. 금산교회 2대 담임목사님으로 섬기게 되었다. 훌륭한 목사가 되었다. 조덕삼 씨의 손자도 국회 조세형 장로의 할아버지였다. 종로에 숭동교회 얘기도 있다. 그 교회에 예수 학당을 지어 공부를 시켰다. 그 아이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어가는 얘기를 듣고 사무엘 씨가 에비슨이라는 의사를 소개해줘서 고쳐주었다. 그 아이 아버지는 백정이었다. 에비슨 씨는 고종을 치료하던 사람이었다. 그 당시 백정은 자기 이름도 없었다. 그 사람이 세례 받아 이름을 얻었다. '박성춘'이다. 열심히 전도하였다. 친구들도 백정이었다. 어떤 교인들은 같이 예배드리기 싫어 떨어져 나갔다. 안동교회는 양반들이 모이고, 숭동교회에는 낮은 신분의 교인들이 모였다. 박성춘 씨의 아들 박서형 씨가 자라서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1호 졸업생이 되고 의사가 되었다. 사무엘 선교사도 계급 철폐 운동을 벌였다. 금년도에는 3.1 운동 100주년이다. 운동하다가 피신하는 사람들을 숨겨주기도 하였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유교사회에서 가지고 있었던 차별을 몰아내었다. 오늘 구절에도 회당에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볼 수 있다. 말씀 듣기 위해 회당에 온 것이다. 거기서도 차별을 한다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 시대에는 그런 상황이었다. 회당에 아름다운 옷을 입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남루한 옷을 입고 오는 사람이 있다.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에게 더 관심을 쫒아 대우해주는 것이다.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은 차별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 당시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다. 귀족 같은 사람이 들어오면 주목하는 것이다. 그를 특별 대우하게 되면 그 사람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가 교만해지고 모두를 우습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반대로 가난한 사람은 실족하지 않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교회가 세상과 다를게 무엇인가? 그렇게 하면 모두 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외식적인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제가 미국에서도 10년 정도 살아보았다. 미국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면 잘 모른다. 나중에 알게 된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대충 알아보겠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 4절을 보자.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차별하는 것도 악한 것이라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차별하면 안 된다. 모두 존귀한 존재이다. 어린아이라고 함부로 해서도 안된다. 부자라고 특별대우받으려고 기대하면 안 된다. 제가 한국에 와서 공동 목회를 한 적이 있다. 그 교회는 회장님과 같은 고위직이 많이 나오셨다. 그분들은 전도사에게 "내 차 좀 갖다 놔"라고 하였다. 그분이 평소에 그렇게 사니까 아마 그런 식으로 행동한 것 같다. 사실 우리나라가 그런 것이 심하다. 너도나도 좋은 차를 선호한다. 제 차는 한참을 기다려야 나온다. 너무 차별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동하려고 탈북하여 이 땅에 뿌리내리려는 사람들을 많이 차별한다. 야고보서 2장 5절을 보자.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시는 것이다. 믿음의 부요함을 주시는 것이다.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해 주신다. 가난한 자에게 호의를 베푸신다.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신다. 누가복음 6장 20절을 보자.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환영받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 어려움을 겪었지만 교회 오니 사람 대우받는구나라고 느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억압하고 빚 못 갚은 사람을 법정으로 데려간다. 교회까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2장 8절을 보자. 최고의 법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모든 명령의 완성과 십계명의 정신이 이것이다. 차별하는 것과 정 반대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차별은 믿음과 대조적이며 사랑하라는 것과도 대치된다. 아무리 율법 잘 지켜도 한 가지라도 어기면 계명을 범한 것이 된다. 그 법 중에 최고가 사랑하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그래서 사랑하라는 것이다. 2장 13절을 보자. 사랑이 긍휼과 통한다. 다른 사람을 차별하면 똑같이 그런 심판이 내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심판이 없다는 것이다. 긍휼히 여겨야 한다.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확산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도 개선되고는 있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난민이라던지 짐승 같은 대우를 받는 곳이 많이 있기에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이 땅의 남아있는 이웃들을 북돋아 주고 함께해주는 것이 복음이요 믿음이다. 최고의 법을 지키는 것이다. 뜨겁게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며 위로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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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6 주일예배

Q.T/사랑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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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11장 21~27, 38~43절

 

사랑의 교회에 다시 오게 되어 영광이다. 남가주에 있는 바이올라 대학교에서 문안드린다. 바이올라 대학교는 여러 면에서 특별하지만 오정현 목사님이 탈봇신학교에서 공부하셨기에 더 그렇다. 그래서 더욱 가족 같은 느낌이다. 사랑의교회 찬양팀도 바이올라 대학교 합창단과 함께 협연 했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런데 이 사랑을 경험한 것은 2010년도이다. 로잔대회에 손경주라는 자매를 보았다. 북한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중국으로 탈북하였고 임신하였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북한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가 살해당하셨다. 그녀는 로잔대회에서 간증하였다. 그 간증을 마치고 손경주 자매와 오정현 목사와 셋이서 만났다. 그녀가 바이올라 대학교에 올 수 있도록 초청하였다. 그녀는 몇 년간 영어공부를 하며 지냈다. 바이올라에 합격하였고 4년 동안 공부하였다. 지난 12월에 졸업하였으며 남편도 얻었다. 폴장이라는 분이었다. 바이올라 대학교 학생 6,000명과 손경주 자매를 대표하여 사랑의 교회와 오정현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바이올라 대학교는 6,000명의 학생이 있다. 할리우드와 디즈니 사이에 있다. 학사부터 박사에 이르는 다양한 학위가 있다. 한국과도 100년간 교류하였고 선교사분들도 한국에 갔었다. 이제는 한국에 선교사를 모시고 있다. 저희 바이올라 대학교는 성경의 권위와 대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 성경말씀을 나누자. 그리스도인이 살아감에 있어 요한복음 11장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믿음의 두 가지 면모를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것이 사실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전해주신 그 말씀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믿음이 요한복음 11장에 중심이다. 나사로를 죽음에서 건지신 것이다. 요한복음 11장에는 믿는다는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요한복음에서는 믿는다는 표현이 어떤 것보다도 많다.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한다. 이 한 장에서는 그 어떤 장에서 보다 많이 등장한다.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려있다. 두 명의 여성도 있다. 마르다와 마리아이다. 오라버니가 죽게 되어 난처한 입장에 있다. 예수님에 귀에 나사로에 대한 얘기가 들려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4절을 보자. 나사로에 대한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할 것임을 얘기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굉장히 멀리 계셨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다니와 예루살렘에도 계시지 않았다. 요르단강으로부터 30km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보내야 하였다. 가령 주일 아침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이 메신저가 그것을 전해야 했을 것이며 월요일 아침에 출발해야 할 것이다. 또 저녁에나 도착할 것이며 이틀이나 더 걸릴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출발하지 않으셨다. 6절을 보자. 나사로에 대한 얘기를 듣고 거기에서 이틀을 더 거하신다. 나사로가 죽는데도 이틀이나 더 계시는 것이다. 나에 일정에 맞추지 않으시는 것이다. '내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예수님은 어디 계셨는가?' 우리는 절박한데 어디 계셨는가?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런 감정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사흘이 지난 다음에야 예수님이 등장함을 말하신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뛰어나가 맞이한다. 마르다가 말한다.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얘기한다. 나사로는 이미 동굴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 앞을 큰 돌로 막아서 있다. 소망이 없는 상태이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불평한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셨다. "마르다야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질문하신다. 그리고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렇지만 마르다는 돌을 옮기고 싶지 않았다. "예수님, 지금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요한복음 11장에 핵심이다. 성경 가운데 가장 위대한 내용인 것이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얘기하실 때 어떤 의미로 말하는 것인가? 그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말씀은 두 가지를 마음이 담겨있다. 그 하나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내가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의 모습과 동일하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신 것이다. 마르다는 이것을 믿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의 면모는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것을 믿는 것이다. 사실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랑의 교회의 기초이다. 이 세상과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것을 기초로 여겨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며 사실이다. 이 말씀은 분명한 것이다. 제가 한국에 자주와 보니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목사님. 사모님. 김치."같은 것이다. 또 하나는 "확실과 확신"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며 분명하게 확실함을 믿는 것이다. 이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밑줄 긋고 암송합시다. 취하는 음식이 되게 하자. 처음부터 통독하며 계속해서 이어가자. 성경 한권을 묵상하고 읽어가자. 한 구절을 탐구하며 읽자. 이 교회에 함께하는 것이 좋은 것은 절대적으로 말씀 중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확실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함이다. 이것에 뿌리내리시길 바란다. 부활을 믿을 때 확실해진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일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마르다가 모든 정답을 얘기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믿지만 나사로는 누워있는 것이다. 신학적인 진리가 아니라 기적이 필요한 것이다. 마르다는 그 믿음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두 번째가 바로 이것이다. 확실하게 믿는 것뿐 아니라 확신하는 것이다. 예수님께 이루는 것에 대한 확신이다. 우리 삶의 불가능한 것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하여도 확신하는 것이다.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확신하는 것이다. 부족하거나 하지 않다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 무덤에 다다르셨다. 그곳에 서서 하신 말씀이 마르다의 인생을 바꾸었다. 저는 하나님 말씀을 많이 알며 많은 구절을 암송하고 있으며 구약과 신약도 모두 공부하였다. 그러나 저도 마르다와 같은 모습이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동정녀에게 나으심도 믿습니다. 그러나 정말 불가능한 상황이 내게 펼쳐질 때는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도하며 능력을 확신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여러분께도 기도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은 지금 어디인가? 관계나 가족, 도시와 교회 아니면 나라인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것은 쉬울지 모르지만 우리 상황보다 그 능력이 더 크심을 믿어야 한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그것을 밝히며 사랑의 교회를 통하여 이 말씀을 믿는 것뿐 아니라 확신하여 그 능력을 보여주심도 믿자. 그 확신을 믿어야 한다. 생명이요 부활이심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죽어있는 상태에서도 생명을 주심을 믿어야 한다. 왜 그런가? 왜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가? 우리 기적을 자랑하기 위해서? 남에게 이것을 보라고 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가족과 교회에 집중되기 위함인가? 교단에서도? 그것이 아니다. 그 한 가지는 40절에 나온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시라는 이유는 사랑의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이다. 그러니 이렇게 믿으라는 것이다. 이 세상 가운데 박해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이것을 믿을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도 자존감을 위해서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믿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이다.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이다.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 전부를 위해서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초청하는 것이다. 1세기에 유대 문화에서는 시체라는 것을 규정할 때 공식적으로는 죽음의 상태는 아니었다. 둘째 날에도 마찬가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셋째 날에도 공포하지 않았다. 그러나 1세기 유대 문화에서는 사흘째에는 죽었다고 공포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은 넷째 날에 나타나셨다. 모두가 낙심할 때 나타나신 것이다. "이것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라고 하셨다. 돌을 옮기는 사람들이 보게 되는 것이다. 43절을 보자. "나사로여 나오라."하고 명하신다. 나사로가 일어나 걷는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라고 말하신다. 정말 놀라운 장면이다. 어렸을 때 한 목자가 말하였다. "예수님이 '나사로여 일어나라' 라고 부르지 않으셨다면 모든 시체가 일어났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는 이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하나님은 담대함으로 이끄신다.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에 이것에 이르는 것이다. 말씀을 확실하게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할 때에 신뢰할 때에 우리는 기적을 본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선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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